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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ia Hong Feb 04. 2022

그 때 그 아인

유학생 이야기


1장

나는 오늘도 신나게 대리운전을 한다.

매 달 100만원 씩 오스트리아에서 음악 공부하고 있는 아들한테 용돈을 보내 줄 수 있어서 좋다.

옆에 앉은 손님이 취해서 노래 한 곡을 틀어준다.

평소 내 취향은 아니지만 듣다 보니 피로가 풀린다.

아들 생각이 난다.


2장

1997년 2월 아버지를 따라 대구에서 과천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오기 전 아버지는 대구 성서공단에서 방직공장을 운영하셨다. 사업 수완이 좋고, 늘 에너지 넘치는 분이라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사업도 덩달아 승승장구했다. 유치원 입학할 무렵 집에 피아노가 생겼고 는 콩쿠르에 나가 수상도 여러 번했다. 레슨 교사가 일주일에 세 번씩 방문지도를 했으니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신동이라 불렀다. 가난했던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기대와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내가 예술중학교에 합격한 것은 엄청난 승부욕과 연습량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나는 남들보다 빠른 성공길에 오를 거라 예상 되었다. 그런데 IMF 가 터졌다.  


"과천 어디 2층짜리 주택 반지하방에 세를 얻었지. 도저히 고향에서는 살 수가 없었어. 빚쟁이들은 맨날 찾아오지. 어쩔 수 없어서 돈 벌러 서울로 올라 온기라. 그때 깨달은게. 사람이 드나드는 문에도 계급이 있다카는 거. 들어가는 입구부터 달랐어. 집주인은 중간 대문, 2층에 사는 사람은 옆문, 우리가 사는 지하방은 보이지도 않는 쪽문. 사람이 드나드는 문에도 이렇게 계급이 있더라고. 너무 창피하데. 그러다 여길 이사 왔는데, 내는 이 둥근 천장 비닐하우스 집들하고 마을이 너무 좋은기라. 들어가는 입구도, 집집마다 모양도 특별하이 구분도 엄꼬. 동네가 똑같은기 좋았어."


그제야 산동네 판잣집이었지만 마냥 싫지도 좋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 내 집에 대한 이중적 감정이 이해가 되었다. 어머니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후 과천 반지하방에 세를 얻어 살았다. 그러다 다시 사당동 판잣촌으로 이사와 아버지와 말없이 잠이 들고 깨어났던 그 곳. 그 때 나는 사춘기였고, 어머니의 빈자리는 너무도 차가웠다. 그 쪽방에서 매일 밤 아버지와 살을 부대끼며 지내지 않았다면 나는 건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3장

아들은 서울로 전학와서 얼마 후부터 싸움만 하고 다녔다. 애비인 나는 학교에 불려다니는 게 일이었고 같이 죽자 할만큼 힘들었지만 아들을 믿었다. 그 믿음이 흔들릴 때는 밤마다 손님들 세상살이 하소연을 들으며 나를 위로했다. 엄마 떠나고 낮선 곳에서 혼자 적응하는데 서러움이 얼마나 컸을지. 내가 13살부터 가장 노릇을 해봐서 그 심정을 잘 알았다. 방직공장에 취직해서 악착같이 돈 벌어 동생들 학비로 다 보내면서도 점심 사먹을 돈을 아껴 내 사업을 시작했을 때가 20대 후반이었다. 아내는 18살에 우리 공장에 왔다. 창백하고 깡마른 몸으로 쉬지도 않고 야근을 하는데 독해 보이기도 했지만 측은한 마음이 더 컸다. 하루는 아내가 헛구역질을 자꾸 한다길래 뛰어가봤더니 입에서 피가 올라왔다. 그런 날이 잦았다. 2년을 그렇게 일했는데 그만 일하고 결혼하자고, 손에 물한방울 안뭍히겠다고 빌다시피 아내에게 고백하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아내가 알뜰히 생활해준 덕분에 살림살이가 점점 좋아졌다. 공장도 잘 돌아가서 이제는 평생 한 풀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몇년을 더 못살고 갔다. IMF가 터지고 빚만 남았는데 믿었던 사람들한테까지 배신을 당하니 화병에 지병까지 겹쳐서 허망하게 떠났다. 매일 같이 들이닥치는 빚쟁이들 덕에 아들 유학 보내려다 나까지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된거다. 많이 배웠다. 착한 아들은 깡패처럼 변해갔고 학비를 벌려고 나는 하루 3시간 쪽잠 자며 밤 새 운전을 해야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한 번의 기회는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루는 낮술을 하신 건지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초저녁에 대리운전을 불러 성북동으로 가자고 했다. 들어보니 음대 교수인듯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들이 음악을 하는데 요즘 악기는 손에도 안대고 방황을 해서 걱정이다.'라는 말을 꺼냈다. 어르신은 속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아들이랑 시간내서 갔다오라며 빳빳한 티켓 두 장을 건넸다.


4장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느낄 때쯤 약간의 시비에도 싸움을 걸었다. 그 때는 음악이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고, 날 버리고 떠난듯한 어머니 생각에 미움과 그리움이 범벅이 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 일을 끝내고 삐그덕 거리는 문을 열며 들어오셨다. 며칠동안 빨지 않아 목덜미가 새까만 교복 셔츠를 대충 걸치고 나가려던 나를 나무라며 손님이 주셨다는 공연 티켓을 건넸다. 꼬깃꼬깃해진 종이를 보며 우리 형편에 음악이 무슨 소용이고,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화를 내고는 티켓을 반으로 찢어 쓰레기 통에 버리고 집을 나왔다. 나올 때부터 학교 갈 생각이 없었기에 길을 따라 한 참을 걷고 있는데, '예술의 전당'이 보였다. '빈 필하모니 내한 공연_지휘자 주빈 메타'


어릴 적 어머니와 MBC 방송으로 주빈메타와 사라장 협연을 본 기억이 났다. 다음에 내가 좀 더 크면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세종문화회관가서 직접 보자고 했던 공연이었다. "울희태도 내중에 저런 무대에 스야 된데이" 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던 10월의 밤이었다. 그날을 연상시키는 낙엽들을 밟으며 다시 한 시간을 걸어 집에 가보니 찢어진 티켓은 테이프로 붙혀져 있었고, 그 위로 어긋난 주빈 메타의 얼굴이 보였다. 교복을 빨아 입고 그를 만나러 갔다.


5장

'빈 음악원(University for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 복도에서 그를 만났다. TV에서 보았던, 내 운명을 바꾸어 놓은 그가 바로 앞을 지나고 있는데도 온 몸이 마비되고 심장이 뛰어 말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복도 가장자리로 비켜서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존경의 표현이었다. 뚜벅뚜벅 걸어가던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 다시 나에게로 왔다.


"Wat is jouw naam?" (자네 이름이 뭔가?)


"Mijn naam is Hee-Tae Choi. Sir!" (저는 최희태라고 합니다, 교수님.)


"Zullen we een kopje koffie gaan halen?" (우리 커피 한 잔 하러 갈까?)


...


"Vriend, waar kom je vandaan?" (친구, 어느 나라에서 왔지?)


"Dit is Korea, professor." (한국입니다 교수님.)


"Weet jij waar mijn geboorteplaats is? Ik ben Indisch Ik ben een Aziaat zoals jij. Maar dit is een plek waar muzikanten van wereldklasse samenkomen, en je zult hier wonen als de beste muzikant ter wereld. Dus buig in de toekomst niet je hoofd en zeg hallo tegen iedereen die je tegenkomt. en noem het zo." (내 고향이 어딘지 아나? 나는 인도인이야. 나도 자네처럼 동양에서 왔지. 이곳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모인 곳이야. 자네도 앞으로 이곳에서 세계 최고의 음악인으로 살아갈 걸세. 그러니 여기서 누구를 만나던 고개 숙이지 말고, 어깨를 펴고, 이름을 불러. 자 해봐)


"Hey, Zubin!'





김필_그때그아인(영상링크)



이 글은 김필의 '그때 그 아인'을 듣던 나에게 대리운전기사님이 "독일에서 작곡 공부하고 있는 딸이 생각나네요. 손주랑 달랑 둘이 가서 살고 있는데 제가 매달 100만 원씩 용돈 보내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노래가 좋아 피로가 풀리네요."라는 말씀을 토대로 상상해 만든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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