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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스키 Aug 31. 2023

사랑과 중독 그리고 절망

《웨하스 의자》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옮김)

 “사랑해.”
애인은 나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나도 사랑해.”
하고 말했다. 똑바로, 성실하게.
나는 매일 조금씩 망가져 간다.  
- 본문 중에서


한때 마요네즈에 빠진 적이 있다. 처음에는 친구의 작은 호의였다. 슈퍼에서 귀여운 미니 사이즈 마요네즈를 발견한 친구가,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샀다며 선물로 주었다. 딱히 마요네즈를 좋아한 적도 없었고 그런 말을 한 기억도 없었기에 좀 의아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받았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큐피 마요네즈를 향한 나의 사랑의 시작.


당시 나는 일본에서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기에 집에서 식사 준비하는 것에 서툴렀고, 큐피 마요네즈는 일본의 국민 마요네즈라서 어디에서나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소스 아니 최고의 반찬이었다. 거기에 이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마요네즈 맛과 차원이 달랐다. 진한 고소함에 짭조름하면서 시큼한 그 맛.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음식 위에 뿌려 먹는 것은 기본이요. 밥 한 숟가락 반찬 한 젓가락 입에 넣을 때마다 뿌렸다. 음식의 맛을 돋우는 역할이 아닌 마요네즈 자체가 메인이 되어버렸다. 중독.   


마요네즈 중독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다. 마요네즈가 없으니 밖에서 먹는 밥이 맛없게 느껴졌다. 살은 물론이거니와 피부도 엉망이 되었다. 끊으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멈추려고 며칠 시도했다가 김에 마요네즈를 짜서 싸 먹는 괴식으로까지 발전했다. 허겁지겁 마요네즈 반통을 먹어 치우고 난 후의 절망감이란... 하. 나의 식습관은 그렇게 조금씩 망가져 갔다.


《웨하스 의자》의 주인공 ‘나’는 화가로 생계를 이어 나가며 낡은 아파트에 사는 서른여덟 살 여성이다. 6년째 만나는 ‘애인‘은 가정이 있는 남자다.  ‘나’의 일상은 단조롭다. 애인이 와서 만들어준 요리를 함께 먹고, 사랑을 나눈다. 애인이 없을 때는 그림을 그리고 ‘절망’과 시간을 보낸다. ‘나’는 절망을 떨쳐내려고 하지만 절망은 늘 ‘나‘의 곁에 붙어 있다.


나는 그 하얀 웨하스의 반듯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약하고 무르지만 반듯한 네모.
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
조그맣고 예쁜,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

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
눈앞에 있지만-그리고 당연히 의자지만-절대 앉을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애인을 향한 ‘나’의 마음은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은 웨하스 의자와 다를 바 없다. 아름답지만 앉을 수 없는 것, 이룰 수 없는 것. 절망. 나는 여기에 중독을 덧붙이고 싶다. 나의 마요네즈 중독에 가져다 붙이는 것이 억지스럽게 느껴질 순 있지만, 이게 아닌데라고 느끼면서도 만남을 멈출 수 없는 주인공의 심리는 그야말로 인간 중독 그 자체로 보인다.


‘불륜’에 관한 소설인 줄 알았다면 서평 책으로 정하지 않았겠지만, 모른 채 읽었고 저자의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과 조곤조곤 문체에 중독되어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러니 혹시 내 글을 읽고 이 책을 펼치게 된다면 도덕적 잣대를 잠시 옆에 치워 놓고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예술로서 오롯이 음미해 보길 바란다.  ‘불륜’이라는 글자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하고 결핍된 절망적인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을.


사랑에 빠진 사람은, 아무도 도울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친구에게 마요네즈를 선물로 받았을 즈음 나는 극심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착한 친구는 그런 나를 위로하는 의미로 마요네즈를 건네었을 것이다. 그게 술이 될 수도 있었고 감자가 될 수도 낫또가 될 수도 옷이 될 수도 아이돌이 될 수도 게임이 될 수도 신발이 될 수도 사람이 될 수도....... 될 수도 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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