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판다 Dec 02. 2021

아차, 결혼기념일!

어제는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정말이지 아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별일 없으면 근무를 바꿔줄 수 있냐는 직장 동료의 부탁에 아무 일도 없다며 흔쾌히 오케이를 하고 연장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친구들과  연말 모임 날짜를 의논하는데 친구 B가 다음 주는 결혼기념일이라 곤란하다고 했다.

아, 결혼기념일이면 안되지. 어? 잠깐...결혼기념일??


뭐야;; 오늘 내 결혼기념일이잖아?


당황은 잠시. 설마 남편도 잊어버린 건가? 남편은  전에 직장 동료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는 톡을 보낸 터였다. 재빨리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자기도 몰랐으면서 낮에 거래처 직원에게 선물 받았던 롤케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게 웃기고 조금은 얄미워서 나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남편에게 슬쩍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내가 계속 물고 늘어지자 남편은 이모티콘으로 애교를 부리더니 대화를 종결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렸던 배우자 때문에 서운했던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진짜 무심하다.' 했는데 내가 겪어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구나 싶다. 십 년쯤 살면 이렇게 무뎌지는 건가 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일 년에 기념일 이래 봤자 서로의 생일과 결혼기념일, 꼴랑 세 번뿐인데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그렇다고 치자. 나는 원래 건망증이 심하고 기념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으니까. 이런 걸 두고 내로남불이라고 하던가. 하지만 남편은 별의별 시답지 않은 기념일도 다 챙기는 사람인데, 알람도 다 맞춰두는 걸로 아는데 무려 결혼기념일을 깜빡하다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9시가 다 되어 퇴근을 하고 집에 가는 길에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내가 좋아하는 딸기를 한 팩 샀다. 선물로 남편에게 주고 내가 먹어야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이 손을 내밀며 장난스레 물었다.


"내 선물은?"


딸기를 사길 아주 잘했군. 의기양양하게 "준비했지!" 하며 가방에서 딸기를 꺼내 주자 순간 동그랗게 커졌던  남편의 눈이 옆으로 길어졌다.


"뭐야. 너가 좋아하는 거잖아."


 쏘아대는 남편에게 그러는 오빠는 뭘 준비했냐, 결혼기념일도 까먹고 있었으면서 아주 웃긴다 했더니 우리 남편, 거만하게 웃으며 안방에 가보란다. 안방 불을 켜자 화장대 위에 놓이 꽃다발이 보였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그 순간 '이게 다야?' 하는 생각을 했다. 남편, 미안합니다.

꽃다발을 들고 거실로 나오는 나에게, 남편은 설마 자기가 진짜 잊어버린 줄 알았냐고, 자기는 알람을 맞춰놓기 때문에 절대 잊지 않는다며 잘난 척을 했다. 그럼 아까 전에 그 카톡은 뭔데. 암만 생각해도 급하게 준비한 것 같은 의심을 떨칠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나한테는 지금 누굴 손가락질할 자격이  없으니까. 그래 봤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이지 뭐.

대신에 요새 꽃 사는데 재미 붙였네 했더니 이 꽃이 뭔지 아냐며 꽃말까지 읊어 주셨다.

델피늉. 꽃말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

조용히 딸기를 씻어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예쁜 접시에 올린 후 롤케잌 포장을 뜯고 아침에 구워둔 군고구마까지 거실 테이블에 세팅했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어느새 화병을 대신해  물병에 꽃을 꽂아 두었다. 푸른빛이 예쁜 꽃다발도 테이블에 올려 두고 남편을 불렀다.


"얼른 축하합시다~"


쇼파에 누워 TV를 보다 테이블 앞으로 온 남편은 군고구마는 왜 가져 왔냐고 묻더니 다시 TV에정신이 팔렸다. TV에서는 요즘 남편의 최애 프로그램 '골때리는 그녀'의 그녀들이 열심히 운동장을 누비는 중이었다.

편은 TV를 보고 나는 딸기를 먹으면서 우리는 결혼 9주년의 밤을 보냈다.


로맨틱하지도 않고 근사하지도 않은 결혼기념일.

하지만 나는 역시 이렇게 요란하지 않고 더없이 평범한 기념일이 좋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잔한 기념일이 딱 내 스타일이다. 이런 결혼 생활이라서, 이런 남편이라서 너무 좋다. 내년 결혼기념일에도 별 거 없이 뜨끈한 전기장판 위에서 금슬 좋은 노부부처럼 남편과 귤이나 까먹고 싶다.


대신에 내년 10주년 결혼기념일은 절대 까먹지 않기로 약속~ 

작가의 이전글 돈 많이 안벌어와도 괜찮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