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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un 07. 2024

비행기를 놓칠 때 일어나는 일

당신은 남고, 수하물은 간다

당신은 비행기를 놓쳐본 적이 있는가? 무전기를 든 항공사 직원이 전동 카트에 손님을 태우고 탑승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모습이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탑승객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위 “Last Call” 안내 방송은 공항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거의 모든 탑승객이 자리에 앉아 비행 준비를 마쳤을 무렵 땀범벅이 되어 캐리어를 끌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는 소위 “지각생”을 보면서 속으로 살짝 비웃은 적도 있겠지. 나 또한 그랬다.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국제선은 최소 두 시간 전에, 국내선은 한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탑승 수속을 하도록 권장한다. 하지만 성수기 여행 시즌이나 당일 공항으로 향하는 교통 상황 등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너무 많다. 그러니, 차라리 라운지에서 맘 편히 쉬겠다는 생각으로 항공사가 권장하는 수속 시간보다 한 시간에서 30분 정도 더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하자는 것이 나의 철칙이었다. (아주 중요한 출장이거나 아이들을 동반해야 하는 여행일 경우, 여기에 30분 정도 더 서둘러야 마음이 편안하다.)


그날이라고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당시 미국 주재원으로 휴스턴에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아이들 여름 방학을 맞아 한국에서 휴가를 보낸 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고, 경유지인 시애틀에서 사흘 정도 도시 구경을 마치고 비로소 휴스턴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머물고 있던 숙소도 공항 인근에 위치해 있었고, 어디까지나 국내선이었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탑승 시간은 아직 한 시간 반 가량이나 남아 있었단 말이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빠른 보안 검색 수속을 원하느냐"는 생전 처음 들어본 질문을 들었을 때, 조금 싸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유료라는 설명에 고민도 하지 않고 "No"를 선택했다. 이제까지 미국에서 지내면서 수도 없이 국내선과 국제선을 탑승했지만, 보안 검색 때문에 비행기를 놓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애써 찜찜한 기분을 달래며 보딩 패스를 받아 들고 보안 검색장으로 들어선 순간, 난생처음 보는 긴 줄(게다가 사람들의 움직임이 거의 없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 없는)을 보고 나는 망했음을 직감했다.


미국 공항의 보안 검색은 매우 엄격하기도 하고, 그만큼 시간 오래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911 테러 이후 항공기 탑승객과 기내 수하물에 대한 검색 절차가 까다로워지기도 했고, 교통안전국(TSA)의 업무 처리 속도에도 한계가 있다 보니 보안 검색에만 1시간이 훌쩍 넘게 소요되는 공항들이 속출하게 된 것이었다. 일부 공항들은 민간 보안 업체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공항에서 여행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공항에 더 빨리 도착하는 것" 뿐이었다.


처음 와 본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의 보안 검색장은 장난이 아니었다. 딱 봐도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우리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얼굴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아마도 익숙한 것이리라. 시계를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우리 앞의 줄은 아직 한참 남아있었고.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빠른 보안 검색 수속을 택한 사람들이 검색장 한편을 여유 있게 (그리고 빠르게) 통과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No"를 고른 내 선택을 저주했다.


이제 탑승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앞사람에게 보딩 패스를 보여주며 먼저 좀 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게 어디 한 두 사람의 양보를 받아서 해결될 일인가? (내 앞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은 못해도 100명은 되어 보였다.) 게다가 여기는 "공정"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웬 일,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앞에 줄을 서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서 먼저 가라며 순서를 양보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뛰다시피 아이들의 손을 잡고 검색대를 향해 달려가면서, 나는 뜨거운 인류애(?)를 느꼈다.




그렇게 검색대를 통과하니 출발 시간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탑승구는 터미널의 맨 끝이다. 마지막 관문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가족들을 챙기면서 달리면 늦는다, 내가 먼저 가서 항공기 문이 닫히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혼자 뛰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아내와 아이들 제법 빠르다. 내 뒤에 바짝 붙어 전력 질주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우리 네 식구는 낯선 미국 시애틀의 공항 탑승장을 단거리 선수처럼 달렸지만, 결국 비행기를 놓쳤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망연자실해하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 우리 가족을 불렀다. 항공사 직원이었다. 당황한 우리와 달리, 그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우리를 안심시켰다. "너희 짐은 휴스턴으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제 너희들이 어떻게 집에 갈지 알아볼까?" 하며 몇 차례 컴퓨터 모니터를 검색하던 그는, 오늘 휴스턴으로 가는 직항은 빈자리가 없으니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해서 가는 항공편의 보딩 패스를 건네주었다. 안도감도 잠시, 그가 건넨 보딩 패스에 적혀있는 휴스턴 도착 시간은 새벽 2시였다.


경유 항공편을 타려면 공항에서 반나절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한적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고 앉으니, 비로소 두세 시간 사이에 일어난 엄청난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처음 보는 우리에게 차례를 양보했던, 수많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하지만 너무나 고마운 감정의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기분이 묘했다. 그 다음은 나의 어리석음. "빠른 보안 검색을 원하는지?" 하는 질문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들었던 그 싸한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공항에서 나에게 뭔가를 물어볼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언제든지 싸한 느낌이 든다면 우선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축적된 빅데이터가 보내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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