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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긴 조선 라인-업

역사 속'조선s'

   우리 역사에는 조선이란 국호가 많다. 고조선, 단군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 조선 그리고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등등.  일단 조선의 의미를 살펴보자. 조선(朝鮮)의 한자는 '아침 조, 고울 선'이다. 그러니 우리가 잘 아는 표현 '고요한 아침의 나라' 뭐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를 지리적으로 해석하면 (중국에 비해) 일찍 해가 뜨는, 그 아침 빛이 좋은 지역이란 의미였으니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있는 유력한 지역이었다. 


  앞에서 말한 여러 조선들 중에서 가장 큰 카테고리는 조선과 고조선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중요하지만 시기상 차이가 있는 두 조선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기를 기준이 되느냐가 문제인데, 아시다시피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기준이 되면서, 그 옛날 고대에 존재한 조선은 '오래전 혹은 고대의 조선'이란 의미의 고조선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라 생각할 분도 많겠지만, 몰랐던 사람도 은근히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이렇게 한마디 사족을 붙여본다. 


  고조선은 환웅 부족이 남하해 와서 곰 부족과 연합하여 나라를 세웠음을 '환웅과 여인으로 변한 곰이 결합하여 낳은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신화를 통해서 추론할 수 있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익히 외우다시피 하는 BC 2333년이란 연대는 믿을 것도 그렇다고 안 믿을 것도 없다. 그 연대기에는 원(몽골)의 지배를 받던 그 시절,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왔던 것으로 '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의 요순시대와 맞먹을 때부터 나라를 세운 민족이야!' 뭐 이런 자존심이 존재하는 것쯤으로 해석하자. 


  어쨌든 중국 역사서에서 고조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시기는 대체로 BC 6~7세기 무렵이다. 그 시기는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로 중국의 여러 제후들이 제각각 세력을 펼치며 급기야는 스스로 왕으로 칭하는 무리들이 나오는 시기가 되겠다. 대체로 고조선 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와 진`한 교체기쯤과 맞물린다. 


  중국의 전국시대는 중국 안에서 철기가 대단히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시기였다. 이런 전국시대를 통일한 왕조가 진이었지만 그 진은 너무 강압적인 정치를 함으로써 민중의 반란이 일어나 곧 멸망하고, 바로 그 뒤를 잇는 중국의 왕조가 바로 한나라이다. 진이 망하고 난 다음 주인이 되는 과정에서 경쟁했던 나라가 바로 초와 한이었다. 이 둘의 경쟁이 지금껏 놀이로 남을 것이 바로 장기이다. 장기에 나오는 왕 말에 쓰인 한자가 바로 초(楚)와 한(漢)인 것이다. 역사에서 승자는 한(漢)이다. 이때를 세계사에서는 진`한 교체기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교체기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낡은 질서가 온존 하는 과도기적인 어수선함이 있는 시기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이 혼란기에 존재한 인물이 바로 위만이다. 고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뜬금없이 만나는 위만조선을 세운 인물이 바로 이 위만이다. 그를 현대적으로 설명하자면, 한반도 지역 출신으로 중국 변방에서 활동하던 인물, 즉 단군조선 출신의 중국 교포? 정도가 되겠다. 그러니 고조선이라 할 때에는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이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위만의 형색에 대하여 중국 기록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상투를 틀고 조선인의 복색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오랜 헤어스타일의 상투와 함께 중국과는 옷 여미는 방향이 다른 조선인의 복색을 하였다는 것은 그가 조선계열의 사람이란 하나의 근거가 된다.  


  위만은 중국 상황이 계속 어지럽자,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고조선 지역으로 들어왔다. 당시의 고조선의 지배자였던 준왕은 그들에게 서쪽 변방의 수비를 맡겼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위만이 고조선으로 돌아올 당시의 고조선은 아직 철기문명, 보다 적확하게는 철제무기에 익숙지 않았을 것이나, 철기문화가 보편적이었던 중국에서 활동했던 위만은 철기문명(무기)과 함께 들어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강력한 무기로써 준왕을 밀어내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위만이 왕이 되고도 이전 정권의 사람들을 높은 관직에 중용했음을 보면, 지배자가 바뀌었을 뿐, 고조선의 계통성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 고왕국만큼이나 그 역사가 깊은  고조선은 그만큼의 오랜 시간의 스토리를 갖는다. 여기서 잠깐, 내가 여렸던 시절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또 다른 고조선의 시기를 공부한 적이 있다. 기자는 은나라가 망할 무렵의 사람으로, 은이 망하고 주나라가 등장할 때 대부분의 은나라 왕족이나 귀족들은 죽임을 당하였지만, 이른바 성인군자의 반열에 있던 기자는 주 무왕이 살려줬을 뿐 아니라 벼슬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동쪽으로 가서 조선을 세웠다고 한다. 훗날 주 왕실에서는 기자를 조선후(朝鮮侯, 조선 땅을 다스리는 제후)에 봉하였다 하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하여 한동안 준왕의 성씨가 기씨라고 기록한 역사책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는 이성계의 조선이 성리학을 표방하고, 급기야는 기자를 우리 지역에 왕도정치를 베푼 왕으로 개념정립을 함으로써 기자조선을 (의도적으로) 만들뿐 아니라 높이기까지 하면서 역사에 약간의 왜곡이 일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기자조선은 현재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기자가 존재한 시기도 우리의 고조선의 시기와 많이 차이가 나고, 기자조선을 뒤받침 할 고고학적 증거물이 전무한 상태일 뿐 아니라, 이것이 정치적으로 잘못 이용될 경우에는 일본의 식민사관이나 동북공정의 논리로 작용될 소지도 있고 하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설득력 있는 견해가 존재한다. 준왕의 성씨가 한 씨라는 이른바 한씨 조선설이다. 이에 따르면 준왕의 가계는 고조선 내부에서 새로 등장한 지배세력, 한 씨 성을 가진 집단이 아닐까 한다.  후한 시대의 왕부라는 사람이 쓴 <잠부론>에는 "주나라 선황 때 한후(韓候, 한씨 성을 가진 제후)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 후 한의 서쪽에도 성을 한()이라 하더니,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다로 간 자를 준왕으로 보면, 그의 성씨는 기 씨가 아니라 한 씨라는 것이다. 


  이것이 맞냐, 저것이 맞냐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도 명확하지 않다고 뻔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중국 측 사료에 의존하는 것이고, 중국의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반론을 제기할 어떤 역사서도 갖지 못한 우리의 역사는 얼마든지 각색될 위험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조선구마사' 스캔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마도 중국 진출의 기대를 안고 우리 역사를 적당히 각색하고 재미만 있으면 될 거라고 간단히 생각했을지 모르나, 최근 종편 등에서 방영된 여러 사극들의 코미디화나 전혀 고증되지 않은 '허구'로서의 역사는 엉뚱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할 위험성이 크다. 그만큼 미디어, 특히 영상이 갖는 힘은 강력하다. 


  좀 오래된 에피소드 하나. 탤런트 최수종 씨가 왕건으로도, 대조영으로도, 장보고로도 주연을 했던 시기가 있었다. 사극을 열심히 보아왔던  어떤 학생이 " 그러니까 선생님 왕건이 발해를 세운 거죠?"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 '한 사람이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사극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위험하구나!' 였다. 그들 드라마는 내용상으로는 역사를 훼손하거나 왜곡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국가 체제란 오늘날의 국가와는 사뭇 다름을 이해해야 한다. 국가 규모가 그리 큰 것도 아니어서 몇몇 부족 간의 이합집산으로 국가가 형성되기도 한다. 그래서 노자가 국가의 이상적인 크기를 '이웃의 닭 우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한' 정도의 소국을 설정한 것이 당시로는 크게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당시에는 다양한 크고 작은 집단이 중국의 혼란기를 틈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가운데 역사를 전개시키고 있던 중이었음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할 것이다. 위만의 등장이나 준왕의 이후 행적 등도 이런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위만조선은 당시 한반도 남부의 진국(辰國)(마한, 변한, 진한으로 분화하기 이전의 정치 세력을 이름)과 (당시 일본 서남부에 거점을 두고 무역이나 외부 활동을 했던 부족 국가적 무리들을 말함) 그리고 북방의 (濊, 고대 북방에 존재한 우리 민족의 총칭) 등과 한(漢) 나라 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면서 급성장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니 한나라에게 위만조선은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만리장성을 쌓고 흉노를 만리장성 밖으로 완전히 밀어냈던 한무제는 다음 정리해야 할 세력으로 위만조선으로 보고 침략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흔히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 졌다는 말이 있는데, 위만조선의 상황이 딱 그랬다. 한무제의 거센 공격 앞에서 위만조선이 개별 전투에서 지지는 않았지만, 싸움이 길어지자 고조선 내부에서 항전파와 투항파의 분열이 일어났다. 투항파였던 이계상 이 보낸 자객에 의해 우거왕(위만의 손자로 고조선 마지막 왕)이 죽음으로 긴 역사를 끝내게 된다. 이계상은 관직 명이고 상이란 것을 보아하니 정승급, 아마도 제 2인자 정도 되는 인물일 것이다. 어쨋든 대체로 융성했던 나라의 멸망 이면에는 이런 내분이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도 역사의 루틴이다. 


  이후 한나라는 옛 고조선 지역에 4개의 직할 군을 설치했다고 전해지는 데 이를 한4군이라고 한다. 한사군은 토착세력의 저항에 직면하여 결국 폐지되거나 지역을 이동하여 다른 곳에서 새로이 설치되어었다. 따라서  한반도는 한동안 무주공산과 같은 힘의 공백기에 들어갔다. 이 공백기에 다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등장한 새로운 정치세력이 바로 부여와 고구려였던 것이니, 우리 역사의 시작은 바로 고조선으로부터임이 보다 분명해진다. 


  그럼 이대로 (고)조선은 끝?이었을까? 아니다. 단군조선이 마지막 왕이었던 준왕은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아랫녘으로 내려갔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조선 아래 지역(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에는 아직까지는 그리 조명을 받지 못하지만 진국(辰國) 체제가 있었다. 고조선에서 도망쳐온 준왕의 무리는 진국의 입장에서는 마치 준왕에게 위만이 그랬듯이 우세한 집단이었다. 보다 우세한 이질적 집단이 들어옴으로써 잔잔했던 진국 체제가 크게 요동하면서 다시 이 지역에 이합집산의 복잡한 과정을 겪게 된다. 이것의 결과가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마한, 변한, 진한 등의 삼한 체제인 것이다. 


  삼한은 마한, 변한, 진한으로 그중에서 마한이 가장 큰 세력이었다. 마한은 대체로 경기, 충청, 전라북도 일대를 장악한 세력이었다. 여기서 잘 이해해야 할 것은, 훗날 등장하는 삼국, 즉 고구려` 백제` 신라조차도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일원화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주변 여러 크고 작은 부족들과 연합한 체제가 매우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삼한 체제는 어떻겠는가. 그러니 마한이란 이름으로 엮인 크고 작은 부족 체제의 세력들이 많았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시라. 그중에 가장 큰 세력이 바로 목지국이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목지국은 처음에는 아마도 천안`아산 근처쯤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보는데, 좀 있다 다시 북방 고구려로부터 내려온 온조 집단이 한강 유역에 백제국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서 남하해 오자 영산강 유역 나주쯤으로 세력이 위축되고 근거지를 옮기면서 소멸해 갔다 할 정도로, 처음에는 마한지역의 작은 소국으로 첫발을 내디딘 백제가 훗날에는 마한의 다음 맹주가 되면서 본격적인 삼국시대를 여는 정치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변한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낙동강 서쪽의 오늘날 경남 정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 훗날 가야 연맹체가 나오는 것이니 가야의 원조가 되는 지역이다. 진한은 낙동강의 동쪽 대체로 경북 일대였다. 우리가 잘 아는 신라가 바로 진한의 작은 소국 사로국이 발전한 것이니 삼국의 원형이 바로 이 삼한에 있고, 삼한은 곧 진국이었으며, 진국은 역사적 조명을 잘 받지는 못했으나, 북쪽의 고조선과 함께 동시대 반도의 남쪽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던 세력이었다.   


  이 시기의 여러 정치세력들의 흥망성쇠를 학생들이 가장 막연해하고, 어려워해서 조각난 지식으로, 단편적인 용어 중심으로 그야말로 '외우는' 것이 현실이다. 역사는 암기 과목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분야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는 서사(스토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무한한 스토리를 상상할 수도 있고, 탐구할 수도 있으며, 이미지를 그려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은 우리의 문화자산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좋은 소설이나 시, 영화를 통해 역사를 아는 것이 가장 좋은 방식이고, 교실을 벗어나 박물관이나 미술관, 유적 등 현장을 답사하면서 보고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수업이라는 생각을 놓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교실 안, 교과서 중심이다. 우리의 역사 교육은 그 시작부터 삐뚤어져 있는 것이 안타까움을 넘어 때론 분노가 치밀 때가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교육정책 입안자도, 결정권자도 아니기에 이렇게 지면에서나마 푸념을 늘어놓을 밖에. 독자 여러분이라도 나를 우쭈쭈 해주시기를 바라며 하소연이라도 해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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