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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May 29. 2022

지지 않는 다이어트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설님께


안녕하세요, 설님. 편지가 늦었습니다. 시간이 너무 없어 분신술이라도 하고 싶은 날들입니다. 그래도 남들에게 바쁘다는 이야기를 좀 안 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뭐, 바쁜 게 자랑 같은 세상이잖아요. 그저 한가롭게, 별 일 없이 산다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성격이 삐딱해서 그렇습니다. 사실 회사에 안 다니면 이렇게 바쁘지는 않을 텐데요, 제 소중한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거기에 자식까지 둘이니… 아니, 이건 자랑인가, 아닌가. 어렵습니다. 세상살이라는 것은요. 저는 자랑이 싫습니다. 그렇다고 자랑을 안 하는 건 아닌데… 아무튼 싫어요.


요즘은 매일 초조한 기분으로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아 어젯밤엔 겨드랑이에 머리카락이 자라는 꿈을 꿨습니다. 오랫동안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았는데 아주 직모로 쭉 뻗은 겨드랑이 털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더라고요. 꿈에서도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내 겨드랑이 털만 이렇게 길게 자라지? 원래 이런 건가? 가만 보자, 내 남편 겨드랑이 털은 한 줌 길이 밖에 안 되는데? 왜 나만 이래? 왜 나만! 이걸 커트를 해야 하나, 파마를 해야 하나, 아니면 땋아야 하나, 하고 절규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저는 겨드랑이 털이 거의 없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또 자랑이네요. 오늘은 일정과 일정 사이에 황금 같은 짬을 내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니 또 바쁘다며 자랑을 하고 있잖아.


설님의 지난 편지에서 몸에 대한 이야기를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특히 다이어트에 관해서 말이에요. 다이어트는 저에게도 큰 화두입니다. 사춘기 이후로 다이어트가 필요하지 않았던 때가 과연 있었나 싶어요. 원래 날씬했던 엄마는 항상 제 몸에 관심이 많았지요. 제가 날씬할 때는 칭찬을 하고, 살이 쪘을 때는 잔소리까지는 아니지만 조언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쩐지 늘 제 몸이 뭔가 아주 괜찮거나 아니면 아주 나쁘다고 여기며 자랐지요. 이상하게도 요즘 엄마는 어쩐 일인지 제 외모에 대해 칭찬도 비난도 하지 않아요. 다 포기한 건가? 아니면 어디서, 어쩌면 TV의 오은영 박사님한테서 자식의 외모에 대해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뒤늦게 들은 건가? 다 자라서 엄마와 따로 살게 된 후에도 저는 엄마를 만날 때마다 제 외모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무진장 신경이 쓰였습니다.


저는 요즘도 다이어트에 대해 비장할 정도로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가 하루 종일 하는 생각의 70% 정도는 몸무게와 다이어트와 살인지도 모릅니다. 이럴 수가. 제 부족한 뇌를 다른 것을 생각하는 데 썼더라면 이 모양 이 꼴로 살지는 않을 텐데. 역시 멍청한 인간은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저는 한탄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선 가장 먼저 체중계에 오릅니다. 뭘 안 먹어야 조금이라도 무게가 내려갈 테니까 그렇게 합니다. 속옷 빼고는 옷도 다 벗습니다. 500 그램이라도 줄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싱 헤비급 챔피언 대회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저는 그렇게 합니다. 매일 아침 절망하고, 아주 가끔 기뻐합니다. 어젯밤에 분명 밥을 배부르게 먹고 맥주를 마시고 과자까지 한 봉지 다 해치워놓고는 기적처럼 살이 빠지기를 기대합니다. 파렴치한 인간입니다.  


나이가 드니 평균 몸무게가 야금 야금 늘어갑니다. 지금 저는 결혼 전, 20대 때보다 5kg 정도 무게가 늘어난 상태입니다. 결혼 전에도 마르지 않은 평균 몸무게였기 때문에 큰일입니다. 아직은 비만이 아니지만(아주 관대한 비만지수에 따르자면) 조금만 방심하면 비만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아무래도 이 무게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무거운 나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제 모습이 아니라고, 이것은 저의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무게는 좀 더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 무게에 있어본 것이 도대체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쳤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그렇게?) 많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라면 저는 당당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30대 초반까지도 저는 푸드 파이터처럼 음식을 쓸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먹고 또 먹어도 배가 자꾸 고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새 모이 정도나 먹고 사나…(새우깡을 갈취하는 월미도 갈매기를 떠올려 주세요) 싶습니다. 그런데 살이 찝니다. 저녁을 먹으면 반드시 살이 찝니다. 맥주라도 한 잔 하면 더 찝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녁을 굶고 맥주도 한 잔 안 마시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억울합니다. 원통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살을 빼겠다는, 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날씬해져서 뱃살 걱정 없이 배바지를 입어보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팔뚝과 허리의 군살을 대패로 민듯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허벅지의 살들을 반쯤 덜어내고 싶습니다.(이 생각을 하면 언제나 어릴 때 읽은 <베니스의 상인>이 떠오릅니다. 이런, 썰어야 하나…)


얼마 전에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다시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마음을 향해 와락 달려드는,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저는 미국인들 특유의 과잉된 자의식이 부담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이 사람의 이야기하는 기술에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버리고 맙니다. 뭐랄까요, 이 여자를 실제로 알게 된다면 별로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절대로 친해질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여자의 매력만큼은 인정하게 되는 그런 느낌입니다. 책을 읽다가 다이어트와 거식증에 대한 이런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전형적인 좋은 날은 이렇게 시작했다. 나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출근길에 참깨 베이글, 커피, <프로비던스 저널-불러틴>을 샀다. 나는 늘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한 시간 반 전인 7시까지 출근했다. 책상에 보관해둔 플라스틱 접시에 베이글을 담았다. 그것이 보석이라도 되는 양. 그다음 신문을 첫 장부터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러면서 베이글을 먹었는데, 꼭 수술을 집도하는 것처럼 계획적으로 또한 집중하여 먹었다. 그 한 시간 반은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혼자일 수 있었고, 의식은 완벽하고 정확했다. 나는 신문 지면에 맞춰서 베이글을 작디작은 조각으로 뜯어 먹었다. 사설란에서 사설 한 편마다 한 입, 만화면에서 한 입, 하는 식으로 베이글이 다 사라질 때까지 먹었다. 그다음에는 빵에서 접시로 떨어진 참깨들을 검지로 찍어서 마저 싹 먹었다. 이것은 내게 익숙한 패턴이 되었고, 그 익숙함이 큰 위안이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내가 이 버릇을 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끊고 싶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캐럴라인 냅은 한때 신경성 식욕부진을 겪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고-음식과 내 몸무게만 중요했다- 이것들을 통제하는 일이 다른 모든 일을 밀어냈다.’ 그는 하루 종일 베이글과 요구르트와 사과 1알, 큐브 치즈만을 먹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사는 아파트에서도 음식 때문에 고립되기를 자처했습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친구들이 집에 없기를 바랐고(그래야 저녁을 굶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으니까), 친구들이 요리를 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들이 웃으며 맥주라도 마시고 있으면 그것을 너무나 부러워 하면서도 그 욕구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달리러 나갑니다. 비참한 기분에 빠진 채로요. 그럼에도 이런 중독, 그러니까 먹는 것을 참는,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좋은 날은 ‘오목한날이었다. 엉덩뼈가 골반 양쪽에서 3센티미터쯤 튀어나왔고, 손바닥으로 배를 쓸면 오목한 굴곡이 느껴졌다. 숨을 깊게 마시고 배를 홀쪽하게 당기면 갈비뼈가 낱낱이 드러났다. 그걸 확인하면 엄청나게 안심이 되었다.
나는 밤에 저녁을 먹기 전에 목욕을 하곤 했다. 물에 몸을 담그고  다리와 팔과 어깨를 점검했다.  손을 모아 허벅지  윗부분을 잡아보고 엄지와 검지가 닿는  확인했다. 가슴에 튀어나온 뼈들을 손가락으로 쓸었고, 빗장뼈에 검지를 얹고 양옆으로 따라가서 어깨 피부 밑으로 이어진 지점까지 확인했다.
내가 ‘말랐다거나 ‘뚱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날에는 그냥  몸이 각지게 느껴졌다. 배가 홀쪽해지면서 욱신거리더라도,  날카롭고 각진 느낌은 위안이었다. 그것은 내가 해냈다는 뜻이었다. 내가 이겼다는 뜻이었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지금껏 그렇게나 생각하고, 노력하고, 몰두했던 일, 그러니까 제 기나긴 다이어트의 역사와 그 결과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아침마다 눈을 뜨면 몸무게를 재고 있습니만, 그 결과는 고작 1~2kg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변화 뿐입니다. 심지어 매일 체중을 재는 행위 때문도 아닙니다. 이유는 호르몬, 밥 먹을 시간이 없거나 한가하거나, 드물게 식욕이 없거나 이상할 정도로 식욕이 솟구치거나, 아니면 계절적인 요인 같은 것들입니다. 게다가 매일 아침 몸무게를 재면 그 숫자들에 하루 종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아침부터 기분이 나쁘거나 큰일났다는 생각이 들 때가 대부분이고, 아주 가끔, 아아아주 가끔 기분이 좋지요.


아침에 몸무게를 재지 않는다고 해서, 살을 빼지 않는다고 해서 대체 큰일 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그래봤자 1~2kg입니다. 10kg가 아니라요. 그리고 제가 저녁을 굶고, 탄수화물을 제한하고, 미친 듯이 운동을 해서 살을 뺀다한들 그걸로 대체 뭘 증명할 수 있을까요? 비키니를 입고 해변을 활보하며 ‘우와 저기 날씬한 아주머니가 있네’ 하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겁니까? 날씬한 아주머니가 되어 사람들의 추앙이라도 받고 싶은 겁니까? 뭐야, 날씬하다고 누가 날 추앙할 거라고 믿는 것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닙니까?


다이어트의 목적은 자기 몸에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그 만족이라는 것이 밥을 굶고, 무언가를 철저히 제한하고, 육체를 가혹할 정도로 혹사해서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만족은 일종의 학대의 결과가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제 다이어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캐럴라인 냅의 ‘내가 이겼다’는 말의 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 마음을 압니다.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매번 지기만 할 때, 이길 수 있는 대상이 고작해야 자기 몸뚱이 하나뿐인 마음을요. 내 몸 하나 내 뜻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의 그 무력함이란! 그러나 이제 저는 압니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며, 사실은 몸이 정신을 조종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을요. 몸이 건강하지 않을 때 정신은 쉽게 병들 수 있다는 것을요.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요. 물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도 맑고 바른 정신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요. 정신과 몸은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대립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신과 몸은 함께이며, 하나입니다.


굶으면 또 내가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좋은 날에는-내 식단을 고수하는 날에는- 퇴근할 때 식료품 가게와 식당이 즐비한 거리를 걸어서 오면서 내 의지를 시험했다. 고급 식료품 가게, 던킨 도너츠, 과자 가게, 노천카페, 빵집을 지나쳤다. 도넛에 발린 달콤한 시럽 냄새를 맡았다. 프렌치프라이, 데리야키 치킨윙, 홈메이드 귀리빵 냄새를 맡았다. 그러면 내가 대단한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저 많은 음식들 속에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강렬한 식욕을 참을 수 있다니. 나는 강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이었다.
좋은 날에는 또 내가 우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길에서 사람들을 보면서-식료품 봉지를 든 사람들, 카페에서 먹고 있는 연인들-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그들은 식욕에 굴복했지만 나는 그것을 초월했고, 그들은 충동에 굴복했지만 나는 그것을 정복했다. 나 자신이 사실상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느끼던 시기에, 굶기는 내가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설님. 제가 다이어트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비만과의 경계에 1~2kg 앞에 있습니다만, 그 거리를 5kg 정도로 늘리고 싶은 것이 제 소망입니다. 날씬하고 가벼운 몸으로 살고 싶습니다. 성인병의 주범 뱃살과 작별하고 싶습니다. 탄탄한 팔뚝과 허벅지를 갖고 싶습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대가가 밤새 주린 배를 끌어안고 꼬르륵 소리에 장단을 맞춰 음식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슬프고 억울한 마음으로 잠드는 것이라면, 싫습니다. 아직까지 제 모든 수치는 정상입니다. 허리 둘레도 정상, 근육량은 오히려 평균보다 높습니다. 저는 건강합니다. 제 몸은 건강합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저는 다시 젊어질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 몸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납작했던 배를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러려면 저녁도 굶고 맥주도 포기해야 합니다. 저는 이제 적당히 군살이 붙은 아주머니, 어머니의 역할에 만족해야 할 겁니다. 그게 제게 주어진 역할입니다. 제가 제 딸보다 날씬해지려 노력하는 것이, 제게는 꼴사납습니다. 그냥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들이야 어떻든 저는 그렇습니다.


다만 먹는 양이 야금야금 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충분히 몸을 움직여 지금의 근육량을 유지해야겠습니다. 체조를 열심히 해서 근력을 키워 아픈 데가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음식을 너무 급하게 먹지 않고, 천천히 음미해야겠습니다. 몸에 좋은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겠습니다. 날씬해지려 애쓰기보다 너무 뚱뚱해지지만 않으려고 해야겠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야겠습니다. 활기차게 살아야겠습니다. 좋은 자세를 유지해야겠습니다.


이제 저는 죄책감 없이 저녁을 먹습니다. 다만 밥이나 탄수화물류를 너무 많이 먹지 않으려 주의합니다. 가끔은 순두부를 넣은 계란국으로 밥을 대신하기도 합니다. 맛있는데다 포만감도 있고 속도 편해서 좋습니다. 맥주는 속이 쓰려 좋지 않으니 정말 마시고 싶을 때만 마시려 합니다. 저녁에 뭘 자꾸 먹고 싶은 이유는 하루의 긴장을 풀고 싶어서입니다. 너무 늦게 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녁을 충분히 먹고 대신 운동이나 산책으로 긴장을 풀어보려 합니다. 잠도 일찍 자려 합니다. 그럼에도 일주일에 두어 번은 맥주를 마시며 즐거운 밤을 보내려 합니다.


한 번뿐인 삶을 저 자신을 들들 볶으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절대로 날씬해질 수 없는 지금의 나라 해도, 몸매가 무너진 아주머니의 형태라 해도, 받아들이겠습니다. 몇 달 전에 만난 친구가 전보다 부쩍 살이 쪄서는 배를 두드리며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내가 좋아. 뚱뚱한 내가 좋아.” 저도 그 친구의 유쾌함을 배워야겠습니다. 여전히 배워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2021년 5월 28일

육중한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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