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판다 Nov 11. 2021

너무 달면 질리더라

고구마 지옥에 빠져버렸다

겨울은 뜨끈한 고구마의 계절이다. 그래서 찬바람이 불기 무섭게 고구마 5kg을 샀다. 이틀 후에는 이웃집으로부터 그만큼의 고구마를 선물 받았다. 그리고 또 며칠이 지나 남편이 거래처 사장님에게 받았다며 호박고구마를 20kg나 들고 왔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어딘가에서 꿀고구마 10kg짜리 박스가 도착했다.

그렇게 며칠 새에 작은 다용도실이 빨갛고 노랗고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고구마 창고가 되었다. 옆집에도 나눠주고 부모님 댁에도 갖다 드렸는데도 여전히 양이 어마어마했다.


작년 겨울에 이웃집에 식사초대를 받아 갔다가 에어프라이어에 구운 고구마에 반해 밥보다 고구마를 더 많이 먹고 와서는 한동안 에어프라이어를 까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평소 냉동식품도 잘 먹지 않고 고작 겨울 한철을 위해 물건을 사는 건 낭비인 것 같아 단념했었는데 고구마가 이 정도로 많다면 사도 되지 않을까 하는 물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중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자기네 집에 있는 직화냄비 이야기를 꺼냈다. 아하! 그걸 사면되겠다! 결제 왼료.


직화냄비에 구운 고구마는 기대 이상이었다. 고구마 때문에 별 걸 다 산다는 반응이었던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보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고구마를 굽는 날은 하루 종일 집안 공기마저 달큼했다. 신이 나서 매일매일 고구마를 구웠다.


그날도 저녁을 먹은 후 간식으로 먹을 생각에 깨끗하게 씻은 고구마를 냄비에 올려놓았고 잠시 후 고구마의 단내가 솔솔 풍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그 단내에 머리가 찡해지더니 거북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 꿀고구마를 구워서였을까 구워진 고구마는 지난번보다 단맛이 훨씬 진한 것 같았고 진짜로 꿀 같은 샛노란색 진액이 까맣게 탄 껍질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몇 시간을 창문을 열어놓았지만 집안에 밴 단향이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아 그날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입으로 숨을 쉬다 잠이 들었다.


구워내기 무섭게 입으로 직행하던 군고구마는 이번엔 사흘이 자나서야 간신히 식탁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더는 고구마를 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물을 끓여 그 뜨거운 김에 쪄낸 담백한 고구마 생각이 났다. 그래서 선반 구석 깊숙이 넣어버렸던 큰 냄비를 다시 꺼내 큼지막한 밤고구마 네 개를 쪘다. 이번에는 부드럽고 은근한 고구마 향이 퍼졌다. 40분을 찌고 10분 동안 식힌 뒤에 한 입 베어 물고 나니 "그래 이 맛이지."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사랑한 고구마는 바로 이 맛이었다. 자극적이지 않고 적당히 달달한 맛. 시어머니가 주신 갓 담은 김장 겉절이를 찐 고구마 위에 얹어 크게 한입에 넣으니 세상 진미가 따로 없다.


어릴 때 주위를 보면 서로가 없으면 죽고 못 살 것처럼 세상 달달한 커플들이 꼭 얼마 못가 헤어지곤 했다. 반대로 요란하게 티 내지 않고 무던하게 사귀던 커플들이 5년, 7년 장수 커플이 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사랑도 고구마도 너무 달면 빨리 질리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고구마를 찐다. 질리지 않고 오래오래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직화냄비도  군고구마도 당분간은 안녕이다.

작가의 이전글 소원을 말해보라는데 왜 벙어리가 되었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