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키지 어시장 - 긴자 - 카구라자카
2018. 2. 9.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술을 많이 마신 날이나 너무 피곤했던 날이면 오히려 나를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워버리는 나의 몹쓸 생체시계 탓에 어젯밤 극심한 피곤과 취기로 잠든 기억도 없이 잠들어 버렸던 나는 기대했던 시간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떠버렸다. 더군다나 어제의 격렬했던 잼 세션 탓인지, 연말 콘서트가 끝나고 거의 한 달을 눕고 먹는대만 사용한 비루한 몸뚱이 탓인지 아침부터 부쩍 저릿한 왼팔을 허공을 향해 쭉 뻗었다가 바닥에 내려놓고는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비교적 덜 아픈 목 근육을 힘겹게 움직여 간신히 고개를 돌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오늘은 드디어 집시 재즈 기타리스트 데니스 창(Dennis Chang)이 게스트로 참여하는 집시 재즈 잼 세션이 있는 날이었다. 주변은 아직 해가 다 뜨지도 않아 거뭇거뭇한데 벌써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는 부지런한 여행객들을 따라 나도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기타리스트 Dennis Chang은 대만계 캐나다인으로 최근 아시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집시 페스티벌인 Taipei Gypsy Jazz Festival의 주축이자, 유명한 유튜브 집시 재즈 교육 채널 DC Music School의 주인이기도 하다. 사실 누가 봐도 대만인 같은 외모의 (실제로 부모님들은 모두 대만인이라고 한다.) 이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프로페셔널 기타 연주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들과의 친목과 집시 재즈에 대한 대단한 열정만큼이나 그를 따라다니는 소문도 많았지만 적어도 두말할 것 없이 최근 집시 재즈 씬에서 가장 주목받는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임에 분명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집시 음악을 하고 있는, 또 제대로 배우고 싶어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 당시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그의 공연이 저녁시간쯤이었고 공연하는 장소가 숙소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집시 재즈 공연의 특성상 공연이 끝나면 분명히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잼 세션을 대비해서라도 오늘은 가볍게 여행을 즐기고 일찍 숙소로 돌아와서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잠시라도 쉬고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준비된 숙소의 조식을 먹으며 어디를 가볼까 느긋하게 검색을 하다 보니 전부터 가보고 싶던 츠키지 어시장(築地市場)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더 자세히 검색을 해보니 <츠키지 어시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새벽에 가는 것을 추천한다. 오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추>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 시간은 아마 오전 9시경. 나의 느긋했던 아침이 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츠키지 어시장(築地市場)
지금은 도쿄 올림픽을 이유로 장내 시장(경매, 도매를 하는 곳)은 다른 곳으로 이전해 버린 츠키지 어시장이지만 과거 도쿄의 부엌이라고도 불리던 츠키지 어시장은 명실 공히 도쿄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관광명소로 유명했다. 특이하게도 이런 대형 재래시장이 도쿄의 주요 번화가인 긴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지 새벽 경매 시장은 이전하고 없는 지금의 츠키지 어시장이라지만 소매상들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어 아직까지도 도쿄를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략 오전 11시, 다소 늦은 오전 시간에 도착했던 츠키지 어시장에는 다행히 관광객이 많지는 않았다. 츠키지 역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장 중심부로 향하는 골목을 따라 해산물을 판매하는 크고 작은 가게와 즉석식품 매대, 식당들이 즐비해있는 츠키지 어시장은 사실 소매상들의 규모나 즐길거리만 놓고 봤을 때 일본 전역의 많은 어시장들과 비교해 대단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유명한 긴자 지역과 접해있기 때문에 혹시 긴자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가능하다면 관광객이 적은 오전 중에 시간을 내어 한번쯤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긴자(銀座)
'은화를 만드는 거리'라는 뜻을 가진 긴자는 일본에서도 가장 비싼 거리, 상류층의 거리라는 이미지가 강한 도쿄의 주요 번화가로 수많은 기업과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으며 유명한 고급 식당들도 많은 곳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야마하(YAMAHA)나 파나소닉 같은 악기, 전자제품 브랜드뿐만 아니라 유니클로, GU 같은 중저가 SPA 브랜드를 비롯해 샤넬, 디올 등의 명품 브랜드 등 다양한 제품군의 브랜드들의 도쿄에서 가장 큰 쇼룸들이 대부분 긴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별히 좋아하는 브랜드가 있다면 한 번쯤은 일부러라도 찾아가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명품관들과 유명 브랜드 매장들 사이로 100년 전통의 특색 있는 가게들도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는 긴자는 다양한 여행자들의 취향을 대부분 만족시킬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쇼핑을 썩 즐기지 않는 편인 내가 긴자에 온 이유는 유니크한 발색의 물감으로 특히 유명한 100년 전통의 화방 겟코소(月光荘画材店)의 본점이 긴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겟코소(月光荘画材店)
한때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지만 한참이나 그림을 놓고 지냈던 내가 화방 겟코소를 알게 된 까닭은 당시 내 작업실을 오가던 그림 그리는 친구 덕분이었다. 여느 때처럼 작업실을 오가던 그 친구는 나의 도쿄 여행 준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도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며 겟코소라는 흥미로운 곳을 알려주었다. 좋은 정보의 대가로 겟코소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그가 원하는 색깔의 물감을 사다 주기로 약속한 나는 길게 늘어진 긴자의 명품관들 사이로 빨간 벽돌의 오래되어 보이는 건물에서 100년 전통의 화방 겟코소(月光荘画材店)의 간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겟코소에서는 일반 미술 용품 판매뿐만 아니라 겟코소 만의 굿즈를 판매하기도 하며, 내부에서 작은 전시를 열기도 하기 때문에 꼭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긴자에 갈 일이 있다면 한 번쯤은 들러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Café de l'Ambre (カフェ・ド・ランブル)
한참 동안 츠키지 시장과 긴자를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나는 좋아하는 커피도 마시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깐 휴식도 취할 겸 가볼만한 카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검색 실력이 형편없었던 탓인지 도쿄 내의 다른 지역들에 비해 긴자 지역은 커피 애호가 입장에서 눈에 띄는 카페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긴자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던 카페, 10년 이상 숙성한 올드빈을 융드립 방식으로 추출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Café de l'Ambre(カフェ・ド・ランブル)에 가보기로 했다.
이곳은 커피 애호가에게 있어서는 오랜 전통만큼이나 실력 있는 바리스타가 직접 내린 융드립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최고의 매력인 카페이지만 당신이 꼭 커피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1948년에 오픈하여 긴자의 역사와 함께한 유서 깊은 카페 Café de l'Ambre는 70년 전의 인테리어와 그 당시 만들어진 커피 용품들이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은 묘한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일본 카페의 특성상 좁은 매장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담배 연기와 가게 곳곳에 베인 냄새가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점들에 예민하지 않은 편이라면 이곳은 긴자에 갈 일이 있다면 꼭 한번 가볼만한 좋은 카페라고 생각한다.
Jazz Manouche Session @U-ma Kagurazaka
이른 아침부터 가볍게 도쿄 여행을 즐긴 나는 해가 지기 전 숙소로 돌아와서 가벼운 식사와 휴식을 취하고 기타리스트 데니스 창(Dennis Chang)이 게스트로 참여하는 Jazz Manouche Session(집시 재즈 세션)을 관람하기 위해 숙소에서 도보로 5분이면 도착하는 카구라자카의 재즈 클럽 우마 카구라자카(U-ma Kagurazaka)로 향했다. 나는 난생처음 집시 재즈 공연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과 많은 도쿄의 재즈 연주자들이 공연을 찾아와 잼 세션을 즐길 거란 생각에 출발 전부터 이미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날 공연을 기획한 베이시스트 쿠미코 이마큐레(今給黎久美子)와 이후 한국에도 방문해서 필자와 함께 공연과 잼 세션을 즐기기도 했던 다이키 야마모토(山本大暉) 두 사람은 데니스 창의 제자들이자 일본 안팎으로 집시 재즈 관련 공연이나 행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또 진행하려 노력하는 일본 집시 재즈 씬의 젊은 주요 인물들이다. 아마도 2월 10일 예정된 워크숍 이전에 가볍게 공연과 잼 세션을 진행하고자 급조된 느낌이 역력한 이 공연 덕분에 나는 예정보다 하루 먼저 프로 연주자들의 집시 재즈 공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일본의 많고 많은 재즈 클럽 중에서도 작은 편에 속하는 U-ma Kagurazaka에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맨 뒤쪽에 서서 공연을 관람해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와있었다. 제 아무리 일본 최대의 도시 도쿄라고는 하지만 이런 해외 유명 연주자의 공연, 특히나 집시 재즈 공연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인듯했다. 아무래도 이날 공연의 타이틀이 Jazz Manouche Session(집시 재즈 세션)이라서 그랬던 것이었겠지만 그들 대부분의 옆에 다소곳이 놓여있는 악기들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이 잼 세션을 위해 찾아온 연주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날의 세션은 호스트 연주자인 쿠미코와 다이키, 그리고 데니스 창. 세명의 연주자들이 먼저 네 곡 정도의 짧은 공연을 하고 나서 찾아온 연주자들이 번갈아가며 잼 세션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참여한 연주자 대부분이 기타리스트였지만 간간히 바이올린, 아코디언, 심지어 우쿨렐레로 집시 재즈를 연주하는 연주자도 있었다.
난생처음 집시 재즈 세션을 관람하고, 또 참여하면서 대단한 테크닉을 지닌 호스트 연주자들의 실력에 놀랐고 또 생각보다 악기를 부드럽게 연주한다는 것에 놀랐다. 집시 재즈 하면 특히 기타리스트는 음향 장비 없이도 두꺼운 피크를 사용해 무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볼륨으로 연주할 것이라고 상상해 왔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기타리스트 데니스 창은 대단히 부드럽게 기타를 연주했다.
또 일반적으로 REAL BOOK이라는 레퍼토리 북을 외워서 잼 세션을 즐기는 전통 재즈 씬의 연주자들과는 달리 집시 재즈 연주자들의 레퍼토리는 대부분 DJANGO FAKEBOOK의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레퍼토리가 내가 모르는 장고 라인하르트의 오리지널 곡들이었고 간간히 아는 곡들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외우고 있는 코드 진행과 조금씩 다른 경우가 많았다. 한 시간여 잼 세션을 참여하고 또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스스로 집시 재즈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찾아오는 사람 대부분이 프로 뮤지션을 꿈꾸는 음악 전공자들인 한국의 잼 세션 분위기와는 다르게 이날 도쿄에서 열린 집시 재즈 세션에서는 한눈에 봐도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많았다. 아마도 뮤지션을 꿈꾸는 학생들 대부분이 대학을 진학하여 음악을 배우고 학위를 취득하는 한국과는 달리 직장 생활을 병행하며 취미로 음악을 하더라도 꽤 진지하게 임하는 분들이 많은 일본의 문화적인 분위기가 잘 투영된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연주자로서 음악에 대한 깊이가 있고 없고는 상대방의 연주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가?, 음악 전체의 조화를 위해 노력하는가? 와 같은 앙상블의 수준에서 잘 드러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음악 전공자가 아닌 연주자들이 많은 집시 재즈 씬에서는 그런 전공자가 아닌 연주자들이 가진 약점들이 여실 없이 드러나기도 했다. 대부분 카피한 라인을 연주하는데 몰두하거나 뭔가 대단한 테크닉을 보여주려 시도하다가 앙상블을 놓치는 연주자들이 많았다. 물론 솔리스트로서의 기량을 서로 뽐내듯 연주하는 집시 재즈의 겉모습도 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결국, 어떤 장르의 음악을 하건 앙상블 전체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다. 물론 배울 곳도 없고 씬도 협소한 집시 재즈 음악을 이렇게라도 즐기고, 배우려 노력한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국의 재즈 연주자들과는 달리 일본에서 활동 중인 재즈 연주자들은 대부분 투잡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다른 나라에 비해 레슨의 수요가 많은 한국에서 프로 뮤지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비교적 어렵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의 코로나 시대 이후로는 점점 음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필자 역시도 앞으로 어떻게 음악과 생계를 병행할 수 있을지 계속해서 모색해야만 하는 이 시대의 뮤지션 중 하나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음악을 즐겁게 즐긴다.'
라는 뮤지션으로서 나의 소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투잡 뮤지션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소수의 음악을 행복하게 즐기던 이날의 뮤지션들을 기억하며 다시 한번 나의 소신을 잃지 않고 음악가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작은 힘을 얻는다. 모두 오래오래 즐겁게 음악 하며 꼭 다시 만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