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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루키 May 30. 2022

숨기고 싶은 것들

  보통 뭔가를 숨기고 싶을 때나 비밀을 간직할 때 그 대상이 나와 관계가 있는 지인이나 가족인 경우가 있다. 가까운 관계에게조차 숨겨야 하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다 못해 속이 터질 것만 같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 마음을 배설하기도 한다.


  아픈 것 또한 마찬가지다. 몸이 아픈 것도 그렇지만 마음이 온전치 못한 것도 숨기고 싶은 대상에 포함된다. 하지만 의외로 약국엔 딱히 본인의 것을 숨기지 않고 오는 손님도 종종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눈치가 보여 뭔가를 쉽게 요구하진 못하는데 이상하게 우리 약국엔 전혀 거리낌 없이 찾아와서는 필요한걸 잘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엔 다른 약국에서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약국만 유독 그런 손님이 많았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약국이 역 근처에 있고 조제 중심이 아닌 일반약 중심이다 보니 내부에 기다리는 손님이 많지도 않은데 지나다니는 유동인구는 많아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오는 점들 때문에 조금은 부담 없이 들릴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이야 본인의 마음이 아프단 걸 커밍아웃하는 게 예전보다는 조금 편해진 거 같은데 그때 당시만 해도 마음문제에 대해선 사회적으로 조금 무겁게 들고 가지 않았나 싶다.


  한 번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사람이 약국에 온 적 있었다. 복장과 눈 화장이 너무 특이해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라 한눈에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분은 약국에 들어오자마자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특정 브랜드의 파스가 있는지 매우 큰 소리로 물었다. 목소리 좀 낮추시라고 하며 그 제품은 없다고 말하자 대뜸 소리를 더 크게 질렀다. “왜 그게 없냐, 그렇게 약국 운영해도 되냐”부터 시작해서 소리를 막 지르시더니 결론은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말아라”라고 하시며 가셨다.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손으로 귀를 막았고 옆에 있던 손님도 깜짝 놀라 덩달아 “악”하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그땐 너무 놀랐기도 했고 적절한 대처방안이 없기도 했기에 어안이 벙벙한 채 심장만 쿵쿵 뛰며 손끝이 떨렸었다. 다시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왜 하필 내 근무 시간에 이런 사람이 왔나 하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심지어 내가 마감 근무라 10시경에 문을 닫고 퇴근하는데 저 멀리서 그분이 다시 약국 쪽으로 오시는 것이 아닌가. 잔뜩 긴장하며 괜히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눈을 아래쪽으로 향해 문을 잠그는데 집중하는 척을 했다. 멀리서 들리던 발걸음이 점점 내 근처로 왔고 멈췄다. 그분이 갑자기 휙 고개를 돌리시면서 “나 저쪽에서 그거 샀어! 여기도 그거 팔면 좋은데~왜 안 팔아?” 하시더니 쓱 가셨다. 혹시나 퇴근하는 나를 쫓아올까 무서워서 일부러 돌아 돌아 집을 간 기억이 있다. 


  다음날 약국장님과 교대할 시간이 되었을 때 어제 일을 자초지종 설명드렸다. 다 들으시더니 “아~ 그분” 하시면서 잘 아시는 것이 아닌가. 원래 목소리가 크고 복장이 무서워서 그런데 아직까지 딱히 해가 될만한 행동은 하지 않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사람이 언제 어디서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는데 하는 생각에 며칠간은 긴장한 채 근무를 이어갔던 적이 있다.


  불행 중 다행인지 그날 이후론 그분을 약국 안에서 본 적은 없다. 가끔 창 밖으로 그분이 지나가는 것을 힐끔 쳐다본 적은 있지만 눈이 마주칠까 다시 시선을 돌리곤 했다.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던 탓인지 사실 그분의 속 사정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특이했고 무서웠다는 내 첫인상을 핑계 삼아 숨기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또 세상엔 잘 숨기지만 여기 약국에선 숨기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동성애 관련된 것이다. 인터넷과 뉴스로만 접하면 꽤 많은 동성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막상 현실 속에선 주변에 커밍아웃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커밍아웃이란 단어에서도 느낄 수 있듯 말하는 것 자체가 큰 용기임을 볼 수 있다.


  약국에선 에이즈 검사 키트와 관장약 등이 의외로 잘 팔렸는데 처음엔 그냥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젊은 사람들이 에이즈에 관심이 많구나. 의외로 젊은 사람들에게 변비가 심해 관장약을 쓰는 사람도 많구나.


  물론 진짜 에이즈에 대한 단순한 걱정과 변비로 심하게 고생한 사람이 사갔을 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국에서의 근무일수가 늘수록 특정 제품을 사가는 사람들의 말투와 옷차림 등을 살펴볼 여유가 생기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의심은 한 동성커플의 대화 속에서도 확신이 들게 되었는데 차마 옮겨 적지는 못할 정도로 민망했다.


  이들도 아마 다른 곳에선 꽤나 잘 숨기고 안 들키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약국에선 거리낌 없이 말하고 그들의 성적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다녔다. 어쩌면 이미 커밍아웃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약국 내에서 그들은 당당해 보였지만 약국을 나서서는 사실을 숨기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약국이 좀 더 불편한 비밀을 털어놓기 편한 장소가 아니었나 싶었다.




  본인의 사연을 숨기는 사람도 있었는데 믿거나 말거나 하는 사연을 가진 노숙자도 있었다. 하루는 그분이 약국에 와선 본인 신세한탄을 하다 나지막이 속삭이듯 본인 소유의 건물이 몇 채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당연히 허풍이겠거니 하고 믿지 않았다. 누가 봐도 노숙자의 행태를 하고 실제로 노숙도 하는데 건물주라니. 


  그러던 어느 날 약국장님과 잠시 이야기를 하다 놀라운 사실을 들었는데 실제로 그 노숙자는 잘 나가던 사장님이었다고 했다. 아주 옛날 잘 나가는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고 건물도 몇 채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쫄딱 말아먹어서 지금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한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과거에 안 잘 나가던 사람이 어디 있겠어’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에 약국장님이 한마디 덧붙이셨다. 근데 그 사람 본인 명의는 아니지만 본인 소유이긴 한 아직도 처분하지 못한 건물이 몇 개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세상엔 두 가지 비밀이 있다. 하나는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비밀과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비밀이 있다.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비밀은 정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꽁꽁 숨기면 그만이지만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비밀은 비밀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어딘가에 털어놓지 않으면 오히려 본인의 마음이 아파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약국에 와서 비밀 아닌 비밀을 비밀 아닌 척 털어놓고 가는 거 같다. 그렇게라도 배설을 해야 숨통이 틜지도 모른다. 비밀을 알게 되는 많은 직업 중 약사는 아무래도 가장 문턱이 낮은 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접근성도 좋고 쉽게 말하기도 좋고 또 나름의 전문성을 지닌 사람들이기에 아마 오늘도 어딘가 약국에서는 숨기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비밀을 털어놓거나 비밀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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