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4일 개봉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현재까지 300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국제 영화제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영화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Donald E. Westlake)의 원작 소설 'The Ax'(1997)을 블랙 코미디와 범죄 스릴러로 재탄생시킨 작품으로, 경제적 몰락이 가족의 해체를 낳고 이것은 인간성 붕괴라는 연쇄 과정을 비추면서 단순한 사회 비판을 넘어 인간다움 자체가 위협받는 현실을 보여준다. 원작소설은 AI 시대 이전에 출간 되었기에 2025년 버전의 이 영화는 AI 자동화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 붕괴라는 시대적 맥락을 덧붙이며 집단적·사회적 메시지가 더욱 강조되어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 한 장면 [사진='어쩔수가없다' 티저 캡처]
무엇보다도 이병헌의 '어쩔 수 없는' 연기력이 더욱 돋보이는 영화였다. 등장인물의 외모나 의상 연출 역시 캐릭터와 상황에 맞게 설정이 잘 되어 있다.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의 외모에서 콧수염이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만수의 콧수염은 하나의 장치로 사용되었다. 웃음과 위협 사이를 왕복하면서 만수의 무너짐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신호등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남자의 수염은 국내보다는 해외 문화에서 더 일반적이며 스타일과 연출도 다양하다. 콧수염(mustache), 구레나루(sideburns), 입가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수염(goatee),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5시 퇴근 시 조금 자란 수염(five o'clock shadow)까지 근무 시간과 관련된 명칭도 다양하다.
만수의 콧수염은 입과 턱(='씹는 장치')을 가리키던 고대 그리스어 mýstax (윗입술·콧수염) 뿌리가 윗입술의 털(mustache)로 뜻이 좁혀져 굳어진 단어이다.
'어쩔수가없다' 이병헌 손예진 [사진=CJ ENM]
만수의 양복, 미리(손예진 분)의 평범한 중년 여성의 의상, 아라(염혜란 분)의 목 스카프와 원색 강력한 의상, 고시조(차승원 분)의 모범생같은 안경과 누빔 조끼 등이 극중 캐릭터에 맞게 연출 되었다.
눈길을 끄는 건 불연 듯 등장한 무도회 장면이였다. 무도회의 코스튬은 '가면'을 의미한다. 갈색 프린지 드레스(fringe dress)와 꽃 장식의 '포카혼타스'풍 인디언 의상이 미리의 코스튬인 반면, 만수는 양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양각 모자(bicorne hat)를 쓰고 나폴레옹 시대의 장교 복장을 하고 나온다. 이 장면의 의상은 부부 갈등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기 직전의 고조 구간으로 묘사된다. fringe는 '실가닥' 장식에서 시작해 라틴어 fimbriae가 옷자락 가장자리로 사용된 단어이다. 예전에는 '앞머리'를 의미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bangs'가 '앞머리'를 뜻한다.
'어쩔수가없다' 2차 포스터 [사진=CJ ENM]
"AI가 승진하고, 나는 사람다움을 잃어버린다. 웃음이 터진 뒤 거울을 보면 범인은 시스템이고 공범은 나. 오늘의 살인은 칼이 아니라 KPI가 집행한다. 해고 메일은 짧고 변명은 길다." 블랙 코미디가 끝날 때쯤 웃음보다 큰 한숨이 엔딩 크레딧을 밀어내는 이유는, 영화 속 가상 현실이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을 극장을 나오면서 느끼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정하는 드레스 코드, 나를 가리는 가면과 시스템이 주는 유니폼이야 말로 어쩔 수 없는 패션이다. 그래도 마지막 단추는 어쩔 수가 없이 내가 직접 잠근다. 사람다움의 옷깃으로.
◇ 조수진 소장은 베스트셀러 '패션 X English'의 저자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영어교육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특히 패션과 영어를 접목한 새로운 시도로 영어 교육계에 적지 않은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UPENN) 교육학 석사와 스톡홀름 경제대학교(SSE) MBA 출신으로 (주)일미푸드의 대표이사와 '조수진영어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