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여씨- 충남 부여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부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미리 말하자면 부여는 한 국가의 이름이기도 하였고, 어느 왕조의 왕족의 성씨이기도 하였고, 구체적인 지명으로도 남아있다. 그럼 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번 글의 지향점은 바로 이 '부여, 부여, 부여!'를 잘 이해하자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우리 역사 속 다양한 부여를 어떻게 일관된 맥락을 갖고 이해할 것인가? 이것이 오늘의 글의 목적이라 하겠다.
먼저 국가 명칭으로서의 부여이다. 부여는 고조선의 멸망 이후 무주공산이었던 옛 고조선 지역에서 새롭게 성장한 국가였다. 오늘날 만주 벌판을 무대로 하는 지역이었고, 이곳은 이러저러한 부여족의 갈래들이 여기저기에서 국가를 형성하는 단계에 있었다고 본다. 실제 부여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북부여는 고조선이 그 운명을 다할 때쯤, 서서히 고조선의 변방에서 성장하고 있던 세력으로, 아무리 늦게 잡아도 약 BC 2세기경부터는 그 존재가 확실히 보인다. 비록 3세기경 선비족의 침입으로 세력이 약화되어서 중심지가 이동하였고, 그 존재감이 미미해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고구려 문자왕 3년 (494년)에 고구려에 의해 병합될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역사 속에 존재한 국가가 바로 부여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건국신화는 워낙 갈래가 다양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어렵다. 일반적인 건국신화에 따르면 부여를 건국한 이는 해모수라고 한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숭배의 강력한 증거이다. 자칭 하늘의 자손임을 드러내는 일은 부여, 고구려, 신라 등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통? 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는 하백(강의 신)의 딸 유화와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데 그이가 바로 고주몽이다.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와서 압록강 근처의 졸본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졸본부여 집단과 동맹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바로 고구려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한동안 졸본부여라 불리기도 했다. 이쯤 되면 우리 역사의 구체적인 시초라 할 삼국시대의 중심국가인 고구려와 부여는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우리 역사의 실체로 이해될 만한 국가 체제였다고 본다.
다음으로 성씨로서의 부여에 대하여 알아보자. 우리가 전래 동화쯤으로 읽었을 수도 있던 주몽의 이야기는 이렇다. 부여를 떠나올 때 주몽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고, 부인을 남기고 홀로 길을 떠났다. 훗날 고향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주몽의 아들이 바로 '유리'다. 유리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증표인 조각난 칼을 찾아들고 졸본부여로 내려와서 고구려의 두 번째 왕이 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졸본부여의 실세로서 주몽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소서노는 자신의 자식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는다. 이때 비류는 인천지역인 '미추홀'에 자리를 잡고, 온조는 오늘날 송파지역인 위례성에 자리를 잡는다. 시간이 흐르자 온조의 세력이 강성해 지고, 결국 비류 세력은 온조 집단에 흡수되고 마는데, 온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다. 온조는 백제의 왕성(왕족의 성씨)을 부여씨라 정하였다.
5세기는 고구려의 전성기였다.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되자, 백제는 다시 남쪽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선 금강을 건너 급히 도읍을 정한 곳이 공주(당시 지명은 웅진)였고,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국세를 펼치기 위해 사비 지역으로 수도를 옮긴다. 그리고 한때 성왕 때는 국호를 남부여라 정할 만큼 백제는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는 부여 계승 의식을 갖고 있던 나라였다. 그뿐인가. 부여가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해서 그 운명을 다한 것은 아니다. 고구려가 망한 후 딱 30년 만에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갖고 건국한 나라가 발해였다. 발해에는 부여부라는 중요 행정구역이 존재하였다. 그러하니 우리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부여는 다양한 의미로 살아 숨쉬었던 것이다. 이렇게 부여, 고구려, 백제, 발해 등은 역사적인 계승관계를 갖춘 우리 역사의 실체들이었음을 빌드-업 해보자.
이제는 지역 명칭으로서의 부여를 보자.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의 오늘날 이름이 바로 부여이다.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잘 짜인 가짜 뉴스가 전하는 그 도시, 무왕이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가짜 뉴스를 퍼뜨려서 결국에는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취하였다는 서동요의 '아름다운?'전설이 존재하는 그 도시가 바로 오늘날 부여이다. 조선에서는 이 지역을 부여현으로 이름하기도 했다 하니, 이 도시의 오늘날의 지명도 그 근원이 그리 얄팍하지는 않은 듯하다.
마지막으로 부여의 문화적 중요성에 대하여 덧붙여 보자. 중국의 역사서에는 부여에 대하여 ‘흰옷을 즐겨 입는다’라고 기록했는데,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르는 것의 근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한번쯤 되새겨볼 점은 우리 역사의 시작은 지리적 공간도 광대했고, 민족적 구성도 웅장했다는 것이다.
만주와 한반도 전체를 아울렀을 뿐 아니라, 광개토대왕 때는 시베리아 근처와 몽골고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활동무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한반도 남부로 축소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상황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또한 만주에 활동하였던 다수의 북방민족과 어울려, 섞여 살면서 삶을 영위해왔던 우리 민족의 초기 역사를 생각해보면, 단일민족이란 허구에 천착하여 배타성을 강하게 보이는 지금의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상태는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임을 교육현장에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