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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Nov 22. 2022

뉴스를 보지 않아도 괜찮습니까?

김영민,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안녕하세요, 설님.


창밖으로 가을이 한가득입니다. 기분이 묘한 요즈음이에요. 이런 것을 가을 탄다고 해야 하나요. 중년의 가을은 참으로, 복잡미묘합니다.


어제는 3 가지의 망설이던 일들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망설이는 일은 십중팔구로, 해버리는 것 같아요. 하기 싫은 것들은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이 3가지의 제안은 모두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괜히 했다가 후회하지 않을까? 싶은 일들이었어요. 맞아요, 분명히 후회하겠지요. 그러나 후회하면서 배우는 것들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실패가 없이는 나아질 수 없으니까요.


설님의 지난 편지를 읽고 저도 좀 생각을 해봤습니다. 자식에게 자유를 주는 부모와 자식에게 무관심한 부모의 차이에 대해서요. 무조건적인 자유는 어떤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혼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이해합니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따라 적당히 울타리를 쳐놓고 점점 그 울타리의 크기를 넓혀가야 한다는 것을, 아이들을 키우며 깨달았어요. 그리고 제 느낌에 그 울타리라는 것은 전기가 흐르거나 가시가 달린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원한다면 뛰어넘을 수 있는 나지막한, 나무로 만든 흰색 울타리일 것 같아요.


청소년기가 된 제 아이들은 그 울타리를 뛰어넘을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습니다. 딸은 요즘 하숙하는 학생 정도의 분위기로 살아가고 있고, 아들은 어제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엄마, 내 공부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마. 내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얼씨구.) 그래서 저는 요즘 그 울타리를 더 크게 벌리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지요.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키운다는 일은, 정말 쉽지 않아요.


수년 전에 저는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할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는 제게 적극적으로 다가왔지만, 저에게 그 사람은 어쩐지 미심쩍은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그 사람을 결정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은 그가 ‘우리 부모님이 조금만 더 나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나도 지금보다 더 잘 되었을 텐데’ 라고 말했을 때였어요. 아아, 나는 이런 사람과는 잘 지낼 수 없다, 고 저는 (경솔하게) 생각했지요.


그 말 자체가 뭐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래도 저는 그렇게 믿으며 사는 사람과 기본적으로 잘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비록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저는 지금의 나와 앞으로의 나를 생각하는 사람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은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은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어떻게든 잘 살아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을 더 좋아해요. 그리고 저는 타인의 힘으로 밀어붙임을 당해서 뭔가를 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기도 합니다. 뭐, 편견이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어제 저녁에는 김영민의 책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를 마저 읽었습니다. 설님, 이 책 읽어보셨어요? 산 지는 꽤 오래 되었는데 중간까지 읽다가 채 못 읽은 책이에요.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고, 이래저래 읽을 책도 많고 할 일도 많고(인스타그램…) 어찌저찌 하다 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역시 재미있더군요. 똑똑한 사람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말하는 것일 테지, 나는 이렇게 멍청한 머리로 이렇게 먹고 살고 있으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난번 편지에도 썼지만 요즘 저는 뉴스를 열심히 봅니다. 왜 이렇게 열심히 보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박근혜가 탄핵될 때에도 정치에 별 관심이 없던 저였는데(부끄럽습니다) 요즘은 매일 뉴스를 보며 혈압이 솟구치는 것을 보면, 저는 정말로 나이가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이제야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 정치에 관한 아주 훌륭하고, 흥미로운 글이 있습니다. 전문이 다 멋진데 일부만 옮겨봅니다.


정치가 어디 있냐고? 어느  눈을 떠보니  세상에 태어나 있고, 태어난 바에야 올바르게 살고 싶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노력해보지만 혼자 힘으로   있는 것은 없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니 합의가 필요하고, 합의하려니 서로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합의했는데도 합의는 지켜지지 않고, 합의 이행을 위해 규제가 필요하고, 규제를 실천하려니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 남용을 막으려니 자유가 필요하고, 자유를 보장하려니 재산이 필요하고, 재산을 마련하니 빈부격차가 생기고, 빈부격차를 없애자니 자원이 필요하고, 개혁을 감행하자니 설득이 필요하고, 설득하자니 토론이 필요하고, 토론하자니 논리가 필요하고, 납득시키려니 수사학이 필요하고, 논리와 수사학을 익히려니 학교가 필요하고, 학교를 유지하려니 사람을 고용해야 하고, 일터의 사람은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하다 죽지 않으려면 인간다운 환경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자연재해가 일어나거나 전염병이 돌거나 외국이 침략할 수도 있다. 공동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많고 쉬운 일은 없다.  모든 것을  말하기가 너무 기니까, 싸잡아 간단히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는 서울에도 지방에도 국내에도 국외에도 거리에도  안에도 당신의 가느다란 모세혈관에도 있다. 체지방처럼 어디에나 있다, 정치라는 것은.


제 눈에 저 대통령 내외는, 외모부터 행적까지 한국 사회의 뒤틀린 욕망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결정체 같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되기 위해 다들 그렇게 불철주야 노력하며 살고 있나, 하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딱 좋은 견본품들이지요. 그리하여 이 소시민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 가봤자 결국 소고기나 사먹겠지, 소고기 열심히 먹다가 혈관에 기름이 끼고 뱃살을 뒤룩대다가 골로 가겠지, 하는 비관에 젖어듭니다. 그리고 저런 사람들이 TV만 틀면 나온다는 것이 요즘 저의 스트레스입니다. 네, 그럼 안 보면 되지요.


그런데, 정말 안 보면 되는 것입니까?


정치는 권력욕을 주체못하는 중늙은이들에게 맡겨놓은 채 애착 인형을 끼고 그저 숨이나 쉬고 있기란 얼마나 편한 일인가. 짙어진 풀냄새를 맡으면서 아무도 없는 산책길을 고적하게 걷는 일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조용히 은거하면서 자기 삶의 안위와 쾌락만 도모하다가 일생을 마치는 일은 얼마나 유혹적인가. 그러나 폴리스 시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던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초탈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으로 간주한다.”


아이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2022년 11월

화가 많은 수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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