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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Jun 30. 2024

8. 아주 이상한 날

첫 사랑 지영이와 닮은 현경, 둘은 무슨 관계일까?

김포시 구래동 천사오피스텔 1층. 1004 부동산.

정호는 현경과 함께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라 그런지 근무하는 직원(50대로 보이는 중년 여자)은 PC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는데 모니터에는 화투장이 빠른 속도로 오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정호는 사람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껌을 씹으면서 게임에 빠져있는 여자를 보며 말했다.

“어머, 어서 오세요. 방 구하시게요?”

여자는 게임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딸이 쓸 오피스텔을 좀 보려고요.”

딸이라는 말에 현경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네. 이리 앉으세요. 뭐 시원한 거라도 드릴까요?”

“아, 네. 괜찮습니다.”

정호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늘 하던 대로 냉장고에서 박카스 2병을 꺼내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여긴 대부분 오피스텔이라…, 알고 오신 거죠?”

“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복층구조가 있더라고요? 10층 정도 되면 좋고요.”

여자는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노트북을 열었다.

“복층에, 10층이라…, 네, 여기 있네요. 1001호, 1008호 두 개 있어요. 1001호는 제일 왼쪽 호실이고요, 1008호는 중간이에요.”

“그럼 1008호가 낫겠네요.”

“네. 그럼 한번 가보시죠. 두 개 다 아직 미분양 상태라 공실입니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5만 원입니다. 관리비는 7만 원이고요. 전기세, 물세는 사용한 만큼만 내시면 됩니다.”

여자는 핸드폰에서 오피스텔 출입 비밀번호를 찾았다. 저장되어 있지 않았는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러는 사이 현경은 정호를 보며 너무 비싸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정호에게는 하룻밤 술 값 밖에 안 되는 돈이지만 현경은 하루 천 원으로 산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겨우 목숨만 유지할 정도였다.

“아, 출입 비번 받았습니다. 이제 출발하시죠. 따라오세요.”

여자가 앞장섰다. 가끔 잘 따라오는지 뒤로 힐끔힐끔 쳐다보며 웃었다. 정호는 그 웃음의 의미가 뭔지 기분이 나빴다. 아빠와 딸이라는 설정이 부자연스러운 걸까? 그래도 상관없었다. 한번 보고 끝날 인연까지 완벽하게 보일 정도로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다.

여자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은 마음에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딸이 아빠를 쏙 빼닮았네요, 웃을 때 눈고리하며 콧날도 오뚝하고 귀도 아빠귀랑 똑같은데요?”

정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그럼 딸이 아빠 닮지 누굴 닮겠어요.”

현경은 그런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았다. 그저 엷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는 두 사람이 먼저 타도록 안내했다. 10층을 누른 후 또 흐르는 어색한 침묵.

‘얼굴은 닮았는데 어째 아빠, 딸 사이 같지 않아. 어떤 사이일까?’

여자는 계속 의문이 들었다.

‘뭐 어떤 사이면 어때, 나는 계약만 하면 돼. 신경 꺼.’

10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이 쪽으로 오세요. 새로 지은 건물이라 아직 새집 냄새가 날 거예요.”

정호는 여자 뒤로 바짝 따라가며 복도 주변을 둘러봤다. 현경은 두 사람과 약간 떨어져 걸으며 신기한 눈으로 여기저기 쳐다봤다. 신기했다. 일단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이 마음에 들었고 복도 중간에 설치되어 있는 CCTV카메라도 마음에 들었다.

1008호라고 붙어진 문 앞에서 여자는 핸드폰을 열고 비밀번호를 찾아 눌렀다.

띠리리

현관문이 열렸다. 여자는 현관문을 열어놓은 채로 정호와 현경이 먼저 들어가도록 입구를 양보했다.

“들어가서 보세요. 신발 신고 들어가셔도 됩니다.”

정호는 깨끗하고 복층구조로 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현경은 우와 우와를 연발하며 감탄했다.

“아, 아, 아빠. 마음에 들어. 여기로 할게.”

정호는 현경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 그래.”

여자는 다시 한번 두 사람 얼굴을 봤다. 너무 닮았다. 웃을 때 반달모양으로 변하는 눈매, 오뚝한 콧날과 살짝 예쁘게 튀어나온 광대뼈 하며, 턱선과 부처님 귀처럼 늘어진 귓불. 완전히 복사판이었다. 그런데 둘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완전히 모르는 남남 분위기.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분에 나오는 대로 말했다.

“아빠가 외국에서 오랫동안 사셨나 봐요?”

정호가 갑자기 훅 들어오는 여자의 말에 망설이며 말했다.

“왜요?”

여자는 당황하며 수습했다.

“아,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보여서 말했어요.”

현경이 끼어들며 말했다.

“맞아요. 아빠가 외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셔서 같이 다닐 때 좀 어색하긴 해요.”

여자는 구세주를 만난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아이고 십 년 감수했네. 아빠, 딸 사이가 조금 어색해 보였어요. 가족은 떨어져 살면 그렇게 돼요. 딸이 그래도 상냥하고 싹싹해서 좋으시겠어요.”

정호는 어이없는 말에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러게요. 딸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까 계약합시다. 이사는 내일 바로 들어올게요.”

“내일요? 청소도 해야 할 텐데요?”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문제가 되나요?”

“아닙니다. 문제는요. 당연히 됩니다. 그럼 계약서 쓰시죠.”

정호와 현경은 부동산 사무실에서 계약서를 썼다. 보증금과 월세는 바로 입금했다. 입주자 안내서와 키를 건네받고 부동산 사무실을 나왔다.


“현경아, 오늘은 이불, 책상, 침대 주문하고 잠은 호텔에서 하루 더 자도록 해라. 내일 아침에 청소하고 주문한 거 들어오면 들여놓고. 커튼은 천천히 달도록 하고.”

“고마워요. 아저씨. 변태 키다리 아저씨. 호호.”

현경은 정호가 도와준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진심이었음을 알게 되어 너무 좋았다.

‘아저씨가 진짜 내 아빠였으면 좋겠다.’

현경은 순간 엄마를 때리고 자신을 학대하던 아빠가 떠올랐다.

‘부모도 아니야. 아니 인간도 아니야. 쓰레기야. 무책임하게 낳아놓고, 먼저 가버리고.’

그런데 옛날 살던 집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게 있었다. 양파!

‘왜? 양파를 편지 옆에 두었을까?’

현경은 그때부터 양파를 먹지 않았다. 그 생각을 떠올리기가 싫었다.

“현경아, 너 혈액형이 뭐니?”

정호는 생각에 잠긴 현경을 깨우듯 물었다.

“네? 혈액형요? O형요.”

“그래? 나도 O형인데. 하하하. 내 딸 맞는구나. 하하하.”

“아저씨도 참. 딸 없으면 딸 하죠 뭐.”

“아니야, 그냥 해본 소리다. 나 딸 있어.”

현경은 딸이 있다는 말에 약간 질투심이 났다.

“나 같이 예쁜 딸 하나 더 있으면 손해는 아닐 텐데요.”

“그래. 맞다. 딸 하자. 그래 둘째 딸.”

정호는 웃으면서 현경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다. 정말 자신을 닮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여인이 있었다. 입술이며 턱 하관은 꼭 그 여인 닮았다. 첫사랑 이지영. 한 동네에서 자랐다. 세 살 어린 여인. 20대를 아름답게 꽃 피웠던 둘만의 사랑. 군대 가는 정호를 마지막까지 배웅해 준 여인. 정호가 3년 동안 힘든 해병대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여인. 김포 북단까지 면회를 와 주었던 여인. 정호는 현경의 얼굴에서 첫사랑 지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20년 전 정호가 제대하던 날)     


정호는 김포 해병부대 정문을 나서며 후임병들의 축하 세리머니를 받았다.

“정호야 잘 가라. 잘 살아라. 성공해라!”

“야, 너. 선임한테 정호라고 했냐?”

“그럼 정호보고 정호라고 하지 맹호라고 하냐?”

깔깔대며 웃는 후임병들 사이로 막내 신원식 이병은 눈물을 훔치고 서 있었다.

“야, 신원식.”

“이병 신원식.”

“왜 울고 지랄이야? 건강하게 잘 지내라. 나오면 꼭 연락하고.”

“이병 신원식. 알겠습니다.”

위병소 안과 밖으로 나뉘자 다시는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어제의 집이 낯선 군부대시설이 되었다. 안에 있는 형제 같았던 전우들은 군인 아저씨로 보였다. 정호는 파이팅을 외치는 후임병들을 뒤로한 채 걸어가며 지영이를 떠올렸다. 병장 달고부터는 연락이 되지 않았었다. 고향 친구들 말로는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딱 한 달만 아파하고 잊어버리자고 했었다. 그런데 전역하는 순간 지영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아니 왜 떠났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정호는 공중전화부스에서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렸다가를 반복했다. 용기를 내서 지영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The line number is......’

용기를 내서 걸었는데 없는 번호란다. 정호는 지영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는 친구를 생각했다. 수첩에서 친구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걸었다.

“인식아, 나 정호. 오늘 제대했다.”

“그래. 정호야. 축하한다. 어디냐?”

“어, 지금 막 부대 나왔어. 인식아 지영이 전화번호 바뀐 거 같던데 혹시 알고 있냐?”

“누구? 지영이? 야, 아직도 못 잊었냐? 걔 아버지가 사업 실패해서 쫄딱 망했어. 살던 집도 경매에 넘어갔고. 시골로 이사 갔어. 창원 어디라고 하던데.”

“뭐라고.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근데 지난번에 왜 나보고 다른 남자 생겼다고 했냐?”

“아, 그거? 지영이가 옆에서 꼭 그렇게 말해달라고 했어. 그렇게 헤어지는 게 좋겠다고. 내가 왜 그러냐고, 아버지가 사업 망한 거하고 정호랑 사귀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연애할 상황이 아니라면서 그래도 널 생각해서 그렇게 말해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지. 미안하다 야. 네가 그렇게까지 좋아했는지 몰랐다.”

정호는 순간 욕이 나올 뻔했다. 그래도 참았다.

“그 책임은 나중에 묻기로 하고 일단 지영이 전화번호 아냐 모르냐?”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아서 몰라. 그런데 내 동생이 지영이 친구잖아. 동생한테 물어보면 알지도 몰라. 확인해서 알려줄게. 야, 인마. 일단 제대했으면 집으로 와라.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정호는 수화기를 들고 있는 손이 떨렸다.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서일까?

“그래. 꼭 좀 알아봐 줘. 못 알아내면 넌 해병 특공무술로 죽여버린다.”

“야, 야, 알았다. 무서워서 살겠냐? 도착하면 전화해라.”


(일주일 후 창원시 바닷가 외진 수정마을)

정호는 수첩에 적은 주소를 보며 바닷가 외진 수정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는 시외버스 정류장까지만 포장되어 있었다. 마을은 말발굽처럼 낮은 산이 둘러싸고 있었고 해변에는 낡은 고기잡이배 서너 척만 뻘 위에 기우뚱하게 밧줄로 묶여 있었다. 30호가 채 안 되는 작은 어촌 마을. 지영이는 왜 여기로 이사를 왔을까? 부모님의 고향일까? 집집마다 문패는 있는데 집 주소는 붙어있지 않았다. 정호는 메모지를 보다가 다시 두리번거리며 이 씨 성을 가진 문패를 찾았다. 마을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조용했다. 골목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담벼락이 여기저기 허물어지고 대문도 비스듬히 무너질 것 같은 집 앞에서 정호는 발걸음을 멈췄다.


“콜록콜록. 흐윽, 흐윽, 콜록콜록.”

남자의 기침소리는 폐를 입 밖으로 쏟아낼 것처럼 그렁거리며 깊고 불안정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빠, 약 가져다 줄 게. 조금만 참아.”

지영의 목소리였다. 정호는 온몸으로 지영의 목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틀림없이 지영이야.’ 정호는 비스듬히 서 있는 대문 옆에 몸을 숨긴 채 틈 사이로 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집은 ‘ㄱ’ 자 모양이었고 본채로 보이는 집은 가운데 마루가 있고 마루 양 옆으로 방이 있었다. 마당과 붙어서 꺾어진 아래채는 주방과 방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는 시멘트로 평평하게 포장되어 있고 휠체어가 세워져 있었다.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온 여자는 지영이었다. 정호는 ‘지영아’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주소가 적혀있는 메모지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몸들 돌려 숨었다. 반가움과 애처로움이 겹쳐 눈물샘을 자극했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지영이만 생각하고 달려왔는데 막상 그녀 앞에 나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니 지금 그녀 앞에 나타나는 건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방안에서는 기침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에는 숨이 넘어가는 것처럼 흐느끼는 소리까지 들렸다. 정호가 눈물을 닦아내고 있을 때 누군가 정호 앞에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호의 눈에 여자의 발이 보였다.

“누~구세요? 왜 남의 집 앞에서 울고 있어요?”

정호는 그녀가 지영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어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후다닥 뛰었다.

“이것 봐요. 총각. 우리 지영이 찾아왔어요?”


뒤통수에 꽂히는 그녀의 말에 대답 대신 줄행랑을 제대로 보여주며 뛰었다. 한참을 뛰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때 정호는 지영과의 이별을 떠올렸다. ‘분명히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했어. 그런데 집안이 이렇게 몰락해서 내가 걱정할까 봐 아니 자신의 처지가 달라져서 날 회피한 거야.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라고.’ 정호는 마산 합포만이 바라보이는 언덕까지 뛰어갔다.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무엇이 땀이고 무엇이 눈물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두 팔로 무릎을 짚고 숨을 헐떡였다. 눈물과 땀이 흙에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래, 지금은 지영이 앞에 나타나는 게 아닌 거 같아. 지영이 마음을 알았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자. 그녀가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만 옆에서 지켜보자.’     



(5년 후)


정호의 일상은 단순했다. 회사 출근. 열심히 일하고 퇴근. 퇴근길에 친구에게 지영이 소식 물어보기. 저녁 먹고 책 읽기, 글 쓰기, 지영을 생각하며 일기 쓰기. 꿈에 나타나라고 기도하며 잠들기.

지영의 소식은 친구의 여동생을 통해 서울로 올라온 후 2년간은 들을 수 있었다.

“오빠, 지영이 연락 안돼. 전화번호도 바꿨고, 아버지 수술 때문에 돈 많은 사업가 하고 결혼할 거라는 소식이 마지막이었어.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15살이나 많다고 하더라. 이젠 오빠도 지영이 잊어. 돌아 올 얘 같았으면 벌써 오빠한테 연락했지. 대신 내가 괜찮은 선배 소개해줄 게.”

“그랬구나. 그래. 그런데 난 아직도 지영이가 오빠 하며 연락할 거 같아. 그렇게 믿고 싶고.”

“정신 차려 오빠. 평생 총각으로 늙을 거야? 사실 내가 오빠 이야기 했었어.”

“무슨 얘기? 지영이한테?”

“응, 오빠가 수정마을 찾아간 거. 그리고 아직도 널 기다린다고까지.”

“그랬더니, 뭐래? 지영이가 뭐래?”

“숨넘어가겠네. 지영이 말만 하면 그저 정신 못 차린다니까.”

“야, 말 돌리지 말고 말해, 지영이가 뭐랬냐고?”

“지영이가, ‘나도 알고 있었어. 그날 엄마가 오빠를 보고 나 찾아온 거 같은데 울면서 가더라고 했어.’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정호 오빠는 아직 널 기다린다고, 서울 오면 꼭 연락하라고. 내가 오빠 전화번호까지 알려 줬다니까.”

“그래. 그건 알았고. 나이 많은 남자하고 결혼한다는 건 무슨 말이야. 말해 봐 숨기지 말고.”

“다그치지 마. 말할게. 지영이가 오빠한테는 말하지 말랬어. 지금 말해줘서 미안하긴 하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정호는 입이 바짝 말라 들어갔다.

“아버지 살리려면 큰돈이 필요하댔어. 수정마을에서 요양한답시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남자가 찾아와서 수술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들어보니까 고향에 잠시 내려왔다가 지영이를 보고 첫눈에 반했대. 서울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고 돈이 많았다나 봐. 그래서 수술비도 도와주고 좀 더 좋은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지영이를 계속 만났대. 그리고 가족이 완전히 그 남자에게 의지하게 되었을 때 결혼이야기를 하더래. 지영이는 엉엉 울면서 부모님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해야겠다고 하더라고.”

정호는 답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지금껏 기다린 자신을 되돌아보며 세상에 쓰임도 없는 먼지 같은 존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캐럴 송이 세상의 소음을 덮어버리던 12월 24일. 정호는 친구의 강요에 못 이겨 소개팅을 했다. 지금 정호의 아내가 된 수정이었다. 수정은 생기발랄, 애교만점에 연애기간 내내 정호를 리드하며 정호에게 인생 최대의 기쁨과 행복을 안겨 주었다. 정호는 수정의 그런 모습에 빠져 지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연애 1년 만에 수정이 먼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다. 정호는 거절할 수 없는 그녀의 매력에 빠져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다. 둘의 신혼 생활은 매일밤이 뜨거웠다. 1년 만에 아이가 생겼고 둘째도 연년생으로 낳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정호의 핸드폰으로 낯선 전화번호가 찍혔다.

“네. 김정호입니다.”

“…….”

아무 말이 없었다. 정호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화면을 다시 쳐다봤다.

010-99**-2003

저장된 번호가 아니었다. 단지 2003이라는 숫자가 낯이 익었다. 2003년에 정호는 입대 전 지영과 첫날밤을 보냈다. 그때 2003이라는 숫자를 영원히 기억하기로 약속했었다. 정호는 다시 한번 말했다.

“여보세요? 안 들리나요?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죠?”

왠지 바로 끊고 싶지 않았다.

“오, 오빠.”

정호의 뇌하수체에 시멘트로 발라버린 첫사랑의 목소리. 지영이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나……. 지영이.”

정호는 자신의 예감이 적중한 것에 소름이 돋았다. 지영이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단 두 마디에 온몸이 기억하고 있는 지영이에 대한 감정 세포가 일제히 깨어나고 있었다.

“어, 어. 그래. 지영이구나.”

둘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후 잠시 말을 잊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지영이었다.

“오빠, 미안했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정호는 지영의 미안하다는 말에 갑자기 설움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가 가정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 나도 더 용기 내지 못해서 미안했어.”

지영은 정호의 말에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오빠, 오빠, 나 너무 힘들어.”

정호는 흐느끼는 지영의 말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왜, 울고 그래? 잘 사는 거 아니었어?”

“흑, 흐윽. 오빠. 아니야. 잘 살고 있어. 오늘 그냥 오빠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목소리 들었으니까 됐어. 그만 끊을게.”

“지영아, 무슨 일 있어? 말해봐. 내가 도와줄 게.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용기를 못 냈지만 지금은 달라.”

“미안해. 오빠. 끊을게.”

뚜뚜뚜뚜 띠릭.

지영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다시 멍하게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얼마나 급했으면 나한테 전화를 다 했을까? 현주한테 물어봐야겠다.’

정호는 친구 여동생 현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요즘도 신혼이라며? 애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신혼. 대단해.”

현주는 정호가 말하기도 전에 수다를 떨었다.

“어. 신혼이지. 언제나. 현주야, 뭐 물어볼 게 있어서 전화했어.”

“뭐야, 둘이 부부싸움했어? 수정이는 그런 말 안 하던데.”

“그게 아니고. 너 지영이 연락하니?”

“뭐, 지영이? 이 오빠가 미쳤나 봐. 유부남이 첫사랑을 왜 찾아? 아직도 못 잊었어?”

“아니. 지영이가 조금 전에 전화 왔었어.”

“미친년. 오빠 버리고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갈 땐 언제고. 지가 어려우니까 오빠한테 전화를 해? 걔 완전 또라이네. 그래서 오빠한테 뭐라고 하던데?”

정호는 현주가 쌍욕을 하는 데는 뭔가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영이 요즘 어떻게 살아? 잘 사는 거 아니었어?”

“휴, 말도 마 오빠. 그년 15살 많은 신랑이랑 처음에는 잘 살았지. 아버지도 수술하고 요양원에 보냈고. 그런데 애가 안 생긴다고 바람을 피우더래.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더래. 그래서 이혼하자고 했더니 친정에 지원하던 걸 다 끊어버리더래. 그래서 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엄마는 그 충격으로 치매가 와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었대. 지영이가 오히려 빌면서 잘못했다고 하고 다시 되돌려 놓으려고 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어머니하고 약을 먹고 자살을 했어. 딸한테 유서 한 장 딸랑 남겨놓고. 걔가 미치는 것도 당연하지. 남편이 잘못했다며 첩질 정리하고 두 분 장례를 치른 후 다시 합쳤는데 그게 잘 살 수 있겠어? 지영이는 매일 정신 나간 년처럼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급기야 실어증에 걸리고 말았어. 남편이 지영이 치료한다고 지극정성을 다했는데 그게 쉽게 치료가 되겠어?”

정호는 그런 지영을 생각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까 전화 통화할 때는 말 잘했어. 그럼 완치가 된 건가?”

현주는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완치는 무슨. 어제도 말을 못 하던데. 지영이 남편이 나한테 전화 와서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갔었지. 사람은 알아보는데 말이 안 나오니 보는 나도 답답하고. 종이하고 연필을 가져다주었더니 겨우 표현을 하더라고. 종이에 ‘고마워’라고 쓰고 한참을 울고, 또 ‘부모님이 그렇게 가신 게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라고 쓰고 또 울고. 하여튼 나도 엄청 힘들었어.”

“그랬었구나. 그런데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 네가 알려줬니?”

“아니. 알려준 건 아니고. 예전에 오빠 결혼식할 때 청첩장. 그걸 보여준 적 있어. 거기 오빠 전화번호가 있었잖아. 그걸 메모해 둔 거 같은데. 내가 따로 알려준 거는 없어. 아마 그걸 보고 알았을 거야.”

“그래.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오빠! 어쩔라고? 설마 다시 지영이 만난다는 건 아니지? 그년이 오빠한테 뭐라고 말했어?”

“내 목소리 듣고 싶었다고, 그리고 미안하다고. 그게 다야. 그리고 먼저 끊었어.”

“혹시 다시 전화 오면 지영이 그년 지금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까 오빠가 적당히 잘 이야기해 줘. 딴 맘먹지는 말고. 알았지?”

“어. 그럴게.”


정호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정리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연민인가? 지영이가 불쌍하게 느껴지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풋풋한 청년 시절 첫 경험의 남녀가 각자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다시 그때 감정을 소환하면 어떻게 될까? 한참을 고민하던 정호는 일단 지영이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까 그 전화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정호는 문자를 남겼다.

‘지영아. 많이 힘들지. 나한테 겨우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실어증을 치료할 수 있을 거야. 현주한테 네 이야기 다 들었어. 어려워하지 말고 연락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최대한 도와줄게.’

[딩동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오빠. 고마워. 내가 무슨 염치로 오빠를 만나겠어. 아까는 오빠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죽을 거 같았어. 그래서 연락한 거야. 이젠 괜찮아. 다시 연락하지 않을게. 오빠한테 미안하다는 그 말은 꼭 해줘야 할 거 같았어. 죽기 전에 말이야.’

헉, 정호는 지영이의 문자에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현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이번에는 뭘 말하려고?”

“내가 지금 문자하나 보내줄게 잘 읽어봐. 지영이가 심상치 않아. 뭔가 결심을 한 거 같아.”

정호는 문자를 보냈다. 현주는 정호의 문자를 보고 놀라며 말했다.

“어머어머 이년 미친년, 죽으려고 하네. 오빠 내가 지금 지영이 집으로 가볼게. 가서 내가 다시 전화할게. 끊어.”

“현주야, 현주야.”

이미 전화는 끊어진 상태였다. 정호는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현주에게 문자를 보냈다.

[현주야. 지영이 집 주소 찍어줘. 나도 지금 출발할게.]

1분이 지났다. 답장이 없었다. 2분이 지났다. 아직도 답이 없다. 정호는 점점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났다. 차라리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하는 찰나에 문자가 들어왔다.

[송파구 잠실2동 엘스 아파트 000동 2003호]

정호는 주소를 확인하고 바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출발할게. 가는 중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

정호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았다.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난 후 겨우 진정하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했다. [예상 도착시간 1시간] 정호는 운전대를 잡고 조용히 기도했다. ‘지영이가 나쁜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제발, 제가 갔을 때 살아 있는 모습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지영아 제발,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해. 제발.’ 정호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는 천천히 실오라기 뽑듯이 내뱉었다. 그렇게 다섯 번을 하자 손 떨림이 없어졌다. 차를 몰고 잠실로 향하는 내내 옛날 지영이와 함께 나눴던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각자 삶을 살고 있지만 공통적으로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마치 샘이 솟듯이 마구 떠올랐다. 반대편에 지나가는 차들이 추억의 사진 한 장 한 장을 정호의 차 앞 유리창에 비춰주고 가는 것 같았다. 그때 현주의 전화번호가 핸드폰 창에 떴다.

“그래. 현주야.”

“오빠, 지영이가 약을 먹었어. 지금 119 불렀는데 너무 무서워. 빨리 와.”

“현주야, 침착해야 돼. 지금 숨을 쉬니? 의식은 있고?”

“잠깐만.”

현주는 지영의 입과 코에 귀를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다. 가늘게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가늘게 쉬는 거 같아. 그런데 의식은 없어.”

정호는 다급하게 다시 말했다.

“119에서 전화가 다시 올 거니까 내 전화는 끊고 119 구급대원한테 현재 상황과 지금 응급처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봐.”

“알았어. 오빠.”


정호는 빨간 신호등에 걸려 교차로에서 멈췄다. 반대편 좌회전 차량이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정호는 그대로 신호를 무시하고 직진했다. 반대편에서 막 좌회전 하려던 차량이 전조등을 켜고 빵빵하며 경적을 울렸다. 정호는 무시했다. 순간 최대속도 100km까지 밟았다. 급발진으로 오해할 만큼 빠르게 달렸다. 잠실 엘스 000동 앞, 119 앰뷸런스가 서있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현주가 울면서 앰뷸런스에 환자를 싣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호는 차에서 내려 뛰어갔다.


119 구급대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보호자분, 한분 타세요.”

“네. 제가 탈게요.”

현주가 얼른 앰뷸런스에 탔다. 뛰어오는 정호와 눈이 마주쳤다.

“오빠, 내가 타고 갈 테니까 오빠는 따라와.”

“알았어. 상태는 어때?”

“몰라. 계속 응급처치하고 있어.”

앰뷸런스는 아산병원 응급실로 들어갔다.

정호는 차를 주차장에 주차하고 응급실로 뛰어갔다. 주차하기는 왜 이렇게 힘들며 응급실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뛰면서 호흡하는 한 순간순간이 온전히 느껴질 정도였다. 정호가 느끼는 시간과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서로 다르게 흘러가는 거 같았다. 응급실에 들어가서 현주를 찾았다.

“현주야, 어떻게 됐어? 살았어?”

“응. 앰뷸런스 안에서 다행히 의식이 돌아왔고 지금 위 세척하는 중이야. 의사 선생님이 위 세척하고 충분히 쉬면 괜찮아질 거래.”

정호는 괜찮아질 거라는 말에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 휘청거렸다.

“휴, 다행이다. 큰일 날 뻔했다. 현주 네가 지영이를 살렸다.”

“아냐, 오빠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내가 어떻게 지영이한테 갔겠어. 오빠가 상황판단을 잘한 거지.”

“남편한테는 연락했고?”

“앰뷸런스에서 의식이 돌아와서 겨우 사람을 알아보는데... 남편 연락처 물어보니까... 외국에 출장 갔다고 소용없다며 연락하지 말래.”

“그래도 알려야지.”

“그렇지? 그래야겠지?”

“일단 회복하는 거 보고 다시 이야기해 보자.”

둘은 응급실 입구에서 보호자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지영 환자 보호자분.”

간호사가 불렀다. 둘은 네 하고 소리치며 간호사에게 달려갔다.

“지금 환자 상태는 양호합니다. 위 세척하고 회복 중에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환자 분하고 대화도 가능합니다. 여기서 절차 밟으시고 안내하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호는 마치 자기 마누라라도 되는 듯이 남편처럼 연신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런 정호의 모습을 보며 현주가 말했다.

“하여튼 어떤 년은 팔자가 좋아서 첫사랑이 남편대신 오지를 않나, 애타게 찾지를 않나, 나는 뭐야 지금까지... 노처녀로.... 내 팔자야.”

“야, 그래도 현주 네가 제일 낫다. 얼마나 자유롭냐. 마음대로 연애하고 구속받지 않고, 얼마나 좋냐?”

“하긴, 결혼한 년 들 중에 나 부럽다고 말하는 년 많아. 열이면 열 다 부럽데. 근데 오빠. 나는 그런 년들 보면 화가 나더라. 지들은 가질 거 다 가져봤잖아. 그런데 아니래. 내가 부럽데. 말이 돼?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거지. 안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다. 너는 결혼하지 마라. 혼자 잘 가꾸면서 평생 젊게 살고.”

“그럴까? 호호. 오빠도 내 타깃 중에 하나란 걸 잊지 마. 원래 오빠는 내 거였다고. 지영이년 때문에 내가 접었지만.”

지영이가 괜찮아졌다는 간호사의 말에 둘은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현주야, 지영이... 내가 일주일만 보살펴주면 안 될까? 남편이 언제 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영이 회복하는 데 있어주고 싶어서 그래.”

“미쳤어? 지영이 남편은 외국에 있으니까 그렇다 치고 수정이한테는 뭐라고 말할 건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출장 간다고 하면 돼. 수정이는 날 믿잖아.”

“잘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 지금 오빠가 제정신이야?”

정호는 현주의 양 어깨를 두 팔로 잡으며 진중하게 말했다.

“내가 평생 후회할 거 같아서 그래. 일주일만 지영이를 보살펴 주면 지영이도 다신 그런 생각 못하게 해 놓을 수 있어. 날 믿어 봐. 가정이 있는 내가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야. 이런 충격적인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내가 잘 설득해 놓겠다는 생각뿐이야. 다른 건 없어. 내 진심 알아줬으면 좋겠다.”

“난 모르겠다. 지영이년 진짜 복이 터졌네. 하긴 내가 그래서 오빠를 좋아했는지도 모르지.”

“지영이는 내가 말해서 데리고 갈게. 넌 수정이가 이야기하면 그냥 지원사격만 해줘. 알았지?”

“싫은데. 난 불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아. 오빠가 알아서 해.”

간호사가 지영이가 누워있는 침대로 안내했다. 사방을 두르고 있는 커튼 한쪽을 걷어내자 지영이가 누워있었다. 지영이는 두 사람을 보며 놀랐다. 현주는 알겠는데 정호가 옆에 서 있는 걸 보고 눈물을 흘렸다. 조금씩 흐느끼더니 점차 소리가 커졌다.

“오빠..., 흐흑. 미안해.... 이런 꼴 보여서.”

현주가 지영을 보며 말했다.

“미친년 나는 안 보이냐? 오빠만 보이지?”

정호는 지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영아. 괜찮아. 오빠가 더 미안해. 그때 내가 용기를 냈다면 달라졌을 텐데. 내가 미안해.”

지영이는 한 손을 정호에게 맡긴 채 다른 손으로 연신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그냥 내버려 두지. 그냥 죽게 놔 두지. 왜 살렸어..... 흐흑.”

현주가 화를 내며 말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기껏 살려 놨더니 왜 살렸냐고? 그게 친구한테 할 소리니?”

정호는 현주에게 그만하라고 팔을 툭 쳤다. 그러자 현주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옛날 버릇 나오네. 옛날에도 둘이 그렇게 죽고 못살더니. 알았어. 이쯤에서 내가 빠져줄게. 두 사람 20살로 돌아가서 잘해봐.”  


정호는 지영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옛날 모습 그대로인데 눈 옆에 잔 주름만 더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 귀가 닮았느니, 오뚝한 콧날이 닮았느니, 딸을 놓으면 아빠 얼굴은 코 위를 닮아야 하고 코 아래는 엄마 얼굴을 닮아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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