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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루키 Jun 23. 2022

아침을 여는 사람들.

  새벽부터 핸드폰 알람이 세차게 울린다. 5시 30분, 마치 새벽을 여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나는 아침형 인간도 저녁형 인간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일어나 등교를 했고 밤에도 새벽까지 지새우지 않고 평범하게 잠을 자는 학생이었다. 그러던 내게 첫 근무지는 반강제적으로 나를 새벽에 일으켰다.


  새벽에 일어나는 자체는 힘들지만 나름 보람도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코를 향해 쏘는 것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틈 속에서 하루의 시작을 깨우는 중요한 일원이 된 듯한 느낌도 좋았다. 무엇보다 새벽에 일어나면 뭘 하든지 간에 한참 뒤에 시계를 보아도’아직 이것밖에 안됐나?’라는 생각에 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는 느낌이 썩 괜찮았다. 이래서 사람들이 <미라클 모닝>에 열광하는구나 싶었다.


  나의 출근 시간은 오전 7시까지였는데 7시 10분 전까지 도착해서 약국 문을 여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집을 나서 차가운 공기를 쐬면 기분은 좋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처음엔 긴장의 원인을 찾으려 이것 때문인지, 저것 때문인지 따져보았는데 딱히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초짜라서, 혼자 근무해서, 외로워서(?) 등의 일하기 싫은 이유만 잔뜩 찾아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똑같이 출근길에 올랐는데 약국 앞에 거의 도착하던 찰나에 심장이 평소보다 요동치는 걸 알아차렸다. 누군가 불 꺼진 약국 앞에서 서성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과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도착해 약국 문을 열었다.


   닫힌 자물쇠를 열고 불을 켜고 준비를 하는 동안 손님은 이리저리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셨다. 가운을 입기도 전에 내게서 약을 찾는데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보는 모습이 급해 보여 이런저런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약을 내어주곤 가운을 마저 입었다.


   그런데 그 손님은 약국을 나서고 한참 뒤에도 역 앞에 서서 열차 시간표를 보고 계셨다. 별로 급하진 않았던 손님인데 괜히 심장이 쿵쿵거린 것만 같아서 조금 억울했다. 나의 긴장감의 원인이 한 발치 멀리서 보면 어쩌면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니. 


  원인을 알아챘지만 한 번에 긴장이 사라지진 않았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를 굳이 찾지 않았다. 다만 나의 조급함에서 오는 행동이 다른 사람도 조급하게 만들고 긴장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느릿하게 움직이고 천천히 말하려고 노력했다. 


  약국의 위치 특성상 아침에 오는 손님이 많았는데 매번 급한 손님만 오는 것은 아니었다. 아침 일찍 지방에 내려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손님인데 서둘러 준비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남기도하고 역 앞 의자에서 기다릴려니 숙자 씨(노숙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터라 괜히 무섭기도 해서 약국에 오시는 분도 계셨다. 딱히 약이 필요했다기보다 말동무가 필요한 느낌이었다. 대게 쌍화탕 한 병을 사서 조금씩 한참을 마시며 쓸데없이 사사로운 말들을 잔뜩 풀어놓고 가셨다.


  또 역 근처에 있다 보니 특별한 아침을 맞는 날도 있었다. 바로 추석과 설날 명절 기차표 예매 날이다. 그날은 평소보다 두배 긴장한 채 약국 문을 열었다. 마치 낮에 출근한 것처럼 사람들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이다.


  요즘엔 명절 티켓을 구매할 때 인터넷 예매로 할당된 비율이 높아져서 대부분 어플로 바로 구매한다. 하지만 노인분들은 아직까지도 인터넷이나 어플로 하는 법을 모르는 분이 계시고 또 전자 티켓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신 때문에 직접 창구에서 하시는 분이 많다.


  그래서 명절 기차표 예매일이 되면 역 앞은 새벽부터 창구 앞에 줄을 서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다. 여름 끝자락인 추석 예매일은 좀 덜한데 설날 예매일이면 추위를 물리치기 위해 괜히 약국 앞에서 어슬렁거리다 약국이 문 열면 같이 들어와 쌍화탕 한 병씩 드시며 옆에 서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분도 많았다.


  그날은 나도 본가에 내려가기 위해 기차표를 예매해야 하는데 직접 줄을 설 수 없으니 어플로 티켓팅을 준비하며 약국을 문을 열었다. 그런데 꼭 티켓팅 순간엔 손님이 급하게 뭘 찾는 바람에 약을 내주고 나면 어플 속 대기 인원은 이미 저 멀리 넘어가 있었다. 막상 대기시간을 기다려 내 차례가 와도 10분 안에 완료해야 하는데 원하는 시간은 이미 매진이었다. 이리저리 다른 시간을 검색하는 찰나에도 손님이 약을 찾아서 결국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전히 긴장이 남아있긴 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아침 근무에 익숙해지니 손님을 대하는 여유가 늘어나기도 했다. 자연스레 아침을 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다 보면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내면의 치열한 모습이 보였고 나태해진 나 자신이 부끄러운 순간도 있었다.


   아마도 차가운 새벽 공기는 단순히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줄뿐만 아니라 때 묻은 마음을 씻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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