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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여자는 무얼 잃어버렸나

홀로 뉴욕 여행을 떠나면, 찾을 수 있을까?

by 여행하듯 살고

이제 아이들이 대학교 가면서 독립할 날이 6년 정도 남았다. 아직은 내가 어디 훌훌 여행 갈 팔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꿀 같은 기회들이 생기더라. 이 꿀 같은 기회들은 한낮의 꿈일까?


아이들 교회 청소년부 수련회로 잠시 떠나 있는 4일 동안의 황금 같은 시간이 주어질 예정이라, 혼자서 멀리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드문 기회인 만큼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느껴진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게 팍팍 밀어준 남편을 위해서라도.


아이들과 남편 없이 나 홀로 여행을 계획하면서, ‘잘 쉬다 오자'로 방향을 정했다. 그런데 잘 쉴 거면 집이 더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지, 혼자 여행이라고 요란스럽게 들떠 있는데 여행을 통해서 '무엇'이라도 건져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 여행에서 무얼 얻을 수 있을까?


여행을 익숙한 것에서
나를 잠시 떼어 내어
돌아보는 것이라고 할 때,

난 그 낯선 시간들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까.




- 엄마의 하루 -

아이들이 나가고
내가 들어왔지만
나는 어디 간 걸까
오늘은 찾을 수 있을까

손과 발이 바삐 움직이며는
찾게 될 수도 있을 거 같아
그저 몸을 맡겨본다

접고
개고
닦고
빨고
썰고
볶고
손과 발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다

그러다
예전에 놓아두고 온 곳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 뿌연 이미지 속에는
나를 닮은 누군가가
내 고향집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듯이

그 여자가 잃어버린 것이
내가 잃어버린 그것인가

——————

어느새 아이들이 돌아오고
내 몸은 더 바빠진다

그 분주함 속에
나는 또 흩어져 버린다
또 나는 어디로 간 걸까

흩뿌려진 그것들을
모아 붙이면,
내가 찾는 그 무엇이 되기도 할까




아이들의 삶이, 남편의 커리어가 또렷해질수록

가정주부로, 조력자로 남아있는 나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


꼭 그렇지도 않을 텐데, 아이들을 키워온

15년 동안 가끔 그렇게 밀려드는 생각을

주체할 수가 없을 때가 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내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남녀 동등하니 결혼 생활은 공평하게 만들어가야 하고,

육아는 당연히 똑같이 나누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살아보니 현실은 만만치 않았고,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도 원래 생각을

놓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별별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낯선 땅에 살면서 내 일을, 육아와 내조와

함께 가지려 노력했을 때는 내 몸이 망가지더라.

몸이 망가지니 마음도 무너져 내리더라. 여러

도전과 방황 끝에 슈퍼우먼은 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슈퍼우먼 비슷한 흉내를 내 볼 수 있겠지만, 그러면

감정 다 억누르고, 쉼 없이 기계처럼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지금의 나를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여러 경제적, 인적 조력을 고려한 내 능력치에서는

이미 미련 없이 최선을 다 해본 것이니까.


현실에 안주해 보기로 스스로 합의 보고는

감사한 것만 보려고 노력했다. 남편이 믿음직스럽게

자기 일을 잘하는 게 참 감사하다. 가정적이고 여전히

사랑해 감사하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감사하다.


그래서 하루하루는 대개 보람 있고 행복하다.

건강하게 사랑스럽게 자라나는 아이들, 사랑을 넘어

이제는 전우애까지 느껴지는 든든한 남편, 외롭다고

느낄 새 없는 바쁜 생활이 매일 나를 기다린다.

오히려 흐르는 급류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바람에 그저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을 뿐이다.


두 인격체를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온전히 사랑으로

길러내는 일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일인 듯하기도

하다. 남편이 자기 자리를 잘 잡고 의미 있게 살아내는

것에 부인의 내조가 한 몫하고 있다고 인정해 주는

여러 분위기도 감사하다.

내가 내 커리어를 고집해서 어떤 일을 한 듯, 나라를

구할 만한 중요하고 큰일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더는 미련 없이,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인정한다.


그냥 내가, 한 번씩 밀려오는
현타만 잘 다스리면 된다.


그 현타는 대개 비교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을 잘 키우면서 본인의 커리어를

멋지게 끌고 가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을 마주하게

될 때 그 농도는 더 진해진다.

여태껏 휴직 후, 임신 전부터 오늘까지

별 노력을 다 해왔다. 자아실현을 위해서.

결혼 후에도 계속 중학교 선생님으로 일했지만

미국에 오게 되면서 잠깐 일을 쉬기로 했다.

몇 개월의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는 앞으로

이 낯선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많아졌다.

나는 아이를 낳더라도 내 일을 꼭 하고 싶었다.


출산 전 후로 공부해서 둘째가 두 살 즈음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남의 말을 쓰며 공부하는 것은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결국 여러 이유로 마치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리고는 한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발판으로 고등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일도 해봤다. 아이들 돌보며 출퇴근하는 것이 힘들어서, 대신 집에서 쇼핑몰을 운영해 봤다.


그게 어쩌다 코로나 락다운의 혜택을 보게 되어 잘 나갔고, 그걸 발판으로 클래스 101 강의도 만들었다. 2021년 최다 판매 강의 안에도 들었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내가 했던 쇼핑몰과 강의는 지속 가능한 모양이 아니었다. 내공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단 클래스 101 강의 영상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했던 이력을 발판 삼아 지나영 교수의 유튜브 영상 편집일을 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내 커리어를 만들고 싶었다. 전문 편집인이 될만한 실력이 아니었기에 그쪽은 아니니 일찍 그만두는 게 나았다. 그리고는 너도나도 뛰어드는 블루오션으로 보였던 유튜브로 뛰어들었다. 그래 내 꿈도 초딩들의 그것처럼, 잘 나가는 유튜버가 되는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 지금과 같은 기회로 처음으로 혼자 집에 있게 되었을 때 쓴 일기를 발견했다. 내 최대 관심사는 아이들 교육도, 재테크도, 노후 준비도 아닌 항상 내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여전히 진로 고민 중 2024.7.13

다음 주 월-목요일까지 아이들과 남편이 집에 없을 예정이다. 휴가 같은 시간, 아무도 신경 안 써도 되고, 밥을 안 차려 줘도 되고, 내 시간 온전히 내가 다 써도 되니 그 귀한 시간에 뭘 하면서 보내야 할까 즐거운 상상을 했다. 유튜브 요리 영상을 찍을까? 청소 영상? 아님 여태껏 찍어 놓고 안 썼던 비디오들로 영상을 만들어 볼까? 쓰려던 소설을 제대로 시작해 볼까?


즐거운 상상이, 결과에 대한 압박으로 초초한 생각들로 바뀐다. 영상을 한 두 개 더 만들다고 유튜브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 계속하게 될까… 소설은 정말 쓰면 책으로 나올 수나 있을까, 파친코의 이민진 작가는 뒤늦게 작가가 되었다고 해도, 떡잎부터 다르지 않았나…

이리 글을 쓰니 영상 만들 아이디어가 좀 떠오른다. 그동안 찍어 놓은 영상에 내 지금 고민들 소망들 잘 풀어내 보자. (일단 그럼 조용할 때 요리 막 찍어야 되겠네… 프렌치토스트, 원팬 토스트, 투움바 파스타, )

영상에 넣을 대본이라도 써보자.


딸 아들 둘 다 타주로 교회 수련회를 가서
집에 없는데 남편도 출장을 갔어요.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
혼자 집에 며칠 동안 있는 건 처음이에요.
방학하며 더 많아진 라이드 때문에 쉼이 좀 필요
했는데, 뭐 해먹일까 끼니걱정까지 날아갔어요.

그 귀한 시간 뭐 하지 즐거운 고민들 하다가
문득 그 시간을 그냥 낭비해버리고 말면 어쩌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어요. 또 쓸데없는 걱정을.


유튜버 해그린달처럼 따뜻한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해그린달은 영상 60개 정도로 구독자 200만 명을 모았다. 본인 영상으로 삼성 에어컨 광고까지 했다. 한편 한편이 감각적이면서 아름다운 영상이라 광고 같다는 댓글도 많이 있다.


영화 세트장 같은 깔끔한 집에서 요리하며 아들 돌보며 일까지 하는 따듯한 엄마. 겸손하고 예쁜 마음까지 엿볼 수 있는 자막들. 평범한 일상을 영화처럼 특별하게 보이게 하는 기획력. 해 그린 달처럼, 그 비슷한 영상을 만들면 금전적 보상 이상의 자아실현을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유튜버가 되겠다면 반응이 비슷하게 나온다. 그게 되겠어? 그런데 그 꿈을 품은 사람들은 '나는 다를 거야'라고 확신한다. 성공한 롤모델을 보며,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꿈을 꾼다. 나도 그랬다. 분명 있을 거다. 그렇게 꿈을 꾸면서 비슷하게 이루어 간 사람들이. 그렇지만 그게 나는 아니었다.


유튜브 영상을 진지하게 이년 가까이 만들면서 진지하게 고민했던 게 있다. 나는 직업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미국에 살다 보면 "넌 직업이 뭐야? 어떤 일을 해?라고 직접적으로 묻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종일 열심히 영상 만들고 편집을 하며 "일"을 하지만, 내 직업을 유튜버로 소개할 수가 없었다. 아직 그걸로 돈을 못 벌로 있기 때문에. 그럼 돈을 벌어야지만 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소설가가 글로 돈을 못 벌면 작가가 아닌가? 현실이 슬퍼졌다.


그냥 당장 돈을 벌러 나가는 게 나을까?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본 시급을 받는 일은 내 자아실현이랑 거리가 있어 보였다. 돈이 아쉬울 때가 많아도 절박하지는 않고, 지금 스케줄에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아르바이트하는 건 무리가 된다.




나는 여전히 내 일을 하고 싶다.
그 생각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바쁘다는 건 성실함을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게 곧 만족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아이들 라이드로, 집안일로, 남편 일 함께 돕는 걸로 매우 바쁘게 지낸다. 그렇지만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바쁜 하루를 지나오면 정작 "내"가 있었나 의문을 품게 되는 날들이 종종 있다.


이런 일상에서의 답답함이 때론 갑갑함으로 나를 옥죄었다. 뒤늦게 도전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가정주부로 살다 인스타에서 대박 난 내 또래 아줌마부터 칠십이 넘어서 백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 박막례 할머니까지 너무 부러웠다.


그냥 나도 지금 이 자리에서,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박막례 할머니의 손녀 PD 같은 행운이 굴러들어 올까? 내가 지금은 모를지라도, 내 행적이 그런 행운을 만들고 있는 거라고 믿어도 될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중, 미쉘 오바마가 한 인터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편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게 되면서, 본인이 하고 있던 일을 내려놓는 게 아쉽지 않냐는 질문에 자기는 "직업"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 아니다고 답을 했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서 잘 나가는 변호사로 일하던 미쉘이 일을 그만해야 하는 걸 대수롭지 여기다니. 고작 정규교사 자리를 사직하면서 꽤나 슬펐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라는 존재를 내 "일"을 통해 제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고, 그 마음을 끝내 내려놓지 못했던 나는 뒤통수를 한대 세게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에는 나라는 사람이 내 "직업"이나 "하는 일"로 규정되는 게 아니다고 되뇌었다. 미쉘같이 저런 자신감이 나한테도 있었으면, 직업이 있냐 없냐 어떤 일을 하냐 등과 상관없이 내 삶을 좀 더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내 삶에서 무언가 빠져있는 듯한 부분이 '제대로 된 커리어가 없음' 때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건 진작 인정했다. 그래도 간간이 드는 아쉬운 마음들이 아직 남아있어서, 호시탐탐 나를 공격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 마음의 찌꺼기 같은 그것들을 좀 처리하게 될까.


이번 홀로 여행을 통해서,

잃어버린 듯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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