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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Feb 17. 2022

그쪽은 대체 어떻게 쓰시나요?

<작가란 무엇인가> - 파리 리뷰  

안녕하세요, 설님.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번 편지는 좀 일찍 쓰기 시작했지요. 저는 아침마다 출근 전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면서 뭔가를 씁니다. 간혹 쓰긴 써야 하는데, 긴 글에 깊이 집중하기 어려울 때, 그럴 만한 시간이 없을 때는 저는 에세이의 초안을 쓰거나 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이 편지를 조금 써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이 업계에서 저는 친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긴 이 업계에 무슨 구심점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다들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가끔 이 일의 기쁨과 슬픔을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들어줄 사람, 소주잔을(저는 소주를 싫어하니까 맥주잔이라도) 부딪치며 이 일의 쓰디쓴 맛을 함께 삼켜줄 사람, 서로의 어깨를 부서질 정도로 내리치며 “맞아! 맞아!” “그러게! 그러게!” 하고 외칠 수 있을 그런 사람, 그러니까 동료를 만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요, 동료가 없다는 점이 이 일의 가장 서글픈 점이지요. 이 일은 대개 자기 방의 책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동료를 만들면 뭐가 나아질까, 하면 딱히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남들이 제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는 거니까요. 이 일에는 인정하기 싫지만, 상당 부분의 고립된 시간과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혼자서 뛰는 레이스가 끝나면, 함께 뛰었던 사람들과 노천 펍에 앉아 맥주를 마시거나 벽난로 앞에 모여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남들이 일하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렇게 일하는데, 이게 맞는지,   나은 방법이 있는지 항상 알고 싶습니다.


"두 번째 책인 <소녀와 여성의 삶>을 쓰던 해에는 정말 다작을 했죠. 딸아이 친구 하나가 우리와 함께 살게 돼 아이가 넷이었고, 일주일에 이틀은 서점에서 일했어요. 새벽 1시까지 일한 다음 6시에 일어나곤 했어요. ‘이러다 죽겠구나, 이건 정말 끔찍해. 심장마비로 쓰러지겠어.’ 겨우 서른아홉 살이었는데. 그러다 생각했죠. ‘그래. 설마 죽더라도 나한테는 수많은 페이지의 글이 있어. 책으로 만들 방법은 사람들이 알아내겠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필사적인 레이스였어요." - 앨리스 먼로


"아이를 키울 때 아주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맹렬하게 쓰는 법을 훈련했습니다. 주말이 비어 있거나 한 주 정도 시간이 나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분량을 작업했죠. 지금은 그 습관이 몸에 배었습니다. 사실 더 천천히 작업할 수 있으면 훨씬 잘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습관이 들었어요. 대부분의 여성은 그런 식으로 쓰더군요." - 도리스 레싱


그래서 저는 이런 책을 재미있게 읽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잡지 '파리 리뷰'의 12명의 세계적인 소설가들과의 인터뷰집인데요, 총 세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저는 이 책들을 정말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 밑줄을 치고 옮겨 적어두었지요.


앨리스 먼로와 도리스 레싱 같은 위대한 작가들도 저처럼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해결하며 고군분투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위로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 ‘세상에 이렇게 힘든 건 나 혼자뿐’ 같은 유치한 생각은 할 수 없지요. 저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든든합니다.


"피를 짜낸다는 불평에 그다지 공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작가에게 작가가 되라고 강요하진 않았으니까요. “오, 이건 정말 고독한 일이야!” 라고 작가들이 말하는 걸 들어왔어요. 글쎄요, 그 고독이 싫다면 그만둬야죠. 대부분 작가들이 불평하는 건 은근히 과시하는 거예요. 물론 글을 쓴다는 건 어려운 일이죠. 그렇다고 산만하기 짝이 없는 쌍둥이를 돌보는 일과 이 일을 바꿀 건가요?" - 줄리언 반스


아니죠. 절대로 그럴 수 없죠. 쌍둥이 돌보기와 글쓰기라니! 줄리어 반스씨는 역시 뭘 좀 아시네요.


설님도 아마 동의하시겠지만, 글쓰기는 정말 멋진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일들에 비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정말로 그렇습니다. 저는 제가 생계를 위해 하는 일도 싫어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카페에서 열심히 쓰다가 시간이 되어 출근을 해야 할 때면 언제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합니다. 작은 방에 처박혀 매일 읽고 쓰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저는 작은 사업을 해서 생계를 꾸리는 동시에 두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지요. 물론 남편은 이 모든 일을 저와 함께하지만 아무래도 제 성에는 차지 않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를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쪽은 대충 뒤섞어 만든 요리를 냄비째 퍼먹어도, 집안이 너저분해도 딱히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제가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유리창을 닦고 샤시틀까지 쑤셔 파는 이유는, 그냥 제가 그런 것을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글쓰기를 합니다. 글쓰기를 해서 버는 돈은 뭐, 그야말로 푼돈이지요. 반찬값 정도나 벌려나요? 그럼에도 반찬값이라도 벌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에 저는 무척 감사하고 있습니다. 무슨 부업을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과거에 생각하면 감개무량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돈 벌기 위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목적인 것만은 아니지요. 그렇다고 돈을 안 받겠다는 이야기는 아닌데, 돈을 안 받아도 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닌데, 이 일은 자기 표현과 노동의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표현인 동시에 노동이겠지요. 뭐 어찌 됐든,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나 감사한 일입니다.


"전 친절하긴 하지만 사교성은 좋지 않아요. 여자라서, 주부이고 엄마라서 시간을 아끼고 싶었어요. 그리고 문단을 멀리하지 않았다면 자신감을 잃어버렸을 거예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요." - 앨리스 먼로


설님. 어제 노트북에서 뭔가를 찾으려고 뒤지다가 몇 년 전에 참여한 어떤 책의 교정지를 발견했습니다. 연필에 관한 여러 작가들의 에세이집이었는데요, 저는 세 편의 글을 쓰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편은 에세이로, 한 편은 짧은 소설로 썼습니다. 책이 나온 후에는 부끄러워서 다시 읽어보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니 역시 부끄러웠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미숙했습니다.


근데 나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이런 것을 쓴 것이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잘할 리가 없다. 나에게는 문제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이야기에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빨리 빨리 내보여서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고 싶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마음으로 그런 것을 썼던 겁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치밀한 계획하에 일을 벌인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계획적이거나 이성적인 사람이 못되거든요. 그냥 그때는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의 절실한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썼던 것일 뿐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점 투성이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그렇게까지 가치 없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소심한 확신은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문제를 계속해서 끌어안고 혼자서 끙끙댄 후에 완벽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도 있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일을 해냅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끙끙대도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평생을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완벽한 것이 무엇인지, 그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저에게 문제가 있다면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겠지요.(다시는 청탁을 하지 않거나 악평을 남기거나 악플을 달거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한수희는 믿고 거르겠지요. 그러겠다는 사람 정말 있었는데…….) 어쩌면 저 자신이 나중에 그걸 다시 읽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했네’ 라고 생각하겠지요. 아무튼 해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튼 저는 그 짧은 소설을 씀으로써, 간혹 소설가들이 말하곤 하는,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을 쓸 때 더 솔직해질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에세이를 쓸 때 저는 제가 너무 밥맛처럼 보이지 않도록 적절히 수위를 조절합니다. 제 날것을 너무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남의 발가락에 낀 때까지 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쓸 때는 제 발가락의 때를 가지고 쓸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입니까. 물론 발가락의 때 같은 이야기를 읽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겠지요. 제 남편이 언젠가 계속 가래침을 뱉는 남자가 나오는 어떤 소설을 읽고난 이후부터 ‘가래침 소설’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처럼요.


아무튼 저는 제 발가락의 때를 가공해서 발가락의 때처럼 보이지 않을 이야기를 써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건 역시 잘못됐어, 라고 생각하지요.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가장 좋은 것에 대해 써보자, 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 이 궁지에서 빠져나갈지 고민하면서 보냅니다. 그리고 매일 어마어마하게 실패하고, 아주 약간 성공하지요. 그런 것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습니다.


"저는 여행을 하거나 책상에 혼자 앉아 있지 않을 때 곧 우울해집니다. 혼자 방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행복하답니다. 저는 예술이나 기예에 헌신하고 있지만, 예술이나 기예에 전념하는 것보다는 혼자 방에 있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제가 작업하는 것이 언젠가 출판될 수 있다고 믿고, 제 백일몽을 정당화하면서 이런 의식을 계속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건강을 위해 약이 필요한 것처럼, 저는 좋은 종이와 만년필을 가지고 제 책상에서 작업하는 고독한 시간이 필요해요. 저는 이런 의식에 전념하고 있지요." - 오르한 파묵


홀로 앉아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상태를 견디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도 제가 이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을 모르고, 저는 과연 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을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 따위, 완성해봤자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욕을 먹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런 불안과 비관을 가득 품은 채로 저는 이야기를 쓰고 또 씁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완성하지 않으면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완성한 사람이 되는 것과 되지 못하는 것, 그 사이에 저는 서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가급적이면 이것을 완성한 사람이 되는 쪽이 저 자신에게 유리할 거라는 걸 압니다. 어찌 됐든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저는 오로지 그것만 압니다.


"좋은 작가에게는 근본적으로 자신만의 스타일 감각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고 깊은 목소리가 있는데, 그 목소리는 초고부터 존재합니다. 작가는 최초의 원고를 손질하면서 그 자연스럽고 깊은 목소리를 계속해서 강화하고 단순화합니다." / 오에 겐자부로
"사람이 눈동자 색깔을 마음대로 가질 수 없듯이 문체도 의식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고 봐요. 문체는 자기 자신입니다. 결국 작가의 개성은 작품과 긴밀하게 연결되지요. 개성은 인간적으로 작용해야 하고요. 개성이 품위가 떨어지는 단어란 걸 알지만, 작가 개인의 인간성이나 세상을 향한 그의 말이나 몸짓은 독자와 직접 만나게 되는 등장인물에게 비슷하게 드러난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 트루먼 카포티


설님, 설님의 지난 편지를 읽고 저는 불행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컴플렉스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지요. 컴플렉스는 못 생긴 외모나 처지는 학력이나 가난한 집안 형편 같은 데서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컴플렉스가 물질적인 것이나 외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저 결핍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핍은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것이지요. 남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 사람은 그것을 끝없는 결핍이라고 느낍니다. 그것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우물 같은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설님이 이야기해주신 어린 시절의 기억에 얽힌 감정 중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그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뒤흔들었을지를, 그리고 남은 삶에 어떤 결핍의 우물을 팔지를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아아, 하고 딱한 표정을 지을 뿐이지요.


그리고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제 인생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문제는, 타인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그리고 오만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신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으로 저는 쓰고 또 씁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나에게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씁니다. 그렇게 지내온 지난 수년 동안, 저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저는 조금이라도 나아진 걸까요? 아니면 더 못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행과 싸우는 한 방법이지요."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우리에게는 언제나 이상향의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글을 쓰면서 느낀 것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한 자기 자신을, 그 목소리를 찾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녹음해서 들어본 내 목소리는 내 목소리 같지가 않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내 목소리는 이것보다는 더 괜찮았는데, 왜 이런 거지? 하고 경악하게 되지요.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내 목소리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목소리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가볍든, 무겁든, 슬프든, 즐겁든, 그저 내 목소리로 담담하게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생활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바로 그런 목소리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설님. 오늘은 목요일 저녁입니다. 저는 월요일에 쓰다만 이 편지를 손보고 있습니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구절들을 정리하고, 순서를 재배치하고, 인용문을 넣었다 뺐다 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쓰는 편지지만, 그럼에도 일관된 줄기가 있기를 바라면서 고칩니다.


월요일에 쓰기 시작한 편지를 어찌 하여 목요일에 이렇게 올리는지 이제 밝혀야 할 때가 되었네요. 아이고, 설님. 저 코로나에 걸려버렸습니다. 몸이 안 좋은데 그 증상이 오미크론 증상과 너무 비슷해서 검사를 해봤더니 단번에 양성, 처음으로 PCR 검사까지 마친 후 자가격리중입니다.


사실 이 얘기는 공식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요, 전염병에 걸린 것이 죄는 아니지만 뭐랄까, 남들이 제 걱정을 하는 상황이 언제나 어색해서요. 코로나에 걸리니까 이래저래 신기한 일들이 조금씩 벌어져서(제 마음속에서) 그 이야기를 써봐도 재미있겠다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어딘가에 올리면 분명 여러 가지 걱정 어린 덕담들이 쌓일 것 같아 주저하게 됩니다. 제가 그런 덕담을 딱히 반기지 않아서요.


저는 남이 걱정할 만한 이야기는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고 작정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아주 아주 힘든 일을 겪게 된 사람이 자신의 힘듦을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전송하는 것을 보면서 그 힘듦이 저에게까지 전해져서 같이 힘들어졌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죄책감을 느꼈지요. 만약 내가 저런 일을 겪게 된다면, 나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을까? 실시간으로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얼마나 억울한지, 내가 얼마나 아픈지 알아달라고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매달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저는 불쌍한 여자가 되기보다는 웃기는 여자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제 걱정을 하거나 조언을 하는 것이 저는 세상에서 제일 싫습니다.(그런데 그렇게 싫은 일을 저는 남에게 자주 하지요. 정신 차리라구, 이 친구야!)


아무튼 처음 양성 판정을 받았을 때는 그 유명한 짤, ‘고자라니! 내가 고자라니!’ 가 퍼뜩 떠올랐습니다. 정말이지 침대에 누워 그렇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코로나라니! 내가 코로나라니!" 그리고 생각했지요. 'ㅆㅂ ㅈㄷㄷ.'(딱히 이 고상한 편지 교환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므로 초성으로만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꿈에 그리던 자가격리를 하고 있습니다.


안방에 갇혀서 남편에게 온갖 심부름을 다 시키고, 남편이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하루 종일 방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지요. 결혼한 후 여행을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누군가를 돌보지 않아본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돌봄이 없는 방콕생활이 이런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가만히 있지 못하는 저는 방을 뒤집어서 벼르고 벼르던 정리를 하고, 쓸고 닦고, 책상에 앉아 거의 하루 종일 재택근무를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는 적은 인원으로 골수까지 빼먹는 그런 회사라(제 회사입니다…) 하려고만 하면 일이 고구마 줄기처럼 끝없이 딸려옵니다.(돈이 그렇게 딸려와야 하는데…)


그리하여 방 안에서도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쁩니다. 생각 같아선 하루 종일 쓰고 싶은 것을 실컷 쓰고, 읽고 싶은 것을 실컷 읽을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러고 있지 못합니다.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않은 이유도 있을 거예요. 해야 할 일만 한 후 쓰러져 잡니다.


심지어 내일부터는 온 가족이 자가격리에 함께 돌입할 예정이므로, 이제 성역과도 같았던 제 방문도 열릴 테고, 확진자 넷이서 한데 엉켜 하루 종일 돼지우리 같은 집에서 뒹굴댈 테지요. 그러면 돼지우리 같은 집을 참지 못하는 저는 또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밥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족들을 끌어안고 잡아당기고 발로 차고 꼬집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아무튼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렇구나, 라고 생각해 주세요. 괜찮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라는 말도 필요 없고, 아프지 않으니까 아프지 마세요, 라는 말도 필요 없으며, 방 안에만 있으니까 화이팅! 할 일도 없습니다.(괴팍한 여자…) 어찌 됐든 코로나 덕분에 저는 이렇게 저녁 무렵에도 방에 처박혀 제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틀어놓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설님. 아까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존 쿳시의 이야기가 나왔어요. 얼마 전에 <추락>을 읽어서 반가웠지요.(이 책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아무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설거지하는 물 소리 때문에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듣지는 했는데요, 대충 존 쿳시가 어릴 때 라디오를 즐겨 들었다던가 하는 그런 얘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그 라디오에서 ‘지적이고 근사한 대화’ 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는, 그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 그래요. 정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지적인 체하고 근사한 체하는 그런 대화가 아니라, 그냥 지적이고 근사한 그런 대화를 듣고 싶어요. 그리고 지적이지도, 근사하지도 않은 저는 우리의 라디오를 기다립니다.


설님, 벌써 봄이 코앞입니다! 하하.


"아침에 수동 타자기로 일을 합니다. 네 시간쯤 일한 뒤 달리기를 하러 나가지요. 그러면 한 세계를 떨쳐내고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돼요. 나무와 새들, 이슬비. 멋진 간주와 같죠. 늦은 오후에 세 시간 정도 더 일합니다. 다시 책을 위한 투명한 시간이 시작되죠. 간식을 먹거나 커피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습니다. 담배는 오래전에 끊었어요. 집은 밝고 조용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고독을 지켜줄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그다음에는 수많은 방법으로 그 고독을 허비합니다. 창밖을 바라보고, 사전에서 아무 항목이나 찾아 읽어대죠." - 돈 드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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