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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May 12. 2022

갑으로 사는 기분

박연준, <쓰는 기분>

설님.


얼마 전에 설님이 블로그에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머리가 멍하고 기력이 떨어진다고 쓰신 것을 보고 허걱! 했습니다. 저도 벌써 몇 주째 똑같은 증상을 겪고 있거든요. 눈도 침침하고 머리에 뭔가 뿌옇게 낀 것 같고 저녁이면 병 든 닭 모드가 됩니다. 자고 일어나도 어쩐지 개운치가 않아요.


나이가 들수록 몸이 새로운 날씨에 적응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이번 환절기에는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까요. 가끔씩 일주일이 넘게 떨어지지 않는 몸살감기에 걸릴 때도 있거든요. 특히 겨울에서 봄이 되고 봄에서 여름이 되기 전의 기간 동안에 말이에요.


예전에 알던 여자 중에 나이가 들어도 대학생 같은 차림과 말투이던 사람이 있었어요.  여자 언젠가 자기 나이 또래의 다른 여자를 보고 이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 여자, 나보다  나이 들어 보여.” 저는 깜짝 놀랐지요. 제가 보기에는  말을  여자가 한참은  나이 들어 보였거든요.(하지만 저도 눈치라는  있어서  말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요즘 그 여자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마음은 예전과 똑같습니다.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티셔츠를 입은 제 모습이 굉장히 어색합니다. 그러니까 테가 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요? 사진에 찍힌 제 모습을 보면 영락 없는 40대 아주머니입니다. 그러나 제 마음 속의 시계는 20대와 30대의 어딘가에 멈춰 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늙은 액션 배우가 늘어진 볼살을 출렁이며 비행기에 매달리고, 50대의 여배우가 20대나 입을 법한 미니 드레스를 입고 이마가 벗겨져 보일 정도로 머리를 꽉 틀어맨 채 사람들 앞에 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이겠지요. 그들 역시 자신의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슬픔을 (볼 때는 욕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자,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볼까요?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저는 얼마 전에 수업을 하러 갔던 수원의 작은 서점 낯설여관에서 시인 박연준의 <쓰는 기분>이라는 책을 샀습니다. 저는 작은 서점에 가면 책을 꼭 한 권은 삽니다. 가끔은 책의 종류나 수가 너무 적어서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도무지 사고 싶은 책이 없는 서점도 있어요. 그럴 때는 정말 슬프지요.


그러나 낯설여관이라는 서점에는 책이 정말 많은데다 그 종류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했습니다. 이렇게 서가를 빼곡 채울 만큼의 책을 고르고 들여놓은 주인의 마음과 노고에 경의를 표하게 될 만큼이요. 어쨌든 저는 손님으로서 기쁘게 책을 두 권 골랐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작은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일은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서점의 주인이 정성들여 고르고 배열한 책들을 구경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기도 하고요, 이런 작은 서점들이 골목마다 숨어 있는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시민으로서의 투자이기도 합니다.


책값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만오천원이고, 만오천원이면 요즘 웬만한 힙한 식당의 한 끼 값입니다. 먹고 나면 끝인 밥값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돈을 쓰면서, 책 한 권에 쓰는 돈은 왜 이렇게 아까운 걸까요. 결국 잠옷이 되어버릴 싸구려 티셔츠 한 장에는 잘만 꺼내는 카드를, 왜 책 한 권을 살 때는 그렇게 꺼내기 힘든 걸까요.


어쩌면 그건 책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경외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 지성의 보고니 하는, 생각만 해도 명치에 뭐가 얹힐 것 같은 미사여구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때문에 책이라는 것은 왠지 읽고 나면 IQ가 1 정도는 높아져야 할 것 같고, 내 마음 같지 않은 책을 읽고 나면 과도하게 분노가 솟구치고, 건질 게 없는 책을 보고 나면 본전 생각에 속이 쓰린 거겠지요.


하지만 뭐, 그냥 책이라는 걸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담백한 샌드위치 한 조각, 그럭저럭 마실 만한 커피 한 잔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억울할 일도 없지 않을까요? 그냥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대화 한번 했다고 치면요?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버리면 됩니다.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되는 물건을 대하는 마음은 부담스럽기 마련이지요. 책이라고 버려서는 안 될 까닭이 어디 있겠어요.(그러나 저도 버릴 책들을 쌓아놓기만 하고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쓰는 기분>이라는 책을 오랜만에 참 즐겁게 읽었습니다. 국밥 열 다섯 그릇, 샌드위치 스무 조각, 맛있는 커피 열 잔 이상의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습니다. 시인들은 원래 수필도 잘 쓰지만, 박연준은 원래 좋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 제게 꼭 필요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서 더 좋았습니다.


공책을 열면 어젯밤 덮어두었던 문장들이 깨어날 겁니다. 오늘의 문장을 기다리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은 더듬더듬 다음 문장을 써나가겠지요. 문장과 문장 사이를 견디며, 언어가 이미지를 실재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믿으며, 나아갈 겁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면 자꾸 하게 되고, 하다 보면 그 속엔 시가 그득해서, 당신은 시를 안 써도 시에 둘러싸이게 될 겁니다.
- <쓰는 기분> 중에서


저는 요즘 글쓰기 수업들을 연달아 하고 있어요. 이 일을 하는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워서예요. 어딜 가서 제가 이렇게 환대를 받을 수 있겠어요. 어딜 가서 이렇게 글쓰기와 독서를 진지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겠어요.


그렇다고 해서 뭐 제 글쓰기 수업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 교사로서의 자질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워요. 교사가 되기에는 제가 일단 글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든요. 자기가 어떻게 쓰는지 아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내가 어떻게 쓰는지를 알려면 글보다는 글쓰는 행위 자체에 집중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하면 저는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안 될 것 같아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는 거니까요.


게다가 내가 쓰는 방식이야 나에게 맞는 방식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또 재수없게 그런 말도 한답니다. “저는 글이 안 써져서 괴로운 적이 없어요. 아니, 자기가 쓰고 싶어서 쓰는 건데 왜 괴롭지요?” 그럼 다들 ‘뭐야…’ 하는 눈빛으로 어색하게 웃지요. 저는 요즘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니, 괴로우면 안 쓰면 되는 거 아닌가? 숙제도, 레포트도 아니고 누가 쓰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내가 쓰고 싶어서 쓰겠다고 나선 건데 왜 괴롭지?


물론 그렇다고 제게 글쓰기가 조금도 괴롭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괴로워요. 즐거운 순간만큼이나 괴로운 순간들이 많지요. 뜻대로 안 써질 때가 괴롭고, 간혹 주제를 받아서 써야 하는 원고들을 쓰다가 더는 쓸 것들이 없어서 괴로워지기도 해요.


그래도 저에게는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누구도 바라지 않지만 저 자신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너무 많은데 제가 원하는 대로, 머릿속에 그리는 대로 쓸 수 없는 것이 괴로울 뿐이에요. 제가 바라는 ‘완벽’을 향해 가기에는 아직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 괴로울 뿐이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저는 그 수업 시간에 이 책에서 발견한 구절을 읽어드렸어요. 뭔가를 쓰려고 앉아서 빈 화면을 바라볼 때마다 그 빈 화면이 자신을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지요. 저는 빈 화면이 두렵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있겠구나, 그런데 그건 어쩌면 내가 그림을 그리려고 앉았을 때 빈 스케치북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같을까?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했거든요.  


무엇이든 다 쓸 수 있어요. 당신 앞에 놓인 걸 쓰세요. 연필, 스마트폰, 구름, 커피, 어머니, 아이의 머리카락, 반려동물의 등, 스탠드, 엎지른 물.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당신이 고른 소재에서 자기만의 경험을 꺼내는 일입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당신이라면 시 속에서 전사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지요.
 아주 쉬워요. 시작은 아주 쉽게, 스웨터에서 올이 풀려나가듯 술술. 퇴고는 원하는 만큼 천천히 여러 번, 오랫동안 하면 됩니다.(아주 쉬워요, 라고 말했다고 째려보는 분이 계시군요! 흠흠.)
-<쓰는 기분> 중에서


그래요, 열심히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많이 읽고, 많이 느끼고, 느낀 것을 끄적이고, 그 마음과 그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집으로 달려가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들려줘야지, 싶어 마음이 급해지지요.


'필요한 것은 ‘말하고 싶은 욕구’다. 쓴다는 것은 말하고 싶은 욕구의 대체 행동, 능동적인 말하기다.’ 라는 시인의 말처럼, 저에게는 항상 말하고 싶은 욕구가 넘칩니다.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르지요. 그러나 말하고 싶은 욕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연습’입니다. 연습을 통해 말하고 싶은 사람은 작가가 되어가는 거지요.


등단을 꿈꾸는 사람들이 읽는 양에 비해 습작 양이 현저히 적은 걸 볼 때가 있는데요. 안타깝습니다. 시를 쓰기 위해 온갖 시집을 섭렵해 읽는 것만큼 중요한 건 반복해서 창작하고 퇴고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언어를 세우는 일입니다. 많이 써봐야 자기 소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연습을 통해서만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습니다. 글은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을 표현해낸 결과물이지요. 문장을 쌓고 지우고 다시 쌓으며 한 편의 시를 완성해낼 때 일어나는 과정은 상당히 복잡한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시인의 색과 결을 결정합니다. 절대적인 연습 시간을 확보하지 않고 좋은 시인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쓰는 기분> 중에서


그러게요. 제가 텅 빈 스케치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림을 보고, 생각하고, 구상하고, 실제로 그려보는 연습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나 글쓰기에서만큼은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이미 어마어마한 연습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잡지사에서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엄청나게 다양한 주제의 글을 (울면서) 써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컴퓨터 화면 위의 흰 공백이 별로 두려워지지 않아져 버린 겁니다. 아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셀 수 없이 많은 빈 스케치북들을 채우고 버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은 두려움 없이 연필을 들고 붓을 칠할 수 있는 거겠지요?


저는 에세이집을 내는 데 적어도 10년 정도의 연습 기간을 거친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잘 쓰지는 못하지만, 더 잘 쓰려고, 아니 더 제대로 쓰려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의 결과물을 내보려고, 그리고 더 깊어지려고, 깊으면서도 가벼워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잘하는 걸 또 하는 것이 아니라 전과는 다른 것을 해보려고 언제나 노력하고 있어요.


“준. 소설을 쓰는데 처음으로 이런 감정을 느꼈어요. 인생, 갑으로 사는 기분?”

바로 그거다. 인생을 을이 아니라 갑으로 사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내 삶을 내 뜻대로 지휘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우리는 무언가에 몰두한다. 작은 것일지라도, 능동적으로 몰두하는 창작 행위에는 인생을 손으로 쥐고 가는 자의 기쁨이 밴다.
-<쓰는 기분> 중에서


요즘 저는 제가 자주 쓰던 스타일이 아닌 글, 그러니까 소설을 쓰고 있어요. 정말 힘든데, 정말 즐거워요. 이 나이에도 무언가에 계속해서 부딪히고 깨질 수 있다는 사실 말이에요. 아 이건 이렇게 쓰면 되는 거구나, 아 이건 이렇게 쓰면 안 되겠네, 하고 느끼는 일들이 즐겁습니다.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생, 갑으로 사는 기분이 여기에 있는 거겠지요.


제가 지금 짬짬이(그야말로 짬짬이) 쓰고 있는 소설을 읽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도 꽤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요.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으려고요. 저는, 40대 중반의 저는, 회사에 나가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저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쓰고 또 쓰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제가 을이 아니라 절대갑인, 그 어느 것보다 즐겁고 가치 있는 그 세계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것이 저의 '쓰는 기분'이랍니다. 아마 설님도 그러하시겠지요?  


그러니까 시를 쓰는 삶은 이런 거예요. 달을 (단순히) 달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슬픔을 (단순히) 슬픔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

시를 쓴다면 사과 님은 매일 새로운 세계에서 처음 떠오르는 별을 발굴하며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재미있는 일이랍니다. 비록 대가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지만요. 시를 쓰는 일은 기분이 전부인 일, 기분이 다인 일입니다.
-<쓰는 기분> 중에서



2022년 5월 12일

성실한 절대갑, 수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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