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윤 <숲속의 자본주의자>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설님, 안녕하세요.
나는 나만의 시각을 담고 싶었다. 나에게는 사회적 이슈를 일으킬 수 있는 논쟁적인 주장 같은 것은 별로 없었고, 그것을 끌어내려고 애쓰고 싶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이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 따라서 몰라도 그만이긴 하지만 알면 일상에 미묘한 균열을 내는 것들이 내게는 재미있었다. 그런 기사는 구석 한편에 위치하거나 아예 지면에 오르지 못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 실망스러워야 하는데, 의외로 즐거웠다. 해보고 나서야 나는 1면에 올라가는 것보다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때로 조그맣게 올라간 기사를 극소수의 동료 기자가 알아보고 칭찬해줄 때, 정말 으쓱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나만 볼 수 있는 것들을 특별하게 좋아해주는 것 말이다. - <숲속의 자본주의자>
이번 편지는 우선 박혜윤의 <숲속의 자본주의자>에서 훔친 문장으로 열어봅니다. 제 마음 같기도 하고, 제가 되새겨야 할 마음 같기도 해서요. 실은 편지를 다 쓰고 나서 읽어보니 의식의 흐름대로 쓴 편지인 것 같아서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 아니,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의식의 흐름대로 쓴 것이 맞습니다. 이런. 심지어 책도 두 권, 이 책을 읽다가 이 생각을 하고, 저 책을 읽다가 저 생각을 하는 식의 중구난방입니다. 그러나 뭐, 이미 이렇게 써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이걸 읽기 쉽게 잘 가다듬고 하나의 결론을 향해 다가가는 일은, 너무 일 같아서 오늘은 좀 쉬고 싶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어쩌면 설님도 이런 이야기를 특별히 좋아해주실지도 모를 일이니 그냥 이렇게 한번 가보렵니다.
설님. 연휴를 앞둔 일요일 아침입니다. 조금 춥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일요일 아침의 로망을 실현중입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아침잠이 없는 저는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에 책과 아이패드가 든 가방을 둘러메고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옵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는 제 나름대로 발굴한 여러 개의 산책로가 있는데요, 오늘은 집을 빠져나와 동인천역 북광장을 지나 화평동을 지나서 화수동으로 갔다가 왼쪽으로 틀어 육교를 지나 차이나타운을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청일조계지를 지나면 우리가 주말마다 가는 카페가 있습니다.
이 카페의 좋은 점은 아침 일찍 문을 연다는 사실입니다.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밤 늦게 문을 닫습니다. 명절 전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문을 엽니다. 로스터리가 있는 카페인데요, 로스팅을 하는 카페라고 해서 다 맛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 카페는 커피의 맛이 꽤 괜찮습니다. 가격도 저렴한 편, 분위기도 뭐, 제 취향은 아니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힘을 주었다기보다는 캐주얼한 느낌입니다. 출근하다가 들러서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해갈 것 같은, 잠깐 짬이 나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창밖을 내다볼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이에요. 이 카페는 위치가 절묘하게 좋아서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개항장 거리의 이국적인 풍경이 좋고요, 일본식 단층 건물이 대부분인 동네라서 1층임에도 하늘이 아주 잘 보여서 좋습니다. 무엇보다 이 카페의 분위기에는 안정감이 있습니다.
가게에 안정감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손님을 불편하게, 또는 불안하게 만드는 가게는 좋지 않지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는데요, 뭔가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물 샐 틈 없는 운영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무작정 사업을 벌이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릅니다. 기가 막힌 아이템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지요. 재능은 2%, 노력이 98%란 말처럼 기가 막힌 아이템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닫는 것, 매일 가도 매일 똑같은 맛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것, 테이블이 더럽지 않고 바닥이나 화장실 청소가 제대로 되어 있는 것, 바리스타가 허둥대지 않는 것, 하다못해 유리창이 제대로 닦여 있는 것은 커피의 맛보다 더 중요한 일입니다. 제가 카페를 할 때도 이런 걸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하긴, 그때 저는 성공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요. 대체 뭔 생각이었는지…….
설님. 오늘 저는 박혜윤의 <숲속의 자본주의자>라는 책을 두 번째로 다 읽었습니다. 처음에 읽을 때도 그랬지만 두 번째 읽을 때도 역시 재미있는 책입니다. 요즘 문득 내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읽으면서 여러 군데에 다시 밑줄을 그었지만 역시 마지막 장에 쓰인 구절들은 마치 제 마음인 것만 같습니다. 너무 입 안의 혀 같은 책만 읽지 말라고 누가 그랬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 미천한 중생이 거친 세상을 버텨내려면 가끔은, 아니 자주 이렇게 입 안의 혀 같은 이야기들이 필요한 걸요.
진화의 핵심에는 돌연변이가 있다. 어떤 일정한 계획과 방향을 두고 일사분란하고 체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방해되는 무수한 시도들이 폐기 처분되는 과정 중 소수의 몇 가지가 살아남아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의미는 돌아봐서 정한다. ‘이렇게 바뀌면 살아남을 수 있어. 이렇게 해야겠다’ 가 아니라, ‘살아남았네? 어떻게 이게 가능했지?’ 하고 반대로 추적해보면, 보이는 것들은 사실 변화나 행위의 당시에는 그저 의미 없는 많은 시도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거나 해본다. 혹은 해볼까 하다가 여건이 안 맞으면 안 해도 그만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는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란 없다.
거의 모든 충동적 시도나 생각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갑자기 떠오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의식적 계산이나 감각보다 더 큰 무엇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도 납득할 수 없지만, 그냥 끌리는 것이 있다. 나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하고, 심지어 나의 취향에도 맞지 않고, 앞으로 나에게 쓸모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일이나 주제들에 참을 수 없는 끌림을 느낄 때, 나는 항복한다. 일단 행동으로 옮긴다.(중략) 이런 항복의 습관을 들이면, 나 자신의 깊은 욕구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습관이 든다. 이렇게 살다 보면 삶이 어떻게 풀리든 간에 남이나 사회를 탓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이 풍요롭게 즐겁다.
나는 어떤 일에도 100퍼센트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항상 생각하는 건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다. 취미 생활을 할 때도 장비를 먼저 준비하지 않는다. 회사에 다닐 때도, 박사 공부를 할 때도, 갑자기 그만두어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대충 한다. 다음에 할 일, 내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나 돈이 항상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 인생관이다. 나는 나 자신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한 끝에 지쳐버려서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도 싫고 좋아하는 사람과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놓치기도 싫다. 그리고 어떤 일이고 지겨워지거나 멈추고 싶을 때 언제라도 그럴 수 있는 자유도 나에게는 아주 중요하다. 이 가치들이 중요한 만큼 세속적인 욕망은 약하다. 배수의 진을 치지도, 있는 힘을 다하지도 않았으니까 성공으로 보상받아야겠다는 생각도 안 든다. - <숲속의 자본주의자>
제가 앉아 있는 이 카페에는 딱히 이데올로기가 없습니다.(가게에 이데올로기가 있고 없고는 제가 아는 서산 김씨라는 분에게 주워들은 표현인데요, 이 분 정말 뭐라고 딱히 설명하기 힘든 간질간질한 느낌을 인텔리적으로 툭 건드려주시는 데는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흐흐) 저는 이데올로기가 아주 굳건한 카페도 좋아하지만, 그런 카페는 가끔 피곤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냥 문을 열고 기어들어가 나의 추레함을 기대고 싶은, 뭐 어떻게 행동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그런 카페나 술집이 점점 좋아집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되는, 그런 장소 말이에요. 그런 걸 생각하다 보니 문득 이 드라마광 아주머니는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그 드라마 속 매일 술 마시는 아저씨들이 떠오르고요, 생각해 보니 그 드라마 다 우리 동네에서 찍었네? 역시 내가 나의 중년의 심신을 놓아둘 장소로 동인천을 선택한 것은 운명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저는 일요일 아침의 로망을 실현중입니다. 창밖으로 근대 거리가 내다보이는, 매일 아침 일찍 문을 여는, 그럭저럭 운영이 잘 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없고, 웬만하면 크게 붐비지 않는(지금은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카페에 앉아 맛이 썩 좋은 커피를 마시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고요. 그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입니다.
아니, 잠깐만. 저는 오늘 설님께 이 책을 소개할 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이라는 책을 한번 소개했습니다.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같은 작가의 책을 두 번씩이나 소개해야겠습니까? 그러나 문득, 저는 예상치 않게 카페에 앉아 이 편지를 쓰고 있고, 제 옆에는 <해변의 카프카>가 있고, 저는 문득 이 책을 설님께 소개해야 하는 것은 운명이다, 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설님. 저는 이 책 <해변의 카프카>를 아마 서너 번 정도는 읽은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책을 산 때가 20대였는데요, 지금 책 뒷면을 들춰보니 2003년 7월에 나온 초판 2쇄를 산 것이네요. 이 책을 사서 지하철에 서서 읽던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남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몰라도 제게는, 가독성이 좋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서 책장을 미친 듯이 넘기게 하는, 그러니까 스토리텔링 능력이 엄청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때의 제게는 이 책이 별다르게 큰 의미를 띄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좀 더 화려한 느낌의, 그러니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같은 책을 더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중년에 들어 이 책을 다시 읽고서 느꼈습니다. 아, 이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최고의 역작이다.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다무라 카프카라는 이름을 가진(물론 지어낸 이름입니다) 15살의 소년이 가출을 해서 지방의 한 고풍스러운 사설 도서관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어린 시절 집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일지도 모를 여자를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소년은 어쩌면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에는 어린 시절 알 수 없는 사건으로 기억을 잃고 지성을 상실한 나카타라는 노인이 등장합니다. 나카타의 특별한 재능은 고양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그는 고양이를 잡아가서 죽이는 남자(조니 워커… 라고 합니다)를 만나게 되고 어찌저찌 하다가 다무라 카프카가 가출한 도시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카타는 나중에 트럭 운전수인 호시노라는 청년과 함께 하게되는데요, 이 콤비의 케미를 보는 것도 아주 즐겁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뭐래도 제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읽고 있는 것이 즐거워 견딜 수 없는 그런 책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느끼기에 이 작가는 설명을 잘합니다. 쉬운 단어들을 써서 어려운 것들을 죽 풀어나가는 데에 거의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리듬감이 좋습니다. 이 작가가 여러 번 말한 것처럼,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그 리듬감이 글 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는데요, 읽어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설명도 잘하고 리듬감도 좋고 묘사도, 비유도 잘합니다만(서산 김씨의 비유도 여기에 필적하지요) 제가 뒤늦게 깨달은 이 작가 최고의 매력은, 역시 대화입니다.
전에도 저는 이 작가의 대화 쓰는 기술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이 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이 쓴 대화를 읽다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역시 멋진 일이 아닌가, 하는 낙관적인 마음마저 품게 됩니다.
“너, 저 버스 탔었지?” 하고 그녀가 나에게 묻는다. 약간 쉰 목소리다.
“응.”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몇 살이니?”
“열일곱 살” 하고 나는 거짓말을 한다.
“고교생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까지 가는데?”
“다카마쓰.”
“그럼, 나하고 같네”하고 그녀가 말한다. “지금 다카마쓰로 가는 길이야? 아니면 어딜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야?”
“가는 거야” 하고 나는 대답한다.
“나도 그래. 거기 친구가 있거든. 친한 여자친구지. 너는?”
“친척이 있어.”
그녀는 그래? 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네 또래의 남동생이 있어”하고 문득 생각난 듯이 그녀는 말한다. “사정이 있어서 벌써 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아, 그런데, 너 그 애랑 굉장히 닮았어. 누가 그런 말 한 적 없니?”
“그 애라니?”
“왜, 그 밴드에서 노래 부르는 아이 말이야. 버스에서 처음 보았을 때부터 쭉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를 않는 거야. 머리에 구멍이 뚫릴 정도로 계속 진지하게 생각해 봤지만 안 되더라구. 왜 그럴 때 있잖아? 생각이 날 듯 날 듯 하면서도 끝내 생각나지 않는 경우 말야.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 지금까지 들은 적 없어?”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녀는 아직도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고 있다.
“어떤 사람인데?” 하고 나는 물어본다.
“TV에 나오는 사람.”
“TV에 출연하는 사람?”
“맞아, TV에 출연하는 사람.” 그녀는 햄 샌드위치를 집어서 무표정하게 먹고는 다시 커피를 마신다.
“어느 밴드에서 노래를 부르는 남자아이야. 안 되겠네. 그 밴드 이름도 생각나질 않아. 관서 지방 사투리를 쓰는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남자아이인데, 짐작 가는 것 없니?”
“잘 모르겠어. TV는 안 보니까.”
그녀는 얼굴을 찡그린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쳐다본다.
“안 본다구, 전혀?”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끄덕인다.
“넌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말을 해도 대개 몇 마디밖에 하지 않는구나, 늘 그러니?”
나는 얼굴이 빨개진다. 내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본래 말수가 적은 이유도 있다. 그러나 목소리의 높이가 아직 완전히 자리 잡지 않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평소에는 대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지만, 이따금 갑자기 목소리가 뒤집힌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길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자제하고 있다.
“어쨌든 좋아” 하고 그녀는 계속한다. “넌 그 밴드에서 노래하고, 말할 때는 관서 사투리를 쓰는 남자아이와 느낌이 아주 비슷해. 물론 넌 관서 사투리는 쓰지 않지만 다만 뭐랄까…… 분위기가 아주 비슷하다는 얘기야. 꽤 인상이 좋은 아이거든. 그뿐이야.”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금방 다시 돌아온다. 내 얼굴은 아직도 빨개진 채로 있다.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좀더 비슷해질 것 같은데. 좀 더 길게 기르고, 헤어젤을 써서 살짝살짝 머리카락을 세우는 거야. 할 수만 있으면 지금 여기서 해주고 싶은데. 틀림없이 잘 어울릴 거야. 사실 나는 미용사거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차를 마신다. 카페테리아 안은 아주 조용하다. 음악도 흐르지 않는다. 이야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니?”
그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진지한 얼굴로 나에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귀찮다든가, 뭐 그런 것 아니야?”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흔든다. 그녀는 샌드위치를 한 개 집어 든다. 딸기잼 샌드위치다. 그녀는 몹시 못마땅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다.
“이거 먹을래? 이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거든. 어릴 때부터 쭉.”
나는 그걸 받아 든다. 나도 딸기잼 샌드위치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잠자코 먹는다.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내가 샌드위치를 다 먹는 것을 확인한다.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는데” 하고 그녀가 말한다.
“뭔데?”
“다카마쓰에 도착할 때까지 네 옆에 앉아도 될까? 혼자 있으면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이상한 사람이 옆 자리에 앉을 것 같아서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표를 살 때 한 사람씩 앉는 좌석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타고 보니까 실제로는 이인용 좌석이더라구. 다카마쓰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잠을 자고 싶어. 너는 이상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그래. 어때, 괜찮겠어?”
“난 괜찮아” 하고 나는 말한다.
“고마워” 하고 그녀는 말한다.
“여행은 길동무라고 하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부터 계속 끄덕이고만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단 말인가?
“그 뒤는 뭐였더라?”
“그 뒤?”
“맞다, 여행은 길동무라는 말 뒤에 무언가 계속되는 말이 있었는데? 생각이 나지 않네. 나는 옛날부터 국어에는 약하거든.”
“세상은 인정” 하고 나는 말한다.
“여행은 길동무, 세상은 인정” 하고 그녀는 확인하듯이 반복한다. 종이와 연필이 있으면 적어놓을 텐데 하는 느낌으로.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일까? 간단히 말해서?”
나는 생각해 본다.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그녀는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다.
“우연한 만남이란 인간의 감정을 위해서 꽤 소중하다, 라는 얘기일 거야. 간단히 말해서” 하고 나는 말한다.
그녀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테이블 위에서 두 손을 천천히 마주잡는다.
“그건 분명히 그래. 우연한 만남이란 인간의 감정을 위해 꽤 소중하다는 말은 맞는 것 같아.”
나는 손목시계에 눈길을 보낸다. 벌써 다섯 시 삼십 분이다.
“이제 슬슬 돌아가는 게 좋겠어.”
“응, 그래. 가자” 하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일어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는 도대체 어디지?” 하고 내가 묻는다.
“글쎄 어딜까?”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빙 둘러보며 말한다. 그러자 한 쌍의 귀고리가 농익은 과일처럼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나도 잘 모르겠어. 시간으로 보아서 아마 구라시키 근처인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어디라도 상관없잖아. 고속도로의 휴게소는 어차피 통과하는 지점에 불과하니까. 이쪽에서 이쪽으로 말야.” 그녀는 오른손 집게손가락과 왼손 집게손가락을 공중에 세운다. 그 사이는 30센티미터 정도 거리가 있다.
“장소의 이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화장실과 식사, 형광등과 플라스틱 의자. 맛없는 커피. 딸기잼 샌드위치. 그런 것에 의미는 없다구. 중요한 건,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아닐까? 안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해변의 카프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느낌을 저는 좋아합니다. 저도 나름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사람이라서, 덮어놓고 따뜻한 글에는 딱히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건조하게 써도, 딱히 따뜻해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따뜻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런 글이 있지요. 저는 그것이 어쩌면 나는 나를 딱히 사랑하지 않고, 그렇다고 남들을 딱히 사랑하지도 않으며, 우리 동네나 이 사회나 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는 것 자체를 그럭저럭 사랑하는 것 같다, 는 느낌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이야기하지만, 저는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제 비루함을 절감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받을 때는 우울하지요.) 여전히 배울 것이 많구나, 할 일이 많구나, 싶으면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질 정도로 즐겁습니다. 읽고 쓰는 일, 그것만큼 즐거운 일도 또 없지요. 아무튼 한 작가의 책을, 나온 지 20년, 30년이 지난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으면서 그 이야기에 여러 번 반복해서 푹 빠지는 일을, 그리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며 기뻐하는 일을 저는 계속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아아아,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설님. 이어지는 편지는 이틀이 지난 설날 저녁에 마저 쓰고 있습니다. 저는 제사를 휘뚜루마뚜루 지내고, 친정에 갔다와서는, 앞에서 말한 카페에 또! 와있습니다. 저녁의 이 카페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원래는 저녁에도 분위기가 좋았는데요(아름답게 조명을 밝힌 오래된 거리가 창 너머로 펼쳐지거든요), 요즘은 이 카페의 아르바이트생들이 자꾸만 아이돌 댄스 음악을 틀어댑니다. 사장이 있을 때는 스탠다드 재즈, 아르바이트생들이 있을 때는 아이돌 댄스인 것이지요. 그중에는 가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한 댄스 음악도 있어 화가 납니다. 아니, 이런 음악을 진실로 듣고 싶어서 트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싶습니다. 아무리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가게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이런 음악을 틀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카페의 음악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아니라 손님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고 지팡이라도 흔들며 소리치고 싶습니다만, 제게는 지팡이가 없네요. 저는 이렇게 예민하고 괴팍한 아주머니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음악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늘 차를 타고 친정에 다녀오는 길에 이소라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지요. 정말 특별한 음악에는 어쩐지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요. 이소라의 목소리는 이상합니다.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하고 열심히 안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열심히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못 부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이상한 간극 속에서 그가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려는 메시지가 마치 커다란, 아름답기보다는 무시무시하고 어쩐지 섬뜩할 정도로 커다란 꽃이 개화하듯이 피어납니다.
그러고 보면 음악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창조물에는 그런 이상한 구석이 조금은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매끈한 문장에는 딱히 매력이 느끼지지 않는 것처럼요. 너무 매끄러워서 대체 어디를 붙잡고 매달려야 할지, 잘 닦은 은식기 위에서 그대로 미끄러져 버리는 파리 한 마리가 된 기분이 들곤 하는 그런 문장들, 노래들, 그림들, 뭐 그런 것들이요.
그래서 오늘은 <해변의 카프카> 중 이 부분에 마음이 멈춥니다. 가출한 소년은 도서관의 직원 오시마 상과 함께 차를 타고 멀리 떨어진 임시거처로 향하는 중입니다. 오시마 상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틀고, 두 사람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요. 역시 좀 길지만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운전할 때 곧잘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크게 틀어놓곤 하지. 왜 그러는지 알겠어?”
“몰라요” 하고 나는 말한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야. 특히 이 D장조 소나타가 그래.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곡이거든. 이 작품의 한두 악장만 독립적으로 연주하라면, 어느 정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있다고 해. 그러나 네 개의 악장을 통틀어 통일성을 염두에 두고 들어보면, 내가 아는 한 만족할 만한 연주는 단 하나도 없어. 지금까지 여러 다양한 명피아니스트가 이 곡에 도전했지만, 그 어떤 연주도, 느낄 수 없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거든. 바로 이 연주만은 결함이 없다고 할 만한 연주는 아직 없다, 왜 그런지 알아?”
“모르겠어요” 하고 나는 말한다.
“곡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야. 로베르트 슈만은 슈베르트의 피아노곡의 뛰어난 이해자였지만, 그런데도 이 곡을 ‘무지무지 장황’하다고 평했지.” “곡 그 자체가 불완전한데 어째서 수많은 명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에 도전하는 걸까요?”
“좋은 질문이야” 하고 오시마 상이 말한다. 그리고 사이를 둔다. 음악이 침묵을 채운다. “나도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어. 하지만 하나만은 말할 수 있지. 요컨대 어떤 종류의 불완전함을 지닌 작품은 불완전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적어도 어떤 종류의 인간의 마음을 강렬하게 끌어당긴다는 거야. 예를 들어, 넌 소세키의 <고후>에 마음이 끌린다고 했지. <고코로>나 <산시로> 같은 완성된 작품에는 없는 흡인력이 미완성의 작품에는 있기 때문이지. 너는 그 작품을 발견한 거야. 바꿔 말하면, 그 작품이 너를 발견한 셈이지. 슈베르트의 D장조 소나타도 그것과 마찬가지야. 그 음악에는 그 작품이 아니고서는 바랄 수 없는 마음의 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단 말이지.”
“그래서,” 하고 나는 말한다.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는데요, 어째서 오시마 상은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듣는 거죠? 특히 운전하고 있을 때?”
“슈베르트의 소나타는, 특히 D장조 소나타는 곡 그대로 매끈하게 연주해서는 예술이 되지 않아. 슈만이 지적한 것처럼, 소박하고 서정적인 목가와 같이 너무도 길고 기술적으로도 지나치게 단순하거든. 그런 것을 악보 그대로 연주하면 아무 맛도 없는 흔해 빠진 골동품이 되어버려. 그래서 피아니스트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기교를 구사해. 장치를 마련하는 거야.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아티큘레이션(또렷한 음 표현)을 강조하거나, 루바토(박자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연주법)로 하거나, 빨리 치거나, 강약을 궁리하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리듬감을 살려나갈 수가 없거든. 하지만 아주 주의해서 하지 않으면, 그런 장치는 흔히 작품의 품격을 무너뜨리게 되고, 슈베르트의 음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되어버려. 이 D장조 소나타를 치는 모든 피아니스트는 예외 없이 그런 이율배반 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그리고 이야기를 계속한다.
“내가 운전하면서 자주 슈베르트를 듣는 것은 그 때문이야. 아까도 말한 것처럼 그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든 불완전한 연주이기 때문이지. 질이 높은 치밀한 불완전함은 인간의 의식을 자극하고 주의력을 일깨워주거든. 이것 이상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완벽한 음악과 완벽한 연주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다간, 눈을 감고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D장조 소나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서 인간이 영위하는 한계를 듣게 되지. 어떤 종류의 완전함이란 불완전함의 한없는 축적이 아니고서는 실현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거야. 그것이 나를 격려해 주거든.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어?”
-<해변의 카프카>
이것은 오늘 제가 생각한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책에서 마치 내 머릿속을,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문장을 만나는 순간은 정말이지 짜릿하지 않습니까. 마치 이 책과 내가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굴을 파고 들어앉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처음으로 마음이 잘 맞는 친구를 사귀어, 그 친구와 밤새 통화하는 소녀가 된 기분입니다. 저는 책의 현재와 책의 미래에 대해 딱히 낙관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이유로 계속해서 책을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책을 쓰는 입장에서 우리는 이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책을 쓰는 일은 독자와 관계를 맺는 일이니까요.
<해변의 카프카>는 너무나 재미있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책에 관해 뭐라고 평할 머리가 못됩니다. 대신에 저는 이 책을 여러 번 다시 읽으며 구석구석을 음미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런 생각을 하고 내일은 저런 생각을 하지요. 아마도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책을 쓸 때 바랐던, 마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총합소설을 쓰고 싶었던 마음에 부합되는 읽기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설님.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의 어떤 점이 이렇게 매력적인지에 대해서(적어도 저에게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만, 요즘은 그 이유 중 하나에 ‘뻔뻔함’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무언가를 만들어오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뻔뻔합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대단하지 않아도, ‘이것이 나의 스타일이다. 어때?’ 하고 자기가 만든 것을 툭 던져버립니다. 속으로는 벌벌 떨고 있을지 몰라도 어쨌든 자기가 만든 것에는 그런 소심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이게 뭐야?’ 하다가 납득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예술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그냥 그렇다가 볼수록 뭔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싶다가, 혹시 이 사람, 뭔가 있는지도 몰라, 싶기도 한 그런 거 말이에요.
물론 남의 성공을 연구할 시간에, 그냥 내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게 낫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한국의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라는 책에서 나온 말인데요, 성공은 100% 운이니 남의 성공을 연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의합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간이 홈런볼 크기로 쪼그라들 때는 ‘이것이 나의 스타일이다. 뭐 어때?’ 하고 뻔뻔한 흉내를 내볼 필요도 있습니다. 대신, 그 뻔뻔함은 좀 오래 가는 것이 좋지요.
설님. 저는 어떤 일이나 꾸준히 하지는 못합니다만, 하고 싶은 일은 꾸준히 합니다. 대신 내가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지 않은지 제 몸과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노력하지요. 그러려면 삶이 너무 복잡해서도, 너무 변화무쌍해서도, 너무 분주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우치다 타츠루 스승님께 배운 것이기도 해요.) 저는 최대한 단순하게 삽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며, 매일 비슷한 것을 먹고, 매일 비슷한 일과를 유지합니다. 제가 갑자기 사라지고 휴대폰도 먹통이 되어도 제 가족들은 대충 제가 어느 반경 안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그리고 저는 오늘도 같은 카페에 있습니다.) 저는 멋대로 사는 편이지만, 멋대로 살기 때문에 딱히 일탈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 편지 교환을 과연 언제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요. 하다 보니 이 루틴에 제 몸과 마음이 적응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누가 읽든 말든 저는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블로그에 글을 20년이 넘게 써오고 있는 것도 아무런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었거든요. 아니, 그보다 그것은 저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이에요. 저를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즐겁게 꾸준히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뭐든 꾸준히 즐겁게 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어딘가에 닿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목적지일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저는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김설이라는 실체가 있고 수많은 역사가 있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제가 공을 던지면 설님이 그것을 받아서 다시 던져준다는 것, 그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역시나 뱃속 깊은 곳까지 따뜻해져서, 소화도 잘 될 것 같고 쾌변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빵을 한창 만들다 보면 언젠가 이 일도 그만두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굉장히 집중하게 된다. 그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순간 지금 이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최고점이며, 앞으로 서서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할 거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나의 욕구가 이끄는 한에서 임계점까지 갔다가 그 쾌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나는 미련 없이 그만둔다. 그러다 보면 나의 경험들은 대부분 온전히 나다운 것으로 채워진다. 나의 욕구와 욕망의 방향과 강도를 확인하는 과정을 지나온 것이니까.
인간은 순간을 살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끝을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래서 괴롭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삶의 충만함을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끝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이해한다.
-<숲속의 자본주의자>
아마 언젠가는 그때가 오겠지요. 이제는 그만두어도 되겠다는 때가. 끝이 올 때가. 그리고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때를 기다립니다.
2022년 2월 2일
쾌변 인생 수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