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의 첫 직장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마케팅 기획자로서, 매일 새로운 데이터를 마주하며 가설을 세우고 마케팅의 방향을 고민했다.
두 번째 직장에서는 데이터 분석자로 일했다. 더 명확한 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수치를 해석하고, 가능성과 한계를 검증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전략기획자가 되었다. 시장 트렌드를 읽고, 경쟁 환경을 분석하며, 타당성을 검토하고 기획안과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는 일이 주된 역할이었다. 쉽게 말해 '회사의 미래를 구체적인 숫자와 계획으로 그려주는' 사람인 것이다.
직장생활 20년, 그중 전략기획 업무는 만 8년을 넘게 하고도, 내 사업을 결심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회사는 이미 정답이 있는 환경이다.
아이템(재화나 서비스)이 이미 정해져 있고, 시장도 어느 정도 검증됐으며, 데이터도 쌓여 있다. 내가 할 일은 주어진 틀 안에서 최적화하거나, 정해진 방향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고, 설령 신사업을 검토한다 해도, 회사의 기존 역량, 브랜드, 유통망이라는 자산 위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창업이라는 길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모든 것이 백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했음에도, 선택지는 너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시장에 필요한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수익을 낼 수 있는 것’
이 네 가지가 겹치는 지점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가장 크고 깊은 두려움은 ‘검증의 부재’였다.
회사의 시스템에서는 과거의 결과와 시장 조사, 다양한 피드백으로 아이디어를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1인 사업자의 길에서는 “이 길이 옳은가?”라는 질문에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모든 위험은 온전히 나의 몫이 되고, 그래서 결정의 무게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어떤 날은 "이건 진짜 대박 아이템이다"라고 확신에 찼던 생각이, 어떤 날은 "중국에서 카피 제품 만들어서 저가로 시장에 내놓으면 답이 없는데"라는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즉, 자기 객관화가 어렵다 보니 내 아이디어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현금 1억만 모으면 퇴사한다’고 스스로 약속했지만, 한 번씩 터지는 사건들로 그 금액은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언덕이 되었고, 그래서 몇 년 전 법인을 설립을 해두고도 준비가 되지 않아 현재의 회사를 떠나지 못했다.
지난달 드디어 퇴사를 결정할 수 있게 만들었던 건 어디서 본 '완벽한 아이템은 없다'라는 말이었다.
명확한 해답이 없어도 일단 시작하고 시장 반응에 따라 즉각적으로 조정하는 유연함을 택하기로 했다.
앞으로 끊임없이 불확실성과 마주하고 매번 결단을 요구받게 될 것이지만, 그 안에서 성장하고 나만의 해답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오늘 퇴근 후 강아지 산책을 나가려는데 나보다 열 살 어린 같은 팀 직원에게 카톡이 왔다.
동료가 보는 나의 cool & easy going 함은 회사 울타리 안에서의 든든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허허벌판에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게 하는 과정에서 언제까지 여유롭고 융통성이 있을지.. 나도 궁금하다.
늘 숫자로 증명하던 내가 이젠 감으로 해야 한다는 게 두렵긴 하지만, 불확실성 속에서도 조금씩 완성되고 있을 거라 믿는다.
공식적인 퇴사일은 11월 30일. 그리고 실제로 출근하는 마지막날은 이번 주 금요일 11월 14일...
다음 주부터 시작될 '대표' 명함을 가진 백수 or '백수'인 것 같은 대표로의 이상한 정체성이 왠지 설렌다.
대책 없는 퇴사 이야기 첫 번째...
https://brunch.co.kr/@0a5e4e19c38c4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