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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Feb 26. 2024

좋은 시간, 나쁜 여자(14)

14. 누구냐, 넌?

“당신 요즘 왜 그렇게 바빠요?”     

수정이 정신줄 놓은 사람처럼 피곤에 쩔어서 집에 들어오는 남편 정호에게 말했다. 그 말에 정호는 수정이 바람피우던 장면이 떠올랐다. 대답 대신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눈으로 집중시켜 레이저를 쏘고는 말없이 서재로 들어갔다. 수정은 다정했던 남편이 갑자기 돌변한 것에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혹시 저 사람이 내 뒤를 캐고 뭔가를 아는 게 아닐까?’ 수정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더는 채근하지 못하고 남편 뒷모습만 바라봤다. 마음 한쪽에서는 제주도 촬영 시 마음으로나마 잠시 흔들렸던 기억이 살아났다. 촬영감독과 꿈에서 나눈 섹스장면이 너무나 생생했다. 촬영장에서 감독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흥분 된 감정이 그대로 들어가곤 했었다. 그러자 무언가 불끈 솟아오르는 게 있었다. 그 힘에 그만 서재를 향해 소리를 질러버리고 말았다.     

“당신, 그렇게 살거면 이혼해. 나도 더는 못 봐주겠어. 아이들도 모두 자랐고 이제 눈치 볼 것도 없어. 당장 이혼해.”     

서재는 조용했다. 예전 같으면 정호가 바로 뛰어나와 잘못했다고 빌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 없었다. 수정은 이왕 내친김에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서재 문을 열고 그만의 공간으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들어갔다. 정호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내 말 안 들려. 당장 이혼하자고.”     

수정이 다가가자 정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정의 말에 동의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수정은 그의 반응에 조금 놀랐다. 평소 알던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후회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당신이 고개를 끄덕인 건 동의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돼?”     

정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없이 말했다.     

“당신 하고 싶은대로 해. 그리고 지금 서재에서 나가줘.”     

수정은 갑자기 어이가 없어졌다. 그래도 질수는 없었다.      

“내일 이혼서류 보낼테니까 서명해줘. 재산 분할은 내 변호사가 알려줄거야. 그리고 아이들한테는 아직 알리지 마. 그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백수정다운 말이었다. 지금껏 그녀의 사업으로 아이들 교육과 생활비를 담당했었다. 남편 정호의 공무원 월급은 그녀가 보기에 그저 용돈 수준이었다. 회사가 힘들때는 남편이 혹시 월급을 모아서 목돈을 만들어 놓은 게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위기 조차도 그녀 스스로 해결했었다. 이제까지 내 그늘 밑에서 마음껏 누려놓고 이혼하자는 말에 순순히 동의한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이 집에서 기여한 건 하나도 없어. 그러니 재산분할 같은 건 꿈도 꾸지마. 다만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했으니까 위자료는 챙겨줄게.”     

그러니 위자료 몇 푼 받고 나가 떨어지라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정호는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한가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현경과 현경의 엄마 사고. 수정의 바람 장면을 잡겠다고 현경이를 끌어들인 것부터 실타래가 잘못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적인 도리를 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황과 아내 수정의 이혼 요구. 정호는 이 모든 게 수정의 외도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더는 수정을 잡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 정호는 10일간 휴가를 냈다. 현경 모녀의 교통사고 처리와 현경 엄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사고자 보험회사의 과실인정과 치료비, 합의금 등 걸림 없이 진행되었다. 현경 엄마의 경우 장례비까지 지원되었다. 이 모든 걸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정호가 처리할 수 있었던 건 도덕적 양심에서 우러나온 것 뿐이었다. 그것도 수정과 이혼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정호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다. 현경 엄마의 장례를 치르면서 입관하는 절차에 참여하지 않았다. 죽은 현경 엄마의 얼굴을 보고 나면 지워지지가 않을 것 같았다. 장례식장에서 절차를 공지하며 참여할 것을 요구했지만 정호는 심장이 약하다면서 거부했다. 그래서 한 줌의 재가 되고 나서 하얀 항아리에 담겨진 모습으로만 볼 수 있었다. 납골당에 안치 했지만 사진 한 장 없는 공간에 덩그러니 항아리와 꽃만 꾸며줄 수 있었다. 그 사이 현경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아직 의식은 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린 것이 있다면 죽은 현경의 엄마가 첫사랑 지영과 나이가 같다는 것이었다. 생일은 달랐지만 나이와 이름이 같아서 처음에는 많이 놀랐었다.     

 

현경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 정호는 집으로 가서 자신의 옷가지와 책, 물건 등을 정리했다. 당장 옮길 수 있는 곳은 현경이가 살고 있던 김포 오피스텔이었다. 물론 자신의 이름으로 계약을 한 자신의 소유였지만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다소 어색하기까지 했다. 짐을 모두 옮겨놓고 현경이가 입원해 있는 아산병원으로 갔다. 면회시간은 10분. 그것도 환자 상태에 따라 불가할 수도 있었다. 올림픽대로를 달려 아산 병원에 거의 다다랐을 즘 한통의 전화가 왔다. 차량 모니터에 ‘아산병원 중환자실’이라는 글자가 떴다. 정호는 차량 스피커폰으로 전환해서 받았다.     

“김현경 환자 보호자 분이시죠?”

“네. 그런데요.”

“환자분 의식이 돌아왔어요. 조금전에 눈을 떴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거의 다 도착했어요. 금방 갈게요.”     

정호는 현경의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기쁜 감정도 잠시, 엄마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 엄마의 죽음은 당분간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말하지 않는 게 좋겠어.’

차는 올림픽대로에서 천호대교 출구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오른쪽으로 아산병원을 끼고 돌았다. ‘현경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호는 멸균실에서 하얀 방호복으로 갈아입었다. 안내를 따라 중환자실 입구로 갔다. 호출 벨을 누르자 안에서 간호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김현경 환자 보호잡니다.”

“네, 이쪽으로 오세요. 면회시간은 10분입니다. 환자 의식이 돌아왔지만 아직 말은 못 합니다. 눈만 뜨고 사람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절대 안정이 필요하니까 충격적인 말이나 행동은 하지 마시고요.”

“네. 그럴게요.”     

정호는 현경이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현경은 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눈은 감고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정호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링거줄에 연결되어 있는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현경아, 나야. 아저씨야.”     

현경은 미동도 없었다. 정호는 현경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잠시 후 현경이 눈을 떴다.      

“현경아, 아저씨야. 나 알아보겠어?”     

눈을 뜬 현경의 시선이 내 얼굴에 맞춰지는 순간 현경의 눈이 놀라움으로 반짝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경은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술만 가늘게 떨릴 뿐 입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현경아, 말하지 않아도 돼. 천천히 돌아올 거야. 일단 나를 알아보면 됐어.”     

그러자 현경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눈을 크게 깜빡였다. 정호는 간호사에게 종이와 볼펜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한글 ‘ㄱ'자부터 ’ㅎ'자까지, 모음 ‘ㅏ'자부터 ’ㅠ'자까지 써놓고 한 글자씩 눈을 깜빡이며 맞춰가자고 말했다. 맞으면 크게 한번, 틀리면 짧게 두 번.     

“현경아, 나 알아보겠어?”라고 묻고 ‘ㄴ’와 ‘ㅔ'를 가리키자 눈을 크게 한번 깜빡였다. 알아본다는 뜻이었다.

“내가 누구야?”라고 묻고 ‘키다리 아저씨’라고 쓰자 아니라고 짧게 두 번 깜빡였다. 그러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현경이는 나를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렀었다. 이번에는 내 이름 ‘김정호’라고 쓰자 크게 한 번 깜빡였다. 이상했다. 현경이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부르거나 말 한 적이 없었다. 정호는 다시 한번 물었다. “내 이름이 김정호인 줄 알고 있었구나?” 라고 말하고 ‘네’ 자를 써 보였다. 그러자 현경의 눈이 크게 한 번 깜빡였다.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키다리 아저씨라고 썼을 때는 아니라고 말하고 내 이름을 썼을 때 ‘네’라고 답한 것이다. 이번에는 정호가 “너는 누구인지 알지?”라고 묻고 ‘네’라고 써 보이자 크게 한 번 깜빡였다. “그래, 현경아. 너 이름은 김현경이야.”라고 말하며 ‘네’라고 써 보이자 이번에는 짧게 두 번 깜빡였다. 정호는 깜짝 놀랐다. 현경이는 지금 자신이 김현경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호는 현경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번에는 네 이름을 말해봐.”라고 말하고 자음과 모음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정호는 현경이가 대답한 걸 조합해 놓고 나서 다시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현경의 모습을 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의 이름은 “이지영”이었다. 현경이 엄마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의 이름을 그녀가 알고 있었고 나를 알아본다고 대답한 것이다.      

“누구냐? 넌?”     

그리고 다시 자음 모음을 가리켰고 그 결과는 믿을 수 없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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