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영국으로 가기 전
“합격입니다.”
입학 인터뷰 담당자가 나에게 말했다. 1년 반 동안 홀로 유학 준비를 하면서 느꼈던 고독함과 외로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꿈에 한걸음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패션 잡지를 읽는 게 좋았다. 나에게 패션 잡지란 세상은 넓고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하다는 걸 알려준 가이드와 같은 존재였다. 런던, 뉴욕, 파리 등 패션으로 유명한 도시를 소개하는 기사를 읽고 멋진 화보를 보다 보면 지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중에서도 해외에서 패션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삶을 다룬 기사를 빠짐없이 읽곤 했다. 그들은 나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았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수업을 듣고 예술적 영감이 넘치는 환경에서 공 부하는 유학생의 삶이 멋지게 느껴졌다.
대학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했다. 처음부터 패션을 공부하기로 계획한 건 아니었다. 수능을 보고 나서 전공과 대학을 선택할 때 고민에 빠졌다.
내가 진짜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뭐지?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한국 교육 시스템 아래에 있는 여느 학생들과 다름없이 나 또한 다양한 직업군을 탐색하거나, 적성을 탐구하고 알아가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리스트에 나와 있는 수많은 전공 중 하나를 택해서 대학 입학 원서를 썼다. 당시에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미처 알지 못했다.
막상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해보니 적성과 맞지 않았고 결국 휴학을 하게 되었다. 남들은 잘만 다니는 학교를 나 홀로 적응하지 못하자 실패자가 된 느낌이었다. 부모님은 휴학한 뒤,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딸을 볼 때마다 “쟤가 나중에 취업이나 할 수 있으려나…” 하시며 혀를 쯧쯧 차셨다.
1년 후, 패션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꿔서 다른 학교에 지원했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이번엔 열심히 해보리라’라고 다짐을 하며 대학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컴포트 존(comfort zone)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이루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종이에 적어 보았다. 성적 장학금 받기, 매거진 리포터로 활동하기, 전시에 참여하기, 영어공부 꾸준히 하기 등등. 종이에 적힌 목표를 하나씩 이룰 때마다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성취감을 느꼈다.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보다는 마케팅과 패션 심리학 등 이론적인 분야에 더 많은 흥미를 느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패션 마케팅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예전에 읽었던 유학생 이야기를 다룬 잡지 기사가 떠올랐다. ‘외국에서 패션 마케팅을 공부하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을 시작으로 이미 마음은 영국에 가있었다.
유학을 가고자 하는 계획은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혼자 아이엘츠 시험 준비를 하고 유학원에 가서 상담을 받으며 끈기 있게 준비하는 딸의 모습을 보시곤 결국 허락해주셨다.
부모님이 반대하신 이유 중에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듯이 3년 동안 런던 생활비와 학비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런던이 아닌 다른 지역의 학교를 찾다가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를 알게 되었다. 아트 & 디자인 코스로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고 집세와 생활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런던에서 기차로 대략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에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 전시나 이벤트가 보고 싶다면 한두 달에 한 번씩 런던에 다녀오는 게 비용적인 측면에서 절약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하는 데 필요한 영어 점수가 나올 즈음,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매거진 리포터로 활동하면서 찍었던 사진들, 패션 에디터 코스를 수강할 때 만들었던 잡지, 아트 디렉션 과정을 듣는 동안 제작했던 무드 보드 등을 포트폴리오에 포함시켰다. 이외에도 노팅엄 트렌트 대학교는 패션 마케팅학과에 지원하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정해준 3개의 패션 브 랜드를 분석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요구했다. 당시에 주어진 브랜드는 갭, 나이키, 폴 스미스였다.
드디어 인터뷰하는 날이 다가왔다. 자기소개, 포트폴리오 심사, 프레젠테이션, Q&A까지 모두 끝이 났고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는 합격. 이제부터 영국으로 갈 준비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영국으로 가기 몇 개월 남지 않는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에 받은 건강 검진에서 갑상선에 혹을 발견된 것이다. 정밀 검사를 해보니 암이었다.
사실 암이 걱정되기보다는 그토록 고대하던 영국 유학을 미루거나 포기해야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더 컸다. ‘왜 나한테, 하필이면 유학 가기 바로 직전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그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초기에 발견했기 때문에 그리 큰 수술이 아니고 수술을 받고 나면 예정대로 유학을 갈 수 있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수술을 받고 나서 3개월 뒤,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