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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로움 Apr 01. 2021

유전자 검사를 하다

나는 해결책을 받을 수는 없었다.

나와 남편은 생명공학을 전공했고 나는 제약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생물, 유전자에 대한 이해가 있어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질환과 치료 사례에 대한 논문을 수없이 찾아서 읽어보았다. 그리고 많은 질문을 리스트로 만들었다.


서울대병원 소아 유전학과를 가는 김에 소아 피부과와 어린이 치과병원에 함께 예약을 하고 다녀왔다. 그런데 나는 곳이 사례가 많고 이 질환에 충분한 경험과 지식이 있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이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병원을 다녀온 소감은 실망이었다. 질문지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아직 정확히 진단명이 나오지 않은 상태라서 그런지, 생명에 위협을 주거나 중증의 질환이 아니라서 그런 건지, 혹은 아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겠으나 적극적으로 치료해보자고 하는 의사도 없었고 현재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지켜보자는 말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나 또한 같은 질환을 가진 다른 아이의 부모가 물어보면 그렇게 답을 하곤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빨리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고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분명하게 그려달라고 하는 심정이었다.


특히 피부과에서는 의사가 너무나도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찾아본 논문을 들이밀면서 사용 가능성이 있는지 문의하자 한번 시도해보자고 약물을 처방해 주었다. 어린 아기한테 약물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한지 아닌지는 그에게 중요한 것 같지 않았고, 그저 부모가 원하니 한번 해보라는 식이었다. 나는 너무 간절한데 우리 아이한테 너무 무심한 것 같은 이 의사의 태도가 나를 슬프게 했다. 이후에도 두세 차례 진료를 본 후 정기검진을 하러 갔는데 타 병원 수련의라고 추측되는 의사 몇 명이 진료에 참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교수라는 의사가 나에게 이전과는 다르게 미소를 띠며 굉장히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갑자기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왜 달라졌냐고 비웃고 싶었으나 밖으로 내뱉을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유전학과에서는 피검사를 통해 유전자 검사를 실시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모든 유전자에 대한 검사를 한 병원에서 할 수가 없기에 대형병원에서 나누어 검사를 한다고 했다. 이 질환은 삼성서울병원에서 검사한다며 채혈한 튜브를 삼성서울병원으로 보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가까운 삼성으로 갈 걸 그랬나... 이후 삼성서울병원에 다른 진료를 보러 갔을 때 그 유전자 검사 결과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한 달이나 걸린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한 달 후 확진 결과가 나왔다. 결과가 그러하리라 라고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라 그런지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머릿속 한편에서 '아니야, 아닐 수도 있어, 혹시 다른 질환인가?'라며 꿈틀거리던 말들이 한 번에 정리가 되고 사라졌다. 아이의 유전자 변이는 이전에는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변이로 판단된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그럼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이제는 내 차례였다. 이 희귀 유전질환은 X 염색체 상에 있는 모계 유전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닌 아이 유전자 문제일 수도 있다. 이제는 원인, 유전 가계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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