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덕적으로 믿고 기대하는 사회
평소 도덕과 윤리에 관한 생각을 적지 않게 한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행동할까?",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훨씬 많을 거야."
요즘 들어 개인주의가 만연해졌다한들 아직 세상은 따뜻할 것이다.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은 뉴스 속에만 존재하며, 그 외의 사람들 특히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착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악하다는 성악설보다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은 선하다는 성선설을 강하게 주장한다.
세 달 전쯤 기차역에서 잃어버린 나의 에어팟,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해 분실물센터에 없는 것이지 누가 가져가서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길거리에 떨어진 주인 잃은 물건을 보며, 모든 사람들이 직접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오지랖인가 고민하지 그것을 몰래 가져갈지 고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듯, 그 사람들도 나에게, 그 사람들끼리도 모두 친절하게 대할 것이라 생각한다.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이를 한 번 정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서관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책 2권, '인간 본성의 법칙(로버트 그린)', '바른 마음: 나의 옮음과 그들의 옮음은 왜 다른가(조너선 하이트)'을 읽고 이 글을 쓴다. 책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느 학자가 어떤 주장을 하는가를 기억하려는 것보다는 나의 생각을 확장하는 것에 집중했다. 또한, 일정한 논리에 따라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 짜임새 없는 어쩌면 백스페이스도 사용되지 않은 글이 될 것이다. 그저 나의 많은 생각을 한 게시글에 담은 것일 뿐, 하나의 글로서는 역할을 못할 예정이다.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어야 생각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도덕 매트릭스(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부정,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 6가지 도덕성 기반에 의해 결정되는 개인 또는 사회의 도덕관)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평성'이었고, 이는 곧 'Give and Take'인 호혜적 이타주의였다. 내가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푼 만큼 언젠가 나도 어려울 때 누군가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물론, 이러한 보상을 바라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위에서 말했다시피 나를 친절한 사람이 되도록 자극하는 더 큰 이유는 사람은 태생적으로 착하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어쩌면 민주주의도 공리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선거조차 다수의 투표에 의해 소수의 투표는 무효가 되는 것. 나도 이 이론에 동조하는 편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소수에 속하는 것에 그 한정이다. 나를 포함한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더라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이 더 크다면 나는 그것이 좋다. 예를 들어 8조각의 피자를 3명이서 먹을 때, 2조각씩 먹고, 마지막 남은 2조각. 나는 누가 나에게 먹으라고 권하는 것보다, 내가 안 먹고 다른 사람이 각각 한 조각씩 먹는 것이 더 행복하다.
글에서 나 스스로를 나름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운운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책을 읽다 보면 자기가 얼마나 부도덕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부도덕한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사람을 좋아한다 말해놓고, 때론 상대방의 행복에 시기하고 슬픔에 기뻐한 나를 보며 반성한다. 그뿐만 아니다. 일반쓰레기에 재활용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지하철 내 자리 앞에 서계신 어르신을 보면 오래 걸은 다리로 합리화하며 애써 시선을 피한다. 사람과 차가 없는 새벽에는 무단횡단을 하기도 한다. 정말 이기적인 것은,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들 앞에서는 이런 모든 행동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양심의 가책을 줄이기 위한 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는 선하게 보이는 것보다 실제로 선한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과연 나는 그러한가.
이것은 그냥 하나의 사례이다. 우리 사무실에서는 작은 매점을 운영한다. 군것질이 하고 싶을 때 매번 마트에 가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직원에게 보증금을 걷은 뒤 마트에서 대량으로 음료와 과자를 사 와 판매한다. 직원은 그 매점에서 가격표를 보고, 명단에서 자기의 이름에 가격을 기입한다. 십원 단위 이상은 올림 한다. 예를 들어, 음료가 620원이면 700원을 기입한다. 그리고 매달 그 가격을 정산한다. 이론적으로는 정산했을 때, 금액에 공백이 생길 수가 없다. 오히려 이윤이 생길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무실 매점은 매번 판매된 물품에 비해 기입된 금액이 적어 적자가 난다. 누군가 무전취식을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큰 금액도 아닌, 천원도 되지 않는 적은 금액에 자신의 양심을 속인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지하철에서 임산부가 편하게 앉아갈 수 있도록 만든 자리. 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중년의 여성과 남성이다. 젊은 여성이 앉으면 사람들은 '과연 저 사람은 임산부일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워낙 그 자리에 대한 사람들이 시선이 많기 때문에, 임산부여도 그 자리에 앉는 것이 꺼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그 자리가 존재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임산부를 위해 자리를 비켜줄 텐데... 티가 잘 나지 않는 임신 초기 여성을 위한 임산부 배찌도 있어서, 그 표식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양보해줄 텐데... 절대로 비어있지 않고, 앉는 사람은 의심받게 하는 그 자리가 필요했을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백치에서 나온 구절이다. 나는 '권선'징악을 믿는다. 나는 유로지비('성스러운 바보'라는 뜻의 러시아어)가 되고자 한다.
읽어볼 책: 죄와 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