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
9월은 특별한 달
봄학기와 달리 9월에 시작되는 가을학기에는 익숙함 속의 설렘이 있다. 후덥지근하던 8월을 보내고, 맑고 높은 하늘에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들 마음에도 간지러운 바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것 같은 기대감 가득한 9월 초에 태어났다.
학생 때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모두가 들떠있는 시기,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되어 학업부담이 전혀 없는 때가 생일이라 정말 좋았다. 덕분에 많은 친구들에게 열정적인 축하도 받을 수 있었다. 방학이 없는 직장인이 되고서도 어수선한 휴가철이 지난 다음 생일이 있어 좋다. 다들 휴가에 다녀오기를 기다려 9월 초에 휴가를 가면 여유롭게 나의 9월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 즈음에 결혼식도 올렸다. 혼인신고를 결혼식보다 먼저 하게 되는 바람에, 9월은 결혼기념일이 아닌 결혼'식' 기념일을 보내게 되었지만 덕분에 9월 초 일주일은 남편과 함께 설레고 즐거운 마음으로 보낸다.
조금 달랐던 서른의 9월
작년에는 마지막 20대 생일에 서운한 마음을 감추려 화려하게 보냈다. 서른이 어때서, 20대가 끝났다는 게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달라지는 것 하나 없을 거란 건 잘 알았지만 어디 가서 당당히 어리다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것 같아 싫었다.
서른이 되었지만 정말 달라진 게 없었다. 올해는 분명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다시 생일을 맞았다.
여느 해와는 달리 추석 연휴가 9월 초에 있었다. 생일부터 결혼식 기념일을 거쳐 추석 연휴까지 휴가를 내고 쭉 쉬려고 계획했지만 회사일이 바빠 실패했다. 철없이 놀지 못하는 사회인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서인지 조금은 차분하게 기념일들을 보냈다.
생일 전 날, 날씨가 화창한 금요일에 서울에서 외근을 일찍 마치고 가장 애정하는 삼청동에서 남편을 만났다. 길거리 데이트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연애할 때 갔던 타르트집이 잘 있나 괜히 들러보고, 좋아했던 칼국수집을 지나가며 풋풋하던 때를 오랜만에 함께 떠올렸다. 너무 달콤한 연애였지만 평소에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이 더 좋아서 그런 것 같아 아쉽지는 않다.
삼청동은 남편이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며 고른 장소다. 나는 남편이 몰래 준비하는 서프라이즈를 좋아한다. 서프라이즈를 어설프지 않게, 훌륭하게 해내는 남편이라 더 좋다. 좋은 날씨에 데이트를 즐기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남루한 건물로 이끌었다. 간판은 사진관뿐인데, 무슨 사진을 찍는다는 건가 어리둥절하며 이끌려가다 2층에서 반전 분위기를 풍기는 일식집 앞에 섰다. 문이 열리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어둑한 조명에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비밀의 공간이 열린 느낌이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남편이 맛집이라고 데려가는 곳은 찐맛집들이다. 3년 전에도 오마카세로 생일상을 맞았었지만, 이번에 간 곳은 정말 훌륭했다. 게다가 프라이빗하고 고급스러웠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까울 정도로 이 맛과 분위기를 계속 즐기고 싶었다.
생일 날도 날씨가 맑았다. 기분이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다행이었다. 하지만 지쳐있던 걸까, 올해는 이상하게 별달리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남편이 임진강 뷰를 즐기며 어마어마한 사운드를 즐길 수 있다는 뮤직홀을 찾았다. 최근 하이엔드 스피커를 고르며 사운드에 관심을 가졌던지라 구미가 당겼다.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어진 곳. 떠들지 못하고 커피를 마실 수도 없었지만 세 시간이 지루할 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더 있고 싶었지만 배가 고파 어쩔 수 없이 나왔다. 100년 가까이 된 웅장한 스피커들이 여전히 건실한 소리를 뿜어내는 것도, 창밖에 잔잔하게 임진강이 흐르고 있는 것도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무해한 공간에서 진짜 '쉼'을 느꼈다.
슬프게 보낸 9월의 끝자락
이달 내내 몸도 마음도 바빴다. 회사 일도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쳤다. 예년보다 9월의 사랑스러운 날씨를 충분히, 여유롭게 즐기지 못해 아쉬웠다.
어느덧 9월의 마지막 주였다. 우리 부부가 각자의 본업으로 지쳐있던 어느 날 밤, 시할아버지께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간 우리집과 가까운 병원에 계셨어도 코로나 때문에 면회를 갈 수 없었다. 두어 번 병상에 누워계신 모습을 뵙고도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저 도와드릴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2년 전 건강하시던 때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 다행이다. 공부 잘하는 손자며느리를 맞았다고 좋아해 주셨던 모습을 기억한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남편의 친척들과 한 자리에 모일 일이 없었다.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지만 어색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저 손부의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금세 편하게 대해주셨다. 아버님의 지인분들에게도 인사를 많이 드렸다. 며느리를 자랑스럽게 소개해주셔서 감사했다. 남편과 내가 가족이라는 게 새삼 실감 났다. 주민등록증을 챙기지 못한 남편을 대신해 내가 손자며느리로서 할아버님의 주민등록등본도 발급받았다. 서류 발급이 가능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데 많이 챙겨드리지도 못하고 보내드리게 되다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편안한 곳에서 아프지 않으시기를 바라며 가족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켰다.
그래도 다시, 10월
3년 전 외할아버지를 보내드리고 꽤 오랜 기간 힘들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됐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또 전에 없던 삶을 그려 나갔다.
이제 10월이다. 그때의 기억을 믿고 다시 일어난다.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 확신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우리 남편부터 한 번 더 다독여야지. 남편에게는 내가 든든한 아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