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의 많은 장르들 중에서 발라드는 참 달달하고 듣기 편합니다. 일반적으로 빠르지 않은 템포에 사랑을 위시한 서정적인 주제를 담아 부르는 발라드는 그 특성상 보컬의 역량이 중요한 장르입니다. 오죽하면 한국에는 '발라드의 계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계보의 서두에 이문세, 변진섭, 신승훈 등의 이름을 거론할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 수많은 앨범을 내고 지금까지 활동하는 저 가수들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커리어를 가졌지만, 그 커리어만으로도 한국 발라드 음악을 정립했다 평가받는 이가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음반 <사랑하기 때문에>의 주인공 유재하입니다.사실 유재하의 보컬은 보통 발라드 가수의 음색이나 스타일과 비교하면 다소 튀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Ozzy Osbourne처럼 기본이 없는 건 아닙니다. 사실 둘 다 각자의 장르에 최적화된 보컬이라 평가받습니다 ㅎㅎ)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하가 오늘날까지 기억되게 한 본작 <사랑하기 때문에>를 찬찬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가슴으로 느껴보세요 난 얼마만큼 그대 안에 있는지
처음 들을 땐 다들 다르겠지만 계속 들을수록 유재하의 노래들은 굉장히 귀에 남아 울립니다. 앨범의 모든 곡을 자신이 작사, 작곡, 편곡했기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분위기의 곡들이 수록되었음에도 각각의 곡에서 보컬이 좋은 하모니를 이루며 곡의 분위기를 살립니다. 일례로 '사랑하기 때문에'는 원래 유재하가 위대한 탄생의 키보디스트로 있을 때 조용필의 7집 앨범에 먼저 수록되었는데, 기본 편곡부터 보컬 스타일까지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한편 곡의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조용필의 버전과 유재하의 버전 중 어느 것이 더 잘 맞는지 느껴집니다. 원래 여러 악기를 금방 배우고 잘 다뤘던 유재하였기에 아마도 목소리 역시 악기처럼 생각하면서 작업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음대 작곡과 출신답게 클래식을 기반으로 한 서정적인 곡들은 이 음반을 발라드의 교과서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온전히 클래식 음악의 악기들로만 구성된 '사랑하기 때문에'는 앨범의 백미로, 가히 한국 역사상 최고의 발라드곡으로 꼽히며 유재하 사후 수많은 뮤지션들이 커버한 바 있습니다. 그 외에도 클래식 사운드를 기반으로 밴드 음악의 악기가 첨가된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나 '그대 내 품에' 등의 곡들 역시 감정을 한껏 자극하는 달달한 발라드의 전형으로 꼽힐 수 있는 곡입니다. 그리고 앨범의 중간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Minuet'은 음대 작곡과 출신의 위상을 보여주는 곡입니다. 보통 전체 곡의 작사/작곡/편곡을 혼자 해내는 것만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닌데, 유재하는 거기에 앨범 전체 프로듀싱, 전체 보컬 작업('지난날'에는 유일하게 후렴에서 이문세가 코러스 작업을 함께 해 주었습니다), 피아노/신시사이저/기타 등 일부 세션 직접 연주, 그리고 전체 곡들에 대한 오케스트레이션까지 직접 해냈습니다. 그때가 만 25세. 더 말이 필요할까요?
#3.나 오직 그대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곡들이 묶여 있지만, 또한 본작의 수록곡들은 모두 한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아울러 가지고 있습니다. 유재하의 연가의 주인공인 사람은 초등학교 때 동창이었으며, 이후 대학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고, 본작에서 플루트를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곡을 쓰고 부른 만큼 유재하의 감성이 오롯이 곡에 반영이 되어 있는데, 그 곡들의 대상인 여인이 함께 작업을 하면서 비중이 큰 악기인 플루트를 담당했다는 사실은 참 놀랍고도 신기합니다. 그 여인의 기분이나 생각은 어땠을지도 궁금해집니다.
#4.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음악적 소양에 있어서 먼치킨임을 이미 위에서 충분히 이야기했지만, 사실 필자 개인적으로는 가사가 정말 놀라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의 경우 "햇님이 방실 달님이 빙긋," "새들이 소곤 꽃들이 수군" 등 동화 같은 귀엽고 아기자기한 말들을 노랫말에 넣었고, '그대 내 품에'의 1절은 구절마다 시각화되어 예쁘게 그려집니다. 사색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은 유재하 스스로 가장 좋아했던 곡으로, 사랑의 순환에서 이별 후 마음을 추스르고 담담해지는 과정을 묘사한 듯한 노랫말이 잔잔한 여운을 줍니다.필자가 앨범을 디렉팅 했다면 가장 마지막 트랙으로 이 곡을 배치했을 것입니다. 앨범의 시작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열었으니, 매조지는 데는 이 곡이 가장 적확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쭉 감상하다 보면 이미 헤어짐의 상황을 겪은 후 힘든 시기를 지나 재회하여 다시 사랑을 이어가는 흐름의 서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Minuet'을 구분선으로 보았을 때 후반부 곡들은 이별의 상황에 초점을 맞춘 곡들이 많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중요 소재로 쓰인 '우울한 편지'는 본작에서 유일하게 무거움이 한껏 느껴지는 곡으로, 이 곡에서는 플루트 소리마저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데 비해 가사만 보았을 때는 다소 무거움이 덜하고 담담하게 느껴집니다. 이 리뷰를 위해 앨범을 다시 감상하면서 바로 전 트랙인 '지난날'과 이 곡의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고, 비록 머릿속으로만 그린 것이지만 바뀐 분위기도 잘 들어맞는 것 같았습니다. 담담한 노랫말은 유재하의 목소리만큼이나 어떤 감정이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음악에 못지않게 노랫말에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죠.
#5. Summary
고전 음악계가 대중음악을 낮잡아 보며 고고하게 목을 세우던 때 대중음악과 고전음악을 멋지게 조합한 걸작 크로스오버입니다. 'Classic'이란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고전' 외에도 '전형,' '일류' 등의 뜻이 있는데, 본작은 'Classic'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아직 겨울이 가기 전에 이 앨범을 감상하며 마음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뜻함을 느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6. Recommendation
전곡 모두 추천합니다. 연주곡을 포함한 9곡 모두가 훌륭합니다.학부생 시절 교수로부터 모차르트를 베껴오면 어떡하냐는 말을 들을 만큼 천재적인 실력을 가진 그였기에, 짧지만 그의 능력이 잘 발휘된 'Minuet'까지 놓치지 않고 듣는 것이 본작 감상의 포인트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