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었던 날
가족과 떠난 느린 시간들(16화)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다. 구찌 터널 투어가 예약되어 있어 서둘러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잠긴 눈을 비비며 옷을 챙겨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리조트에서 누렸던 호화로운 조식 뷔페를 떠올리며 호텔 식당 문을 열었을 때, 순간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십 가지의 화려한 음식이 준비됐던 리조트와 달리, 몇 가지 간소한 메뉴가 놓인 테이블이 조금은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아침에 원래 간단한 음식만 먹는 편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익숙한 메뉴를 골라 맛있게 먹었다. 반면 아이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빵과 음료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나서, 환한 얼굴로 음식을 집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짐을 챙겨 체크아웃을 했다. 부모님이 계신 호텔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짧은 이동 후 부모님이 머물던 호텔에서 다시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긴 뒤 본격적으로 구찌 터널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여행을 외국 업체를 통해 예약했기에, 가이드가 호텔 앞으로 정확히 찾아올지 걱정됐다. 예약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함이 몰려왔다. 호텔 앞을 서성이며 기다리던 중, 한눈에 봐도 생기 넘치는 가이드가 다가와 "구찌 터널 투어 예약하셨죠?"라고 물었다. 그제야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고 차에 올랐다.
차 안에는 이미 필리핀에서 온 관광객 여섯 명이 타고 있었다. 우리 가족까지 총 열 명이었고, 가는 길에 여섯 명을 더 태운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탑승한 여섯 명은 필리핀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을 합쳐 총 여섯 시간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반면 구찌 터널에서는 단 두 시간만 머문다고 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가는데 겨우 두 시간이라니… 괜히 일정을 넣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이네에서 하루 더 쉬었다면 만족도가 더 높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선택한 일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출발과 동시에 가이드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영어로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나라도 열심히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집중했지만, 유창한 영어 실력이 아니다 보니 단어를 유추하며 듣는 것만으로도 점점 피곤해졌다.
가이드는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토바이가 많은 베트남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횟수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고 했다. 한 번 울리면 ‘주의하세요’, 두 번 울리면 ‘더 조심하세요’, 세 번 울리면 ‘나 정말 화났어요’라는 뜻이라고. 많은 정보를 전달해 주었지만, 모두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는 고엽제 피해 환자들이 만든 공예품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계란 껍질과 조개껍질을 이용해 섬세한 작품을 만드는 모습이 신기했다. 우리나라의 자개공예와도 닮아 있었다. 이곳의 목적은 관광객들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것이었지만, 강요하는 분위기는 아니어서 부담 없이 구경할 수 있었다. 만드는 과정을 사진으로 남기며, ‘학교에서 이런 수업을 하면 재미있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는 간단한 간식을 사 먹으라고 했지만,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온 우리는 괜찮다고 했다. 게다가 점심이 제공될 거라 착각하고 있었기에 배고플 걱정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돌아올 때까지, 오후 3시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될 줄이야.
마침내 구찌 터널에 도착했다. 베트남 학생들이 단체로 수학여행을 와 있었다. 작고 어려 보이는 학생들을 중학생쯤으로 생각했는데, 고등학생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과 체격 차이가 확연했다.
가이드는 우리를 인솔하며 터널 내부에서의 생활, 식사 방법, 더위 속에서의 생존 전략 등을 설명했다. 몇 가지 단어를 유추하며 들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터널 체험도 직접 해보았다. 10년 전에도 이곳을 방문했었지만, 그때의 기억이 희미했다. 사진을 찍어둔 것만이 유일한 단서였다. 역시 사람의 기억은 흐릿해지지만, 사진을 보면 과거를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터널을 오가며 체험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지루해졌다. 더운 날씨 속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괜히 여기까지 온 것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들른 매점에서는 퍽퍽한 고구마 같은 음식이 제공되었다. 전쟁 당시 먹었던 음식이었겠지만, 너무 퍽퍽해서 음료 없이는 삼키기 어려웠다. 혹시 음료수를 팔기 위한 작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아니더라도, 무더운 날씨 탓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드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주었지만, 감기에 걸려 있어 사양했다. 아이스크림 하나가 남자 환불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가이드는 흔쾌히 환불을 도와주었다. 관광지에서 환불이 쉽지 않을 텐데,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이제 다시 호치민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출발하면 호치민 시내의 교통 체증은 불 보듯 뻔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시쯤 도착해 점심을 먹고 관광지를 둘러볼 예정이었지만, 결국 3시에 도착했다. 급하게 휴대폰을 뒤져 식당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가이드가 현지 맛집을 추천해 주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식당으로 직행했다.
푸드코트 형식의 식당이라 각자 원하는 음식을 고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부담이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메뉴를 선택하고, 계산하고, 음식을 가져오는 동안 쉴 틈이 없었다. 더운 날씨 속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막상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할 여유도 없었다.
긴 하루였다. 여행의 묘미는 예상치 못한 변수 속에서도 새로운 경험을 얻는 데 있는 것 같다. 피곤하고 후회스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모든 것이 또 하나의 추억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