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평생 딱 한 달 연애해본 남자가 이론으로만 아는 사랑의 성질
다들 즐거운 사랑하고 계신가요. 저는 저 자신과 함께 잘해나가고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신년이기도 하고, 글감도 마땅한 게 없어서 우리나라 가요 가사의 9할을 차지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사랑, 사랑 말로는 잘도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저는 스물하나 어린 나이에 한 달 아주 짧은 연애기간을 제외하고는 연애경험이 전무하답니다. 그렇게 쩍쩍 말라붙은 저라고 해도 사랑에 대해서 아주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왜냐하면 짝사랑은 여러 번 해봤기 때문입니다. 샤이니의 2009년 미니앨범, <Year Of Us> 수록곡 "내가 사랑했던 이름"의 가사에는 "이룰 수 없는 사랑도 사랑이니까"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도 카운팅 할 수 있으면, 저도 꽤 수준급의 경력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까지 성공경험만 스펙으로 쳐주는 사회일 건가요, 대한민국은? 사랑 정도는 실패 경험도 카운트하게 해 주세요. 도입부가 길었지만 어쨌든. 제가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특징에 대해서 열거해보겠습니다. 읽어보실 분은 읽어보시고 제가 간과한 특징들도 공유해주시면 나름대로 머릿속에 아카이 빙하겠습니다. 써먹을 요량은 없고요. (독실한 비혼 주의자 올림)
사랑의 성질 1. 자존감을 소모하게 된다
사랑이 경쟁이나 땅따먹기 같은 영역다툼까지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먼저 상대방에게 빠지는 사람이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은 늘 든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이 발생하는 시점이나 이유에 대해 알 새도 없기 때문에, 짝사랑이 먼저 시작되면 그만치 피로한 일이 없다. 이 호감이 실제로 상대방에 대한 애정인지에 대해서 자체적인 검증이 필요할 뿐 아니라, 검증을 마치더라도 그것을 전달할지 말지에 대해서도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일상의 집중도마저도 확연히 그 사람에게 빼앗겨버려서는, 인지적 노력을 들여 틈틈이 상대방을 생각하고, 상대방의 행동과 말투에 신경을 쓰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다시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의 행동을 다듬는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에 대해 전혀 알 리 없는 상대방이 그저 평소대로 반응해오면 어쩐지 감정적으로 속상해지고 자기 무력감에 빠지기 일쑤다. 기를 쓰고 시그널을 보내도 별 반응이 없으면 자신의 소통방식이나 애정표현방법을 피드백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실존과 존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게 되어버린다. '내가 그렇게 별론가...?'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이런 식의 자존감 깎기 패턴은 이미 예전부터 낮았던 자존감을 상대방을 핑계로 정당화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방은 이쪽이 별로라서 행동을 무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그널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평소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또, 실제로 이쪽이 상대방의 타입이 아니더라도 그 사실이 자기 자신을 깎아내릴 이유로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 사람이 뭔데 나를 별로라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짝사랑으로 전전긍긍하다가 그것을 포기하는 이유로 자신의 자존감을 파는 것은 그럴싸한 변명은 될 수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좀먹는 결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새로운 사람에게 눈이 헤까닥 돌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파먹으며 상대방에게 에너지를 발산하게 되어 있다. 상대방도 얼른 알아차리고 가타부타 에너지를 정돈해주는 데에 협력해주면 그건 베스트지만, 열에 아홉은 엇나가거나, 빗나가거나, 넘치거나, 모자란다.
사랑의 성질 2. 소유욕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이 사람을 왜 좋아하는 걸까, 내가 앞으로 이 사람과 뭘 하고 싶은 걸까'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다르는 결론은 '다른 열린 관계들과 다르게 이 사람과는 독자적으로 연결된 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가 아닐까 한다. 독자적으로 연결된 관계는, 그 사람이 수용하고 개방하는 정도가 다른 사람에 비해 자신에게 독점적으로 높기를 바라는 소유욕과 연결이 되어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너한테만 표현하니까, 너도 나한테만 그런 것들을 해야 해.'라는 심리인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사실 하나의 계약관계를 구축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감정과 일상의 시간 일부를 집중적으로 할애함에도 그것에 대한 보상심리를 상대방에게 투영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나도 이렇게 하니까 너도 이렇게 해야 해'라는 논리로 사랑을 하는 경우에 한해서) 이런 식의 계약관계적으로 감정 교류를 하지 않는 커플도 물론 많이 보았다. 하지만 위와 같은 식으로 관계하는 커플은 훨씬 더 많이 보았다.
이런 관계의 본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애인에게만 표현할 수 있는 감정, 표현, 행동들은 평소에는 억눌려있는 것이고, 그것이 애인에게 표현되었을 때 구현되는 자아성취감이 있는 것 같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다시 관찰하게 되면서 사람은 성장하고 또는 곤충이 변태 하듯 부끄러웠던 부분을 수정하면서 다음 버전의 자신이 된다. 자신과 상대, 그리고 두 사람이 구축하고 있는 관계, 세 가지 버전의 자아를 관리하고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개인은 자기 자신을 향해있던 내적 비전을 사방팔방으로 돌리는 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게 된다.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구속과 소유, 연결과 의존으로 점철되기만 하는 것 같아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그 관계를 평온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개인의 내면에서는 수많은 파도와 물살이 치고, 수많은 오리들이 평온한 듯 제자리에서 열심히 발을 구르고 있다. '서로를 부서지게 하면서도 껴안는' 그런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는 개인과 개인은 어제와 오늘이 확연히 다른 버전이다.
3. 그 사람에 대한 기존의 텍스트를 뒤덮어버리는, 범람하는 감정 그 무언가다
어떤 사람이 좋아질 때면 그 사람에 대해 이미 잘 정리된 문서에 진한 색 물감을 범벅시키듯 끼얹는 그림이 늘 떠오른다. 확정되어 있던 계산 값, 예측 가능한 대화 범주, 그 사람의 선호도와 취향, 인성적 결함과 장점...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 무시하는 거대한 감정이 그 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바깥으로 다 나타나서 상대방이 내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조차 너무나도 자존심 상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뻥 터졌을 때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힘든 것처럼, 호감도 너무 거대해지면 그것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게 된다. 이 사람을 보는 나, 이 사람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등 관계의 여러 가지 측면이 동시다발적으로 하나하나 섬세하게 진동하고 그 수많은 정보들이 뇌를 자극해오는 것을 스스로가 무엇부터 연산 처리해야 될지를 모르게 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인간은 미지의 존재에 대해서 늘 공포를 느껴왔고, '추함'으로 인지해왔으며 그것을 꾸준히 악마 화해 왔지만 익히 알던 존재가 사랑의 대상으로 언캐니 하게 변질되었을 때는 상대를 절대로 악마 화하지 않은 습성이 있는 것 같다. 당하고 또 당해도 언제나 새로운 상대에게 같은 감정적인 충격을 기꺼이 또 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첫 번째 crush의 충격만큼은 늘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인간의 삶에서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감정이 '추'에서 '미'로 인지되는 몇 안 되는 경험이 아닐까 한다.
마치며
이번 글은 적으면서 내가 이걸 왜 적고 있나 하는 생각이 유달리 많이 들었다. 하지만 최근 내가 느끼는 감정, 생각들을 말로 충분히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조금 무리하게나마 시작한 글을 끝까지 다 적어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범주가 너무 크기 때문에 이렇게 일반적인 글로 적기 특히나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자칫 너무 간질간질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또는 내가 인지하고 있는 그 감정에 대한 깊이가 남이 읽기에는 너무 얕거나 또는 너무 깊을 수도 있어서 딱히 공감 가능한 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어차피 내 생각을 적는 내 블로그니까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까지 일일이 고려해가며 글을 연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언젠가 제대로 진탕 사랑을 하게 되면 후속 글을 적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