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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아, 진정해!

by 해산

앞쪽 십 여장만 채운 중학생 때 일기장을 발견했다. 새것이나 다름없는 작은 노트. 삼십여 년 공백 뒤에 쉼표를 찍은 후 다시 채워나가기로 했다. 앞부분 내용을 뒤적이다 보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기분이 들었다. 샤프로 꾹꾹 눌러쓴 반듯한 10대의 글씨체와 볼펜으로 휘휘 갈겨쓴 아줌마 글씨체, 한 면을 빼곡하게 메운 내용과 듬성듬성 떠오르는 데로 적힌 내용.

십 대의 내가 정성껏 적어낸 생각을 보며 현재의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한다. 숨이 막힌다. 사회와 종교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기준에 어떻게든 맞추려 하지만 자기 기질을 알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는 상태로 매번 좌절하고 거듭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할 시기에 타인의 잣대로 만들어 낸 완벽한 자아상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모습이다. 그렇게 사고하게 된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늘 좌절감에 시달리며 살수 밖에 없었을 어린 내가 안쓰러웠다. 얘, 이러면 자존감이 높아질 수가 없잖아!


노는 건 시간 낭비라고, 벅찬 하루 계획을 세우고 자신에게 강요하지만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고 그런 결과에 자책하기를 반복하는 나(너는 ‘J’가 아니라고)…. 노는 게 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적어봤으면 어땠을까? 내가 세운 계획들에 대해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내 느낌과 생각을 존중하는 일기를 썼으면 좋았을걸.

한 장 한 장, 종이를 타고 시간 여행하는 기분으로 질문을 던져 본다. 지금 30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하루 계획을 어떻게 세울까? 속셈 공부, 피아노 연습, 숙제, 말씀과 삶 하기… 남이 정해준 과업 말고 내 기준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하루를 채우면 좋을까?

‘오늘 하루 뭐 하면 재미있을까, 너 이런 생각으로 계획 세워봤어?’

돌이켜보니 30여 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도리도리’다. 그러고 보니 난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나만의 ‘이상’ 씨가 만든 ‘To do list’는 여전히 교묘하게 작동 중이다.


지난 몇 년간 책상 앞은 나만의 피난처이자, ‘이상’ 씨의 욕구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과업의 장소였다. 내 계획대로 이룰 수 있는 일은 공부밖에 없었다. 30년 전엔 그리도 어렵던 공부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던 건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쉽다는 말이 진리임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버대학에서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며 너무 무리했는지 졸업할 즈음엔 앉는 자세가 힘들어졌다. 병원에선 아직 디스크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졸업하고 앉아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도수 치료를 받고 많이 걸으니 자연히 몸이 좋아졌다. 그럼, 그래야지, 아직 젊은데.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새로 시작한 일이 익숙해지자 슬슬 욕심이 생겼다. 언어치료는 아이들을 위한 공부였지만 원래 내 꿈은 아니었다.

‘상담 일을 병행하면 어때? 오랜만에 시작하는 거니 연구소 인턴 과정에 지원해서 실전 복습 조금 하면 괜찮을 거야. 그리고 브런치 작가, 그것도 괜찮지? 주에 2번 정도 찬이 맡기고 하면 가능할 거야.’

다시 앉아 있는 시간이 확 늘어났다. 허리 통증이 찾아왔다. 괜찮았던 무릎 연골판 부상 부위의 통증도 재발해 움직임이 불편했다. 집에서 운동한다고 무릎에 무리가 가는 줄 모르고 홈트 영상을 따라 하다가 운동선수도 아니면서 연골판이 찢어졌었다. 하는 일이 늘어나고 찬을 늦게 데려오는 날도 있으니, 찬과 공부하는 일에도 소홀하게 되었다. 작년 겨울 무렵에는 다 그만두고 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연말까지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글쓰기 하나 남겨두고 잠시 내려놓았다.


이제 하나 남긴 글쓰기마저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상태다. 의자에 앉아 긴장한 채로 어떤 작업을 하는 자체가 너무 힘든 상황. 모션 데스크를 중고로 사서 서서 해보지만 서 있는 시간을 길게 가져가기도 어렵고, 장소가 바뀌니 글도 잘 안 써진다. 익숙하고 편안했던 책상 앞은 이제 공포의 자리가 되었다.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이상,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이상, 두 이상 사이에서 ‘울컥이’가 탄생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상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지 못하는 서러움에 울컥거리곤 하는 울컥이.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다. 울컥이를 달래는 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 아이들 안정될 때까지 1년만 더, 1년만 더 하면서 10년 넘게 기다려온 아이라 무언가 본격적으로 해보려 할 때 몸이 제동을 걸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치료하고 운동하면 예전 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무리하면 곧 안 좋아지고 무리라고 생각되는 기준도 더 낮아지는 느낌이다. 다시… 좋아질 수 있을까? 좋아져야만 하는데.

당분간 ‘오늘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까?’만 생각하기로 한다. 울컥이는 목표와 기준이 너무 높은 이상들 사이에서 눌리고 있으니, 지금의 건강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정도의 목표와 기준을 정해 보기로 한다. 휴학은 안 해도 될까? 건 일단 8월까지 지켜보기로 하고.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고민해 보기로 한다.


소위 작가님 책을 짐볼 위에 앉아서 몇 주째 읽고 있다. 짐볼은 의자보다 허리에 주는 부담이 훨씬 적다. 그래도 장시간 앉아 있지는 못하고, 짐볼 위에서 글쓰기까지 집중하기는 어렵다.

글쓰기는 완전한 몰입이 필요하다. 30분 쓰고 쉬고, 그래서는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

곧 소위 작가님 서평을 쓸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다른 책들도 읽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이웃 작가님들 글도 자주 읽지를 못해 안타깝다.

그동안 내 몸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냥 생각에 따라 움직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몸을 알아가고 있다. 알아달라고 하도 보채니 몸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시간도 소중하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울컥이의 감정이 워낙 지배적이라 그것에 감사를 표현할 만큼의 여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브런치 시작한 이후 쓰는 데 가장 오래 걸려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발행하게 되었다. 퇴고는 2번만 하기로 한다. 보통 10번은 다시 보고 발행 이후에도 수정할 때가 많았지만.

남의 편님은 그냥 앉지 말고 눕거나 걸으라고 한다. 무슨 재미로 사냐니까 애들 보면 재밌으니까 애들 보라고…. 역시 실망하게 하지 않는 ‘T’스러운 조언이다. 잘하고 있는 일도 많으니 그러려니 해야지.



브런치스토리 팀에게 전하고 싶은 말

[글 발행 안내]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답니다. 오늘 떠오른 문장을 기록하고 한 편의 글로 완성해 보세요.


글 발행을 얼마간 쉴 때 이런 독려 글을 보내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면, 꾸준히 글 발행을 하는 작가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시스템도 갖추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꾸준히 글을 발행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격려도 없다가 잔소리만 하는 태도, 있기,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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