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떠난 느린 시간들 (8화)
현지 시간으로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뒤엉킨 채로 천천히 양을 세어 나갔다. 백 마리가 넘어가도록 숫자를 헤아리다 보니 내가 깨어 있는 건지, 잠에 든 건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니 12시. 아마도 잠시나마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새벽 네 시에 또다시 눈이 떠졌다. 몸이 찌뿌둥하고 개운치 않았다.
아마도 삼촌과 이모네가 새벽 일찍 출발하신다기에 무의식적으로 걱정을 했던 것 같다. 카톡을 확인해 보니, 먼저 떠난 경연 삼촌은 무사히 호치민 공항에 도착한 듯했고, 영권 삼촌 내외분과 이모도 인천공항까지 무리 없이 도착하셨다고 했다. 안심이 되면서도 다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이미 깨어난 몸과 마음은 쉽게 잠들지 않았다.
뒤척이다 보니 옆에서 예준이가 눈을 떴다. 창밖을 보니 아직도 깜깜했다. 서울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이상하게도 하늘이 보고 싶어졌다. 새벽 공기를 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조용히 신발을 신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피곤함과 찌뿌둥한 몸이 새벽 공기와 별빛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 순간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 나 혼자만이 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경이로움을 나만 간직하기엔 아쉬웠다. 방으로 들어가 예준이에게 "밖에 별이 정말 예쁘다"라고 말해 주었다. 예준이는 따뜻한 이불이 좋았는지 마지못해 문 앞에 잠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예쁘네." 무미건조한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잠결에 본 별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살짝 번진 미소를 보니 괜스레 흐뭇했다.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와 리조트를 산책했다. 깊은숨을 내쉬자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마음이 평온해졌다. 이 순간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한국에 있을 때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삶보다, 천천히 흐르는 순간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일까? 아니면, 끊임없이 생각하며 바쁘게 살다가 잠시 멈추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런 평온을 느낄 수 있는 걸까?
정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답을 찾는 것조차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마시고, 고요한 새벽과 별빛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미로운 순간도 잠시,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내 몸은 이내 차가운 공기에 떨리기 시작했다. 더 걷고 싶었지만,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얼어붙은 몸을 녹였다. 아내와 부모님께 "일어났어요?"라는 문자를 남긴 후, 여섯 시 이십 분에 아침 식사를 하러 가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해가 뜨고 가족이 숙소 앞에 모였다.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여기저기 모기에 물린 것처럼 얼굴이 부어있었다. 예준이는 얼굴 한가운데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제 햇볕에 심하게 탄 모양이다. 가운데만 선명하게 타서 얼룩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었다. 나 역시 다리에는 수영복 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고, 목 부분은 선크림을 바르지 않아 따끔거렸다. 이제라도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당까지 가는 길은 조금 걸어야 했지만, 풍경이 아름다워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을 더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아이들도 길을 익혔는지 먼저 뛰어가며 즐거워했다.
아침 식당에는 벌써 나이 지긋한 한국인 관광객들이 자리를 잡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이분들도 아마 한국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신 듯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빵 종류가 더 다양하게 느껴졌다. 특히 도넛과 빨간 줄무늬가 있는 크루아상이 맛있었다. 어제 바나나와 빵을 몇 개 챙겼던 예준이는 오늘도 잊지 않고 "오늘도 챙기자!"라며 잔뜩 신이 났다. 부끄럽긴 했지만, 한두 개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어 "식사 다 하고 가져가자"라고 했다.
아침 메뉴는 여전히 풍성했지만, 나는 늘 먹던 방식대로 식사를 했다. 호밀 식빵을 바삭하게 구운 후, 그 위에 잼을 바르고 치즈와 햄, 베이컨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달걀프라이와 신선한 야채를 곁들여 한입씩 천천히 잘라먹었다. 요거트에는 용과, 수박, 패션프루트를 넣어 먹었는데, 예상보다 맛이 좋아 두 번이나 떠다 먹었다. 오늘은 바나나가 통째로 줄기째 올려져 있었는데, 혹시 장식이 아닐까 싶어 물어보니 먹어도 된다고 했다.
쓰어다 커피를 한 잔 진하게 마셨다. 이 맛을 본 엄마는 "커피 한 잔 마셔볼까?" 하셨다. 사실 맛만 보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아빠 것도 함께 타 드렸다. 아빠는 한 모금 마시더니 "괜찮네"라고 짧게 말씀하셨다. 아빠의 "괜찮다"는 말은 곧 "맛있다"는 뜻이다. 어제 미리 타드릴 걸 그랬나 싶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방으로 돌아가 서둘러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수영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한 시간가량은 우리끼리만 수영장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점점 다른 한국인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한국 사람들은 부지런하다. 무이네에 머무르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하루나 이틀 일정으로 짧게 머문다. 그래서인지 수영장에서도 한두 시간 정도 놀다가 서둘러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작년에는 2박만 머물면서 길게 머무는 가족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자연 속에서 좀 더 여유롭게 머물고자 5일간의 일정을 잡았다. 수영장에서 아이들과 공을 주고받으며 놀고, 둥둥 떠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피곤하면 누워 있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이 단순한 일상이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성과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에게도 각자의 방식대로 쉬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터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을 지켜보니 예온이는 선베드에 누워 먼 곳을 응시하며 멍하니 있었고, 예준이는 종이 접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이들도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여행의 가장 값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