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주 Mar 27. 2024

원하는 건 맑은 공기와 여유

 이번 주말엔 오랜만에 남편의 주말 업무도 없고, 가족 행사도 없고, 날씨는 따스한데 심지어 미세먼지도 없었다. 드디어 봄기운이 느껴진다. 며칠전만 해도 분명 천변이 휑했는데 토요일인 어제부터 노란 개나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 보니 벚나무 몇 그루도 이른 꽃을 피어올렸다. 봄이 왜 아직도 안 오나 싶었는데 갑작스레 들이닥쳤다.

 어제는 남편과 아이가 늦잠을 자는 동안 나는 아침 목욕을 다녀온 뒤 다같이 느리게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엔 아이의 축구수업에 따라 갔다가 교외로 나가 밥을 먹은 뒤 트램펄린장에 들렸고, 저녁에는 홍제천으로 나가서 같이 운동하고 산책하며 1시간 남짓 여유롭게 몸을 움직이다 집에 돌아왔다. 이래저래 몸을 잔뜩 움직인 하루라 아이는 쇼파에 쉬는 것 같더니 기절하듯이 잠이 들었다. 밤이라 조금 서늘해졌지만 춥지는 않은 날씨, 아이랑 줄넘기를 하며 웃고 떠들다 과자를 사들고 셋이 함께 집에 오면서 '아 오늘 참 좋다. 더할 나위 없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한 것도 없고 큰 돈이 든 활동도 없고 대단한 걸 먹은 것도 없다. 그냥 일상으로서의 주말을 보냈는데 그게 참 내가 원하는 생활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평범하게 행복한 하루에 필요했던 건 시간적 여유, 그리고 맑은 공기였다. 우리 가족 세 명이 함께 있는 몇 시간이 확보되고 공기가 맑아서 밖에서 실컷 놀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단한 조건은 아니다.하지만 그걸 원하는 대로 누리기 어렵다. 남편은 늘 바쁘고, 날이 따뜻한 봄날엔 미세먼지가 안 좋기 십상이다. 둘 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인데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크다. 

 대단한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 가족 셋이 평일에 저녁식사-밥 안 먹고 야근하다 집에 밤 10시에 들어와서 먹는 저녁식사 말고 정상적인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남편이 주말 오전을 쌓인 피로와 모자란 잠을 해소하는 데에 들이붓지 않아도 된다면 충분하다. 


 미세먼지는 단기적으로 사회와 국가의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재난이지만, '저녁이 있는 삶' 정도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던가? 나는 야근을 거의 하지 않지만 남편은 정시 퇴근을 거의 하지 않는다. 내 동생들도 야근이 잦았다(그래서 둘 다 이직했다). 국민소득 3만 달러 된지도 한창이고 주5일제가 된지도 20년이 훌쩍 넘었건만 평일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에도 시시때때로 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 너무 많다. 나는 종종 남편에게  '때려쳐, 이직해! 재택근무하는 회사로 이직해버려!' 라고 외친다. 때로는 '이 고생을 했는데 그래도 임원 한 번 달아보고 퇴직해야지. 여보 먼저 퇴사하면 내가 지방이나 해외근무할게, 일단 지금은 달리고 그때 되면 새로운 땅에서 살아보자.'라고 할 때도 있다.

 박봉에 야근에 신경긁는 상사까지 삼중고를 겪던 동생은 훌쩍 유럽으로 날아가 MBA를 하고 귀국하지 않은채 반년쯤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결국 그 나라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물론 업무 또는 빌런 스트레스는 어디나 있지만, 법정근로시간 주당 35시간에 최저연차휴가가 25일인 나라에서는 어디서 일해도 시간적 의미에서의 워라밸은 보장될 것이다. 이 차이는 1인당 GDP에서 오는 걸까?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지만 일정 소득수준을 넘어서면 근로자의 업무환경은 경제보다는 문화, 사회, 정치적 맥락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원하는 업무환경을 갖춘 나라에서 일하려는 도전이 좀더 장려되어야 한다. 결혼하고 애를 낳은 뒤에는 쉽지 않은 일인 만큼 내 아이에게는 어려서부터 이 넓은 세상을 조망하며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내 동생 뿐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취직한 친척이나, 나와 같은 회사에 다니면서 전문성을 쌓아서 유럽의 국제기구로 이직한 친구 등등을 보면 언어가 네이티브 수준이거나 특별한 자격증이 있지 않아도 의지가 확고하면 길이 있더라. 하지만 나이 들수록, 그리고 가정을 꾸린 이후라면 특히나 다른 길로 꺾을 때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점점 현재 삶의 여건에 머무르게 된다. 물론 한국에서 사는 장점도 상당하기 때문에 꼭 외국에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행복을 느끼기 좋은 여건에 대해 젊을 때부터 고민하면 아무래도 여러 길이 눈에 보일 것이다.

 나는 공기맑고 강이나 바다를 끼고 있는 소도시에서 하루 6시간 정도 일하면서 살면 행복할 인간인데 그런 삶은 은퇴한 뒤에나 가능할 것 같아서 참 아쉽다. 이미 가진 것들과 거기서 뻗어나갈 미래를 포기하기엔 아쉽고, 그렇다고 지금 가진 것들이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그런 상황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복직해서 좋은 점을 찾아보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