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퍼루키 Jun 11. 2022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할아버지 잘 들리시나요?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5월이 찾아왔다. 아침엔 꽤 선선해 출근길에 긴팔을 입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가도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는 길엔 난데없는 햇살에 하늘을 향해 눈을 잔뜩 찌푸리게 된다. 그러다 저녁엔 이렇게 선선할 데가 없어 산책이라도 나가야 하는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마치면 그땐 다시 쌀쌀해지는 요상한 변덕을 보여준다.


  날씨도 제멋대로인데 나도 맘대로 직장을 나서서 여기저기 쏘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월급쟁이 신세라도 유지하려면 매대 앞에서 이런 속 마음을 숨기고 밝은 척 웃으며 손님을 맞이 해야 한다.


  문이 열리고 할아버지 한 분께서 처방전을 들고 들어오셨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지만 허리는 꼿꼿하시고 걸음걸이도 뚜벅뚜벅 걸어오시는 게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노인’의 이미지에서 풍겨오는 불편함은 없으셔 보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자 내 말을 들으신 건지 아닌지 고개를 까딱,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아주신다.

  “어디가 불편하셔서 오셨어요?” 질문을 연달아 하자 약간 귀찮으신 표정을 지으시길래 얼른 질문을 거두고 처방전을 들고 조제실로 들어갔다.


  속으론 되게 무관심하신가 싶으면서도 대꾸조차 귀찮은가 싶었다. 황당한 마음 조금, 당황스러운 마음 조금, 마지막으로 무안한 마음까지 속에 풀어놓고 조제를 시작했다. 조제가 완료되어 할아버지 이름을 불러 약을 드렸다. 약을 받자마자 가시려고 하길래 얼른 붙잡았다. 피부 질환약이라 용법이 크게 어려운 건 없지만 이것저것 설명할 거리들이 조금 있었다. “자~이거는..”하고 말을 시작하려는데 대뜸 “응, 고마워요~”하시더니 다시 짐을 주섬주섬 싸시는 게 아닌가. 이쯤 되면 경험 많은 약사님들은 대충 눈치챘을 텐데 아직 경험이 미숙했던 나는 할아버지가 약간은 미워지기 시작했다. 왜 내 말을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귀가 좋지 않으셨다. 보청기를 꼈음에도 사람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대충 입모양을 보거나 주변 시선의 느낌을 보고, 상황을 지켜보는 등 소리를 눈으로 들으셨다. 그 사실을 알게 되니 괜히 조금씩 담았던 내 마음이 휙 부끄러움으로 물들어 버렸다.


  편견을 가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알지 못한 부분에서 이렇게 마음대로 판단해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무리 날씨가 제멋대로 였다지만 내 마음도 이미 제멋대로였나 싶어 한참을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할아버지는 내 태도에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병원에선 제대로 다 알아들으신 건 맞으실까 이런저런 폭넓은 오지랖까지 하고 나서야 불현듯 또 제멋대로 방치하면 한 없이 가겠단 생각이 들어 얼른 생각의 꼬리를 잘라버렸다.


노부부의 소통방식


  맑은 하늘에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던 어떤 하루가 있었다.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으나 하늘이 저리 맑은데 비가 올까 하는 마음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던 날이기도 했다. 비가 내리는 걸 보며 퇴근길 걱정을 하던 찰나에 노부부 한쌍이 약국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을 꼭 잡고 약을 사러 왔는데 정작 약 이름을 몰라서 서로가 애를 먹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꽤 크길래 목청이 좋으신가 보다 했는데 할머니 귀가 좋지 않아 그런 거 같았다. 얇은 아크릴 창을 사이에 두고 셋이서 약을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찾는 약이 없는 듯 보였다. 이것저것 보여드리며 서로가 이거 같은데 저거 같은데 반복하는 와중에 할아버지는 나와 할머니 사이에 서서 답답할 법도 했지만 차분하게 할머니와 대화를 하셨다. 그래도 원하는 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메모장과 볼펜을 빌려 종이 써서 말씀하셨다. 결론은 약의 포장지가 바뀌어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었고 맞게 약을 잘 사가셨다.


  두 분은 사이가 참 좋아 보였다. 대게 약국에 오는 노부부들은 함께 들어와서는 무뚝뚝하게 서있거나 모르는 사람처럼 서로 멀찍이 앉아있다가 볼 일을 다 보고는 나가는 길에 이름을 부르는 게 정답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두 분은 서로에게 다정하게 행동하고 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사실 약국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산책하는 가족을 보아도 보통 엄마 아빠들은 걸음의 속도가 달라 아빠는 저 멀리에, 엄마는 저 뒤에 있는걸 흔하게 볼 수 있다. 젊은 부부도 걸음의 속도를 맞추기 어려운데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서로의 말의 속도를 맞추는 건 더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나의 일부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걸 알게 되는 일이다. 세월이 흐르며 나의 오감이 점점 흐릿해진다면 그것만큼이나 아쉽고 서러운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곁에서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주고 집중해서 내 말을 들어준다면 결코 시간이 야속하지만은 않으리라.

작가의 이전글 아저씨, 박카스 하나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