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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승 Apr 09. 2024

사소한 몽상 한 조각

그러니까 이건 지극히 사소한 몽상 한 조각 같은 거였다.


나는 열 살 전에 죽을 거야.


일종의 타이머처럼 열 살까지 제한선을 그었다. 그건 내가 삶을 좀 더 유하게 바라보는 데 유용했다.

어떤 일이 닥쳐와도 곧 죽을 거니까, 라는 전제가 깔리면 그렇게까지 못 견딜 일은 아니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어른스럽고 의젓하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좋았다. 내가 집중력이 짧고 융통성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 게 차라리 나은 편이란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더 나이 먹으면 들통날 일들이었다. 나는 그 나이까지 살아서 들키기 전에 죽을 거니까. 그러니까.


그러나 내가 아주 비참하고 괴롭고 엉망인 삶을 살아서 죽길 바랬냐고 한다면, 아니었다.

죽는다는 건 인간이 아닌 형태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거였다. 나는 인간의 형태로 살아가는 게 자주 버거웠다. 단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쉽게 해내는 일들이 내게는 따라가기 힘겨운 때가 많아서, 그래서.


세상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최대한 제한선을 미뤄 열 살까지로 정해두었다.


가을이면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운동회를 했다. 엄마와 이모들이 도시락을 싸 왔고, 나는 김밥을 우물거리며 돗자리에서 놀다가 정신없이 이어 달리기를 하러 뛰어가곤 했다.


그때 학교에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부르며 둥글게 모여 춤을 췄다.

그 노래를 부를 땐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하며 아팠다. 그 느낌이 좋으면서 불편했다. 그래서 가끔 울었다.


분단이나 역사에 관해서는 몰랐지만, 그런 소원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슬플 거란 건 알았다.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알게 되는 순간 나는 어제보다 더 자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라고 싶지 않았다. 영원히 한 자릿수 나이에 머문 어린이로 남고 싶었다.


모르는 감정들이 싫었다.

어떤 노래를 책을 사람을 만난 순간 넘쳐나는 감정들. 단순히 슬픔과 기쁨으로 나눠져 있던 영혼이 마구잡이로 갈라지고, 그 사이사이에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들이 가득 들어차곤 했다.


여름밤 성장통으로 끙끙대며 무릎을 감싸 안은채 잠들곤 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자라느라 그런 거라며 웃었다.

고통 뒤에 찾아오는 것이 고작 키가 자라는 거라니, 나는 조금 허무했다.


성장통을 겪고 나면, 영원히 살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나는 벌써 열 살이었다. 그리고 나는 죽음을 바라면서도 영원히 살기를 바랐다. 삶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삶을 사랑하게 된 것이 두려워졌다. 더는 이전처럼 어른스럽고 무난한 아이로 지내지 못할 것이었기 때문에.


늘 차지하고 있던 아빠의 품 안에는 동생들이 들어가 앉고, 나는 어린이만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서러워하는 모습이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귀여운 투정 정도였겠으나, 내게는 모르는 세상에 한 발 내던져지는 정도의 충격이었다. 막막한 외로움. 외로운 나. 아주 어린것도 다 자란 것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 어중간한 나.


죽어버릴까. 하지만, 나는 할 일이 있어. 내일 할 일이 ㅡ


그 시절 아이들은 아무 종이에 아무 말이라도 써서 딱지를 접었다.

우리는 그 딱지를 주고받는 것을 우정의 증표라 여겼다. 설령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 해도, 그건 당연히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러니 딱지를 받지 못한 아이들은 스스로를 아주 불행히 여겼고, 정기적으로 주고받는 아이들은 집 한편에  아무 말 대잔치인 종이 조각들을 켜켜이 쌓아두며 다가올 우정의 종말을 ㅡ"중학교 가도 우리 영원하자!"ㅡ 준비하는 것이었다.


모아둔 딱지는 죽은 우정의 껍데기처럼 그득히 쌓여있었다. 나는 이것들이 더는 소중하지 않게 느껴질 날이 오게 될까, 하며 가만히 딱지들을 만져보고는 했다.


타이머는 알람처럼 자주 울렸다. 너 언제 죽어? 언제 죽을 건데? 벌써 열 살이야. 열한 살이 되었어. 열두 살이 됐구나. 열세 살인데, 지금 뭐해?


그러면 나는 누군가에게 약속한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찔려왔다. 슬그머니 되뇌곤 했다.


죽을 거야, 지금은 말고.


좋아하는 노래가 더는 아름답게 들리지 않게 됐을 때.

지금껏 알아 온 친구들을 전부 잊어버렸을 때.

모아 둔 편지들이 한 낱 종이조각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게 될 때.

귀신이 더는 무섭지 않고, 가을 하늘을 올려다봐도 가슴 벅차지 않게 될 때.


나는 열 살을 넘기면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새로 배운 감정들에 휘감겨 무엇이 소중한지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날뛰게 될 줄로 알았다. 끝내는 다 무뎌진 마음으로 달을 보고도 길을 잃게 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삶의 제한선을 좀 더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사소한 몽상 조각. 어중간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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