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루아빠 Sep 01. 2022

개를 싫어하는 개

내가 우리 집 반려견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이유

그해 여름, 우리 가족이 2년 넘게 키우던 햄스터가 세상을 떠났다.


그 햄스터로 말하자면, 유치원생이던 딸아이가 제 엄마를 조르고 졸라서 데려온, 우리 가족의 첫 반려 동물이었다. 나는 햄스터를 키우는 일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미(딸아이가 지어준 이름)”가 사라졌다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를 달래며 온 집안을 뒤져 신발장 한 귀퉁이에서 그 작은 녀석을 찾아내는 것도 내 일이었고, 주말마다 케이지를 청소하고 뽀송뽀송한 새 톱밥을 깔아주는 것도 당연히 내 담당이었다.


어느덧 수명이 다해가던 녀석이 허약해졌을 때에도, 나는 동물 병원 수납 창구에서 “이름은요?”하는 질문에 “미미요…”라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손바닥을 펼쳐 그 작은 녀석을 내보이는 민망함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법 정이 많이 들었던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늦은 밤, 케이지 한 구석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녀석을 발견했을 때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그마한 녀석을 동네 뒷산에 정성껏 묻어주면서 아이들은 엉엉 울었다.




사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개를 좋아했다. 길을 가다가도 개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어쩌다 길에서 만난 개가 손이라도 주는 날이면, 우리도 개를 키워야 한다고 아내를 몹시 졸라댔다. 개를 키우는 일은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며 줄곧 반대하던 아내가 조금 누그러진 것은 그 작은 햄스터가 세상을 떠난 그쯤이었다. 나는 아내의 생각이 도로 바뀔세라 서둘러 애견샵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하루”를 만났다.


그때 태어난 지 채 두 달도 안되었던 하루는, 마치 장식장처럼 애견샵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케이지의 유리문 너머로 말갛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티푸(말티즈와 푸들의 믹스견)라는 견종이 낯설다는 생각도 잠시. 유리문을 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나를 핥으려고 할짝거리는 녀석을 품에 안은 순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녀석을 집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 하루를  “사왔다”.


하루는 똑똑한 녀석이었다. 아직 예방 접종이 한참 남은 새끼였지만, 배변 훈련, 혼자 집에 있는 훈련을 금세 배워 익혔다. 걱정하던 아내도 이렇게 영리한 줄 알았으면 진작 데려올 걸 그랬다며 기특해했다. 그러니까 녀석은, 마치 사람과 함께 아파트에서 사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아주 모범적인(?) 애완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녀석이 조금 유별나다고 느낀 것은, 예방 접종이 모두 끝난 것을 기념해 온 가족이 함께 찾은 애견 카페에서였다.


개들이 서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바닥에서 함께 뒹굴며 장난을 치는 그곳은, 말하자면 애완견들의 놀이터였다. 하지만, 크고 작은 다양한 견종들이 서로 어울려 신나게 뛰노는 그곳에서, 하루는 내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냄새를 맡으려 다가오는 다른 개들을 경계했고, 때로는 사나운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자꾸만 내 품을 파고들며 어서 집에 가자는 신호를 보내는 녀석이 못내 안쓰러웠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동안에도 하루는 나를 찾곤 한다


개들은 태어나고 몇 달 동안 부모견, 형제견들과 함께 지내면서 소위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내가 애견샵에서 하루를 만난 것이 불과 생후 2개월이 안되었을 무렵이니, 녀석이 제 어미와 함께 지낸 시간은 채 한 달이나 되었을까? 그렇게 “사회화”라는 과정을 건너뛴 아이는 사람을 무척 좋아하고, 사람과 함께 사는 요령을 잘 배운, 아주 착한 애완견이 되었다. 하지만, 제가 개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가끔 우리 가족은 이런 대화를 나눈다. “하루가 말티푸라면, 엄마랑 아빠 중에 누가 푸들이었을까?” 정말 궁금해서라기 보다는, 제 어미의 체취와 온기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녀석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어째서 예전의 나는, 너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어딘가 버려졌을지 모를 너를 구해와야겠다고 먼저 생각하지 못했을까? 유기견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조금 더 사려 깊지 못했던 나를 자책하게 된다. 오늘도 내 품을 파고드는 녀석을 쓰다듬으면서 충만한 기쁨과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애견인이 죽으면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넌 아이가 마중을 나와 꼬리를 흔든다고들 한다. 그때 하루 너는 혼자서 멀거니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기를. 부디 네 어미와 형제들 틈에서 신나게 뛰어놀다가 내가 보이면 반갑게 달려와 맞아줬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20세기 군대의 기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