3대에 걸친 너무나 정교한 심리묘사와사실 같은이야기
3대에 걸친 너무나 정교한 심리묘사와 사실 같은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5.296
21.7.7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순수 박물관'을 읽고 작가의 작품을 모두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작가의 첫 작품부터 차례대로 보기 위해 이 책을 골라 들었다.
거의 550페이지 분량의 2권짜리로 100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작가의 필력에 빠져버렸기에 읽기로 했다. 1권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묘사가 탁월하다고 하는 장점은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장애물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사건보다는 심리 묘사가 마치 수다를 정말 너무도 많이 떠는 것처럼 책 속에서 무수한 독백이 펼쳐지기에 지루하다는 인상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 그래서 1권을 읽는데 일주일 이상이 걸린 듯하다.
그래도 시간이 날 때면 책을 집어 들고 읽었다. 그러다 재미가 생기고 무엇보다 허구가 아닌 진짜 이야기를 읽는다는 착각에 빠지고, 수많은 심리를 표현한 독백은 감정 이입하기에 쉬워서 이후로는 쭉쭉 책을 읽게 된 듯하다.
역시나 작가의 필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이 책을 쓰기 위해 무수한 자료를 수집하고 허구의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독자들이 허구인지 현실인지 구분을 못 할 정도로 아주 정교하게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들을 교묘하게 배치했기 때문이다.
. 파묵은 “소설가란 개미와 같은 끈기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가는 사람이며, 마법적이고 몽상적인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자신의 인내심으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소설가의 자질로 끈기와 인내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철저한 근면성을 요구해왔다. 오르한 파묵은 “작가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글쓰기를 해야 하고, “작가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첫째도 인내요, 둘째도 인내요, 셋째도 인내”라고 강조한다.
2권까지 100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을 완독 하니 과연 “작가는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이 책을 썼구나 하는 경외감이 저절로 들었다. 한 땀 한 땀 정성껏 정밀한 수를 놓듯이 1905년부터 70여 년에 걸친 3대의 이야기를 통해, 터키의 단면을 돋보기로 보듯이 자세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와 터키가 동서양이 만나는 지정학적 위치는 항상 서양과 동양의 문물이 가장 먼저 충돌하기 때문에 터키 사람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파묵의 다른 소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도 인물들의 갈등을 일으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가난한 상점 주인에서 시작한 제브데트씨를 거쳐 3대를 거치는 동안 산업의 발달과 무역으로 터키의 상류층이 되어 버린 제브데트씨의 일가는 2대인 아들 세대부터는 먹고사는 문제보다 안정되고 풍요로운 경제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서양의 앞선 문물과 사상을 터키 사람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고 유럽이나 미국 유학을 통해 봉건제도가 아닌 시민사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거나 그런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특히나 제브데트씨의 둘째 아들인 레피크가 안주하던 상류층의 삶에서 깨어나 뭔가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이상주의적 실험가로 변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파묵이라는 작가가 터키 이스탄불의 상류층의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터키의 지식인이 느꼈던 젊은 날의 방황을 레피크나 레피크의 아들인 아흐메트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파묵의 첫 소설이면서 그의 모습이 많이 반영된 소설이라 평가받고 있나 보다.
하지만, 레피크의 이상은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무위로 끝나버리고 알려지지도 않은 채 그는 암으로 죽는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고 그의 생각을 널리 알릴 방법으로 출판사를 차렸지만, 대중성도 없고 그 이상을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기에 재산만 탕진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채 실패한 삶으로 생을 마감한다.
레피크의 아들 아흐메트는 유복한 가정의 손자이기에 프랑스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지만, 아버지인 레피크가 남긴 재산이 없어 과외를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우연하게 아버지인 레피크가 남긴 비망록 노트를 여자 친구인 일크누르의 도움으로 해독해 가면서 레피크의 이상을 알게 된다.
레피크가 안일한 삶을 버리고 택했던 이상은 바로 아들인 아흐메트와 아들의 여자 친구인 일크누르의 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너희 아버지도 그 말에 매료되셨던 것 같아......
암흑에 대해, 빛에 대해, 삶에 대해, 조국의 구원에 대해, 다른 삶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레피크가 추구했던 이상을 알게 되었다고 아흐메트가 드라마틱한 일을 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아흐메트의 할머이니이자 제브데트씨의 부인의 죽음으로 이 소설은 아주 무미건조하게 끝나고 만다.
뭔가 결말을 기대했다면 실망을 할 만큼 이 책의 주인공이나 인물들은 이루고자 하는 것들을 제대로 이룬 사람이 없다. 보통 정도의 성공과 그 이면에 숨은 인간적 갈등을 모두 떠안으며 한 인생을 살아간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로 우리네 사람들이 갖는 고민들을 가지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드라마틱한 결말도 없이 우리네 인생과 비슷하게 소설은 막을 내렸나 보다.
이 책을 읽고 무슨 교훈을 얻었지?
생각해보면 교훈은......?
딱히 없다.
그럼 무엇 때문에 끝까지 읽었을까?
아마도 그건 아주 사실적으로 정교하게 만든 제브데트씨 3대의 이야기를 통해 1905년부터 1970년까지의 터키의 역사적 상황과 그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한 사람들, 또 이러한 환경에 따라 그들이 선택한 인생을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재미 때문인듯하다.
마치 1900년대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떻게 가정을 꾸려 살아갔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생활사 박물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박물관에 가면 정교한 모형을 보면서 탄성을 지르게 되는 것처럼, 파묵의 이 책은 첫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정교하게 그 면면들을 사실적으로 아주 자세하고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세밀화가처럼 작가 파묵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브데트씨가 아픈 형이 누워있는 하숙방에 가서 심하게 기침하고 있는 형의 모습을 보는 장면은 실제 내가 제브데트씨가 되어 기침을 심하게 하는 형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제브데트씨의 아들 레피크가 하는 고민들도 그 인물이 아닌 내가 하게 되는 것 같이 감정이입이 바로 쉽게 된다.
일련의 모든 장면들이 너무나 잘 짜인 구조안에서 유기적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래서 독자들보다 작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에게는 가장 좋은 모델이 되지 않을까 싶다.
문체와 인물, 심리묘사와 사건들이 정말 실제 같고 자연스럽기에 완벽한 작가 지망생들의 교과서로 보면 제일 좋을 것 같다.
반면, 흥미면에서는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다. [내 이름은 빨강]이나 [순수 박물관]처럼 극적인 요소는 없고 뭔가 깊게 남는 것은 개인적으로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말마저도 무미건조하게 끝나 도대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뭘까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암흑에 대해, 빛에 대해, 삶에 대해, 조국의 구원에 대해, 다른 삶에 대해, 인생의 의미에 대해
그 당시에 실패로 끝난 레피크의 고민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소시민들의 작은 고민과 작은 발걸음이 모여 사회는 보이지 않게 조금씩 진보를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누리는 삶은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고민과 실패를 자양분을 삼아 과거보다 나은 삶을 누리게 된 것은 아닐까?
살면서 삶에 안위하지 말고 항상 깨어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파묵 작가는 이 책을 자양분으로 삼아 이후의 작품과도 연결시키면서 작품 세계를 확장하며 왕성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고, 나오는 작품 모두 명망 있는 문학상을 거머쥐며 노벨 문학상까지 타는 쾌거를 이룬다. 그뿐만 아니라, 잘 팔리는 책으로도 대중성까지 얻게 된다.
파묵 작가가 뚝심 있게 자신의 소설을 자신의 삶처럼 진지하게 파고들며 진정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터키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도 좋아하는 듯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작가인 '오르한 파묵'에 대해 더 관심이 생겼다. 앞으로 파묵 작가의 소설은 다 챙겨볼 생각이다.
제브데트씨의 아들들을 완독 했다는 점에 의의를 둔다. 딱히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작가의 필력은 첫 작품부터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 같다.
암튼, 오르한 파묵에 빠진 사람은 결국 이 책을 읽게 될 것 같다.
나중에 독서를 더 많이 해서 내공이 쌓이면 이 책을 좀 더 잘 이해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