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뻤다.
가느다란 허리에 단아한 모습이 청초해 보였다. 술, 담배, 거침없는 말은 할 줄 몰랐다. 한 송이 카라 같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단단해 보였다. 학부모와 교사(그녀가 교사) 사이였지만 아이들과 길게 떠나는 여행길에 갑자기 이모라고 부르고 싶다며 운을 띄운 그녀였다.
모처럼 순두부를 한 그릇 씩 놓고 마주 앉았다.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해요?"
13개월 뒤면 곧 서른이다.
엄마는 내게 시집 안 갈 거면 절에 들어가라고 엄포를 놓으셨다. 무서울 것도 없는 말이었지만 내 마음이 얼음장 같았다. 혼자 들어가는 집이 그렇게 싫었다. 혼자 여행하는 건 좋지만 평생을 혼자 살기는 싫었다. 누군가 내 보호막이 되어주었으면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선을 봤다. 신기하게도 만날 사람은 많았지만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넌 눈이 너~~~ 무 높아. 그래서 어디 시집가겠어?"
글쎄 내 눈이 높다고?
12월 24일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꼼짝없이 혼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그것도 옆동네 레스토랑이다. 약속 장소를 보니 젊은 사람은 아니겠고 취향도 연애 많이 해본 사람은 아니겠다. 평범한 아저씨겠군. 예의상 빨간 코트에 까만 스커트, 굽 높은 부츠를 신고 나갔다. 크리스마스이브지만 이 동네는 조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딸랑 종소리와 함께 오래 묵은 쾌쾌한 냄새가 났다. 테이블도 여유가 있었다. 내가 먼저 갔을까? 처음 만난 그 남자는 지극히 평범한 회색 패딩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다.
함박스테이크를 한 그릇씩 놓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매너가 좋은 사람이었다. 여자를 잘 아는 매너 말고.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난 내숭 떠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술은 글라스에 넉넉히 마셔야 했고 배가 넉넉하면 밥 반공기는 더 먹을 수 있었다. 자리가 아쉬웠을까? 우린 바로 영화를 보러 갔다. 그날 본 영화가 [벼랑 위의 포뇨].
영화를 보고 나오며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내숭은 싫지만 밀당은 좋았나 보다. 애프터를 거절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난 아직 솔로였다. 이렇다 할 괜찮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심심해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그날따라 햇살이 뜨거웠다. 버스 창밖으로 내리쬐는 햇살이 그냥 쓸쓸했다. 벼랑 위의 포뇨를 함께 본 남자는 간혹 안부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잘 지내요? 시간 되면 우리 차 한 잔 할까요?"
.
.
.
"그래요."
그 사람 손은 두툼하고 따뜻했다.
아이들이 DVD를 본다고 서두른다. 요즘엔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본다. 나는 비디오 가게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는데, 좋은 세상이다. 벼랑 위의 포뇨다. 요즘 미야자키에 빠져있더니 새로운 에니를 발견했다며 좋아한다.
"어머 이거 아빠랑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인데. 여보 여보 이리 와 봐~ 애들이 뭘 빌려왔나 봐 봐."
나랑은 너무 다른 사람이다.
이 남자랑 결혼해야지 마음먹은 이유는 하나였다.
착해서...
착했다. 순수하고.
착한데... 잘 삐진다.
아무것도 아닌데 토라져서 이틀째 말이 없다. 달래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진짜!!! 벼랑 위의 포뇨가 밉다!
* 표지 사진 고정순 작가 옥춘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