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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Jul 15. 2024

10. 운명의 씨앗

울릉도에서 보낸 7일은 운명의 씨앗을 품었다.

(2005년 1월 21울릉도)        

울릉도의 겨울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온몸으로 퍼지고 얼굴을 때리는 칼바람에 지영은 몹시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며 꿈이 깨지 말기를 바랐다. 정호가 지영의 손을 잡고 자기 옷 주머니 속에 넣었다. 따뜻했다. 

“오빠 손은 왜 이렇게 따뜻해? 옛날에도 늘 따뜻했었지. 여전하네.”

지영은 정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춥지? 잠깐만 서 있어 봐.”

정호는 지영 앞에 서서 열려있는 지영의 롱패딩 자크를 잠가서 올렸다.

“바람이 차서 잠가야 해.”

정호의 따뜻한 말에 지영은 ‘이 남자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생각했다. 고맙다는 말 대신 지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호는 지영의 손을 다시 자신의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지영의 손을 따뜻하게 주물렀다. 정호의 손아귀에 모두 잡힐 만큼 지영의 손은 작았다. 그래서 정호가 늘 놀려대곤 했었다. 발도 작고 손도 작아서 아기라고. 애칭도 ‘애기야’였다. 당시 ‘파리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배우 박신양이 애인을 부르는 애칭이 ‘애기야’였다. 온 나라 연인들에게 ‘애기야’는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정호가 지영에게 ‘애기야’라고 부른 건 드라마가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애기야’는 자신의 전매특허라고 말하곤 했었다.

“애기야.”

정호가 오랜만에 애칭을 불렀다.

“오빠, 이제 나 애기 아니야. 그냥 유부녀야. 돈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를 떠났던 한심한 유부녀. 사랑 없는 결혼으로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가는 유부녀……. 어쩌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지 모르지. 옛날 오빠가 사랑스럽게 불러주던 애기는 없어. 오빠가 그렇게 부르면 괜히 내가 더 초라해지니까 그냥 지영이라고 불러 오빠.”

지영은 정호의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손을 빼며 말했다. 그런 지영을 보며 정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지영의 손을 잡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추워. 바람이 차다.”

정호는 짧게 말하고 주머니 속에 있는 지영의 손에 깍지를 끼며 꼭 쥐었다. 그 어떤 말보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따뜻함만이 둘의 진심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지영이도 정호의 깍지 낀 손이 전해주는 그 옛날 사랑하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난 네가 돈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어서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날 떠날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어.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고. 그때 만약 내가 너 앞에 나타나서 사랑 타령했으면 널 더욱 힘들게 했을 거야. 난 너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어. 그게 다야. 사랑이 식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도 아니야. 우리는 그냥 환경이……. 그냥 우리를 그렇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자책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시간이 나는 참 감사하다고 생각해. 사랑의 완성이 꼭 결혼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물론 결혼으로 이어지면 더없이 좋은 거지. 그렇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사랑이 될 수도 있어. 사실 난 지금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 그때 완성하지 못한 사랑을 지금 완성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아름다운 방점을 찍지 못한 게 아쉬워서 그 아름다운 방점을 찍고 싶은 생각이라고 할까. 지금 내 맘이 그래. 사실은.”

둘은 부둣가를 지나 항구 시내로 걸어갔다. 식당가를 지나면서 여기저기 손님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부부가 참 다정하네에. 요가 맛집 아인교. 들어오소. 회가, 마, 끝내 준다아인교.”

정호는 지영의 눈을 쳐다봤다. 지영은 그냥 지나가자는 눈빛이었다. 

“아지메, 방 잡아놓고 오께에. 싸게 해 줘야 됩니데이.”

정호가 경상도 사투리로 받아넘겼다. 지영은 웃음이 나왔지만 꾹 참았다. 

“아이고마 오데서 와써에? 경상돈가 보네에.”

그러자 호객행위를 하던 아주머니가 반가운 톤으로 말했다.

이번에도 정호가 아주머니 말을 받아줬다.

“쫌 이따 보입시데이.”

지영이 주머니 속 손으로 정호를 이끌었다. 더 농담하지 말고 빨리 가자는 신호였다.

“오빠는 여전하네. 학교 정문에서 강의실까지 2시간 걸리던 거 생각나네. 왜 그렇게 아는 사람이 많은지, 인사만 하고 그냥 가면 되는데 서서 말하거나 벤치에 앉아서까지 말하고 그랬잖아. 나 그때 좀 황당하더라.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과 친화력 있는 오빠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아니더라고. 나한테 집중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오빠를 자꾸 빼앗긴다는 생각까지 들었었거든.”

지영은 연애 시절로 돌아가서 다시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랬었구나. 맞아, 내가 좀 그랬지. 그때 지금처럼 말하지 그랬어. 그럼 좀 더 너한테 신경을 썼을 텐데.”

정호는 지영의 말이 싫지 않았다. 서로 가정이 있는 유부남 유부녀지만 20대 초반 연애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서 알콩달콩 대화를 하는 것이다. 둘이 그렇게 걸어가는데 앞에 신축한 듯한 깔끔한 모텔이 보였다. 정호는 걸음을 멈추고 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 모텔이 깨끗해 보이네. 바닷가라서 전망도 좋을 거 같고. 저기로 갈까?”

“그래.”

지영은 추워서 빨리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둘은 모텔로비로 들어갔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현금 인출기에 갔다 올게.”

정호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현금 인출기를 찾았다. 

“여기 현금 인출기 있나요?”

정호가 모텔 카운터 아가씨에게 물었다.

“바로 옆 건물 편의점에 있어요.”

카운터 아가씨가 약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정호는 카운터의 태도에 신경 쓰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필요한 돈을 찾아서 모텔비를 계산했다. 1박에 10만 원이었다. 비수기인데도 비쌌다. 대신 전망 좋은 방으로 달라고 했다. 키를 받아 들고 전망 좋은 방으로 올라갔다. 객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부터 신발을 벗고 간단한 짐을 정리하는 모습까지 전혀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둘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피식 웃었다. 마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완전히 불태워버리기라도 할 듯이 서로를 쳐다보는 눈이 점점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호가 지영의 손을 잡고 자기에게 끌어당겼다. 지영은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이 나눌 수 있는 은밀한 욕정이 타올랐다. 지영은 남편에게서는 느껴보지 못한 설렘과 흥분으로 벌써 젖어들고 있었다. 신기했다. 섹스를 포기하고 산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걸까? 정호의 손길과 입술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튀면서 전율을 느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전희 없이 직진하는 게 습관이었다. 그래서 늘 아픈 기억만 있었다. 그런데 정호는 지금 온몸을 자극하면서 섹스 세포를 다시 살려내고 있었다. 정호가 부리는 마법에 흠뻑 젖어서 우주 어디쯤인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대폭발의 카오스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때쯤 지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말하고 있었다.

“오빠, 지금이야, 지금 넣어줘.”

정호는 천천히 부드럽게 넣었다. 지영이의 두 손이 정호의 엉덩이를 잡고 끌어당겼다. 정호는 지영의 호흡에 맞춰서 정확하게 리듬을 탔다. 일정한 리듬이 힘 있게 반복되면서 지영은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정호는 이 순간 자세를 바꾸거나 리듬이 틀어지면 오르가슴의 문턱에서 주저앉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지영이가 끌어당기는 손의 힘을 느끼면서 힘 조절을 강하게 올려야 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리고 귓가에 모든 세포를 집중해서 지영의 호흡과 신음을 신경계로, 다시 엉덩이 근육으로 전달해야 했다. 그래야 절정의 순간에 함께 대폭발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둘은 연애할 때 이미 그런 속궁합을 잘 맞춰 놓았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바로 본능처럼 되살아났다. 지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신호가 온 것이다.

“아악, 오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나도. 사랑해. 사랑해.”

지영의 눈에서 불꽃이 뛰었다. 밤하늘에 불꽃놀이 하듯이 연신 터지고 또 터졌다.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눈가가 환해졌고 입가에 미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헉헉. 오빠, 신기해. 정말 신기해. 헉헉”

숨을 헐떡이며 지영이가 말했다. 지영의 위에서 그녀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던 정호가 지영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말했다.

“뭐가? 뭐가 신기해?”

“나, 다시는 오르가슴에 올라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아예 잊고 살았었는데. 지금 오빠가 그걸 다시 헉헉, 그걸 다시 느끼게 해 줬어.”

정호는 지영의 말에 미소 지으면서 지영의 입술에 입맞춤하며 옆으로 누우려고 했다.

“아냐. 오빠. 그대로 있어. 빼지 말고. 지금 그대로 조금만 더 있어 줘.”

정호는 리듬감 있게 죄어오는 지영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럴게.”

정호는 지영을 안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지영아. 이렇게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다시는 나쁜 생각하지 마. 네가 어디에 있어도 괜찮아. 살아만 있으면……. 반드시 행복한 날이 올 거야. 그것만 생각하면 돼. 힘들면 나한테 연락하고. 다시는 죽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 알았지?”

지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가 고마웠다. 다시 사랑 세포를 깨워줘서, 삶의 의욕을 만들어줘서 고마웠다. 그리고 가만히 생각했다. 이대로 이 남자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고. 창 밖에는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틀 앞 작은 테라스 공간에 양파 두 개가 유리컵에 담겨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화분 대신 놓아둔 것일까? 

"오빠, 저기 저것 좀 봐."

"어디?"

"저기 창틀 앞에 양파 말이야."

"어, 뭐지? 하나는 지영이, 하나는 정호 하면 되겠다."

"호호. 그러면 되겠네."

"양파 실험 이야기 있잖아. 좋은 말만 해주면 빨리 건강하게 잘 자라고, 나쁜 말과 욕을 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이야기 말이야. 우리 있는 동안 양파한테 좋은 말만 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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