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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Jul 07. 2024

9. 울렁대는 가슴 안고

울릉도에서 보낸 운명의 7일이 18년 후 비극의 만남이 될 줄이야.

(2005년 1월 20일, 포항 여객선 터미널)        

동해의 겨울 바다는 맑은 날에도 파고를 예측하기 어렵다. 울릉도 가는 배편이 기상 악화로 벌써 두 번째 [운항 통제]라는 안내 문구가 떴다. 비수기의 한적함을 누리려는 여행객들과 육지로 나와 생필품을 사가는 원주민들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28시간째 발이 묶여 있었다. 오전 열 시 삼십 분 출발하려던 엘도라도 익스프레스호는 울릉도에서 나오는 시간을 고려해서 마지막 출항 시간을 오후 두 시로 연기했다. 이마저도 출항하지 못하면 다시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오후에는 출항이 가능할 거라며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행객들이었다. 원주민들은 하루 이틀 겪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런지 태연했다.   

지영은 말없이 앉아서 여객선 터미널 바깥 풍경만 바라봤다. 정호는 여객선 [안내 데스크]에서 운항 관련 정보를 들은 후 지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오후에는 배가 뜬다네. 이번에도 결항되면 울릉도 말고 다른 곳으로 가자.”

“…….”

지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호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서 지영의 목에 감아주었다. 지영의 목에서 앞 매듭을 묶으며 지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먼바다였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말이 없는 지영.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정호의 눈에는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쏟아 낼 것만 같았다.

“다행히 오후에는 배가 뜬데.”

정호는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지영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지영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울릉도는 3대가 착한 일을 해야 바로 한 번만에 들어갈 수 있데. 독도는 어떤지 알아?”

“…….”

“미리 허가를 받아야 들어갈 수 있데. 하하하.”

“…….”

정호는 애써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서 웃기려고 하니 어색하기만 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지영의 미소였다.     

“지영아, 아재 개그 하나 해줄게. 잘 맞춰 봐.”

“…….”

“추장보다 높은 사람은 누구게?”

지영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냥 뚫린 귀로 듣고 흘려보내기만 할 뿐.

“역시, 모르는구나? 정답은 고추장.”

여전히 표정변화 없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고추장보다 높은 사람은?”

“…….”

“모르겠지? 정답은 초고추장.”

순간 지영의 입꼬리에 엷은 미소가 드리워졌다. 정호는 그 순간을 놓칠세라 다시 이어갔다.

“자, 이제 마지막이야. 초고추장보다 더 높은 사람은?”

“…….”

“태양초 고추장.”

“어이구.”

드디어 지영이 미소를 지으며 반응했다.

“그래.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여세를 몰아서 몇 개만 더해줄게. 이번에는 꼭 맞춰 봐.”

“알았어.”

정호는 신났다. 지영의 어두운 그림자가 조금씩 걷어졌다.

“사격 선수가 총을 대충 쏘면?”

“이건 알겠는데? 대총 대총?”

“아니야. 설렁~ 탕 설렁~ 탕.”

“호호호. 말 되네.”

“자가용의 반대말은?”

“영업용?”

“커용.”

“뭐야? 호호호.”

“돌잔치를 영어로 하면?”

“스톤 파티?”

“락 페스티벌.”

지영은 조금 생각해 보더니 금방 이해하고 웃었다. 정호는 지영의 텐션이 떨어지지 않게 바로 이어갔다.

“발기부전인 사람에게 절대 오지 않는 날은?”

“발기부전인 사람? 뭐지?”

“설날.”

“호호호. 맞네.”

“김치가 가위바위보에서 바위를 냈는데 진 이유는?”

“바위를 냈는데 졌다고?”

“묵은지니까.”

“호호호, 오빠는 그런 걸 다 외우고 다니나 봐? 예전에도 그러더니 여전하네.”

“아니, 네가 하도 멍 때리니까 공부 좀 했지. 화장실 가서 연습도 하고.”

지영은 정호의 그런 모습이 좋았다. 옛날 연애할 때도 그랬었다. ‘내가 이 남자랑 결혼했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정호의 노력이 통한 걸까, 지영은 정호를 바라보며 웃었다.

“오빠, 고마워. 나 다시 웃음 찾을래. 조금 웃었더니 배가 고프다. 우리 맛있는 거 먹자.”

“그래. 포항 하면 과메기. 아니면 대게. 뭐 먹을래?”

“나 웃게 해 줬으니까 내가 대게 살게. 우리 대게 먹으러 가자.”

“야, 야. 네가 산다고? 이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코 묻은 돈은 안 얻어먹는다. 내가 사줄게. 가자.”

“오빤 참 여전하다. 난 이렇게 많이 변했는데.”

여객선 터미널 근처 대게 간판이 크게 걸린 집이 보였다.

“저기 대게 집 있다. 저기로 가자. 너무 멀리 가면 배 시간 못 맞출 수도 있으니까.”

“그래.”

대게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겨벼워졌다. 지영은 익숙한 듯 정호의 팔짱을 꼈다. 20대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지영은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아픔의 시간을 건너뛰고 정호와 사랑했던 시간이 바로 지금까지 연결된 느낌이 좋았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정호도 지금시간 만큼은 서울에서의 자신은 잊어버리고 싶었다. 오직 한 여자만 생각했다.     


포항에서 울릉도로 가는 가장 빠른 배는 엘도라도 익스프레스였다. 2시간 50분이면 도착했다. 두 시간 넘게 선상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육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달랐다. 높은 파도가 온몸으로 느껴질 때 너무나 미약한 인간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끝없는 수평선을 쳐다보면 마치 점 하나에 불과한 사람의 모습에서 대자연 앞에 저절로 겸손해지기까지 했다. 바다가 보고 싶은 마음은 이런 걸 느끼고 싶어서일까? 콘크리트가 없는 곳, 인공적인 장치가 없는 곳,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곳, 그저 광활하게 펼쳐진 대양의 푸른빛만이 욕심도 버리게 만들고, 먼지같이 보잘것없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곳. 바다는 그런 곳이었다.     

둘은 선상 난간에 서서 차가운 겨울 바다를 보며 잠시 생각에 젖었다. 정호가 적막을 깨며 말했다.

“근데, 지영아. 왜 하필이면 울릉도야?”

“오빠, 서운한데!”

“뭐가?”

“오빠 군대 입대하기 전날, 그때 오빠가 말했어. 우리 나중에 결혼하면 신혼여행은 울릉도로 가자고. 내가 제주도도 아니고 왜 하필 울릉도야?라고 했더니 오빠가 말했잖아.”

“어, 그래 맞다. 내가 신혼여행은 울릉도로 가자고 했었지. 이유는 뭐라고 했더라?”

“기억 안 나? 그때도 아재 개그처럼 말했었잖아.”

정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래. 생각났다. 신혼여행은 울렁대는 가슴 안고 울릉도로 가야 한다고.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 이제 기억나? 난 오빠가 지나가는 말로 해도 다 기억해. 내가 그만큼 오빠를 사랑했었으니까.”

정호는 고맙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연락도 끊고 사라졌어? 그렇게 사랑했다면서. 내가 얼마나 널…….”

정호는 창원 바닷가 마을 기억이 겹쳐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오빠, 그게 뭐가 중요해. 지금 내 옆에 있는 오빠는 20대 연애하던 그때 오빠인데. 단 며칠만이라도 내 사랑……. 내가 사랑하는 오빠. 거추장스러운 거 아무것도 없이 나랑 단둘이 있는데.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아니, 분에 넘쳐. 그래서 감사해, 오빠.”     

정호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발갛게 상기된 지영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지영은 정호의 따뜻한 온기에 행복한 눈망울로 정호를 바라봤다. 정호는 지영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오래된 기억의 세포들이 온몸을 타고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지영은 자연스럽게 입술을 허락했다. 정호의 혀가 지영의 입술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지영은 정호의 혀를 자신의 혀끝으로 치켜세우며 다시 천천히 좌우로 감싸 핥았다. 정호의 혀도 지영의 혀가 도는 방향으로 리듬을 맞춰 천천히 돌았다. 쫓고 쫓기는 혀의 현란한 움직임. 정호는 아내와 키스를 안한지 오래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느끼는 짜릿함이 황홀했다. 선상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발소리. 둘은 아쉬운 여운을 남기며 떨어졌다. 정호는 얼른 옷매무시를 다시 가다듬었다. 지영은 황홀한 기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정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빠, 고마워. 사랑해.”

“나도. 사랑해, 지영아.”     

잠시 후 울릉도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우리 배는 곧 울릉도에 도착 예정입니다. 승객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객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영은 정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곧 이어질 두 사람만의 황홀한 시간을 생각했다. 가슴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정호가 말한대로 울렁대는 가슴안고 울렁도로 가는 기분이었다.

“오빠 말이 맞네.”

“뭐가?”

“울릉도 말이야.”

정호는 지영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오른팔로 그녀의 어깨를 힘껏 감싸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울렁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어. 너랑 똑같아.”

멀리 울릉도의 모습이 보였다. 둘만의 신혼여행 1일 차가 석양빛처럼 이미 불타고 있었다. 그날의 불타는 사랑이 18년 후 비극으로 이어질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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