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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식 Nov 07. 2023

외로운 구멍 가게에서 물고기를 사랑하는 마음

찰리빈웍스 - 우리 사랑은


원래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할 계획이었다.


라부안 바조 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라스 앞에 앉아 담배를 연신 태우며 글을 쓰고 있다. 마땅한 숙소가 없는 것 같아 일찍이 실망했다가, 여행 전 급하게 예약한 다이빙 샵 1분 거리의 게스트하우스 테라스다. 맛있는 소이라떼를 파는 로컬 카페의 2층에 위치한 소박한 이 공간이 어쩐지 사랑스럽다.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사흘 간의 코모도 다이빙 트립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까. 만타 레이를 만날 수 있는 포인트들을 되짚어보며 알맞은 계절에 찾아왔다고 환영해주는 선선한 밤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찬 기가 적당히 빠진 빙땅 한 병이 훌륭하다.


아침 저녁으로 훌륭한 풍경을 보여주었던 파우파우 카페 앤 게스트하우스의 테라스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예기치 못한 불행은 최대한 컨트롤된 좋은 여행의 딱 중간을 지나고 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나니 멋지고 근사한 어른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이 나를 채운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그것으로만 꾸려진 안정적인 휴가를 즐길 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글은 여기에서 멈췄고, 여행 중 세 편 정도는 글을 쓰기로 했던 다짐과는 달리 한 편의 완성된 글과, 미완의 글을 두어개쯤 저장해둔 채 한국에 돌아왔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이른 아침 입국해 집에 잠시 들러 씻은 뒤 출근하면 알맞겠다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나를 욕하며 부랴부랴 화성으로 내려갔다가, 12시간 쯤 회사에서 뜻하지 않은 노동에 시달린 뒤 만신창이가 된 채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비즈니스 타고 오면 바로 가서 일할 수 있을 줄 알았지... ^_^


쓰던 글이라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말끔히 사라졌고, 공사다망한 한 달 간의 일상에서 글쓰기는 다시 우선순위에서 밀려지게 되었다. 


사실은 그보다는 쓰고 싶은 게 또 쓸 수 있는 게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여행 중엔 대체로 홀로 있게 되었다. 그 때마다 사랑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생각은 쓰기에 대한 생각, 즉 써야 한다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 것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김금희의 '식물적 낙관'을 읽으며 사랑해야 정확히, 자세히, 그리고 자주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러니 쓸 수 있는 게 없는 나는 사랑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런 생각들 사이에는 누가봐도 수상한 논리적 비약이 있지만, 그게 분명한 내 감정임에는 틀림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일상을 보내면서도 종종 그런 생각은 멈출 수 없었다. 그 많던 사랑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이런 일들과 저런 만남 속에 부유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으니 정말로 상관이 없었다. 


가장 최근의 연애를 끝내고, 당분간 - 그리고 가능하다면 길게 - 연애는 좀 쉬어야겠다는 말에 외롭지 않겠냐는 주연의 걱정에도, 난 이제 그런 마음 같은 건 잘 안 들던데 나이가 드는 게 이래서 좋은가봐라고 얘기하기도 했으니까. (강릉 여행의 명대사 '캐주얼'도 같은 맥락이었을테고) 그렇게 괜찮기만 하면 나름 건강한 삶의 방식이니까, 하며 자기 긍정하고 넘어가면 좋았을텐데...


주연과 외로움에 대해 얘기했던 간만의 여좋시 타임. 예쁜 인생네컷을 남기고 외로움을 무찌르러 주연은 떠났다.



지난 수요일의 일이다. 긴 출장을 다녀온 보스께서 호출하셔서 친한 몇몇과 술자리를 가졌다. 으레 그렇듯 1차부터 과음이었고, 2차에서는 만취에 이르러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도망치려다 언니들에게 양팔 붙들려 귀가했는데 (언니들은 내가 추노 당했다고 명명해주었다) 다음날 또 다시 호출당한 점심 해장 타임에 보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 요즘 외롭냐?" 어리둥절해하는 날 보며 웃기다는 듯 보스는 말을 이어갔는데, 그러니까 내가 2차 테이블 내내 보스 맞은 편에 앉아서 턱을 괴고 가끔은 눈도 찡긋거리며 보스를 열심히 꼬셨다는 것이다 (..) 근데 뭔가 단순한 플러팅의 느낌은 아니었고, 꽤나 진지하게 "날 왜 사랑하지 않지?"라는 식이었다고.


그 이틀 전 월요일의 일도 얘기해야 한다. 심란한 소식을 듣고 역시 그렇듯 계획치 않게 과음을 했다. 자정이 넘어 2차로 간 바에서 잠시 혼자 남겨졌다. 그 짧은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60이 훌쩍 넘은 엄마가 그 시간에 전화를 받은 것도 신기한데, 꼬장을 성심성의껏 받아주었다. 그 앞의 말들은 다 기억나지 않고, 대뜸 "엄마 나 사랑해?"라고 물었다. 외로움에 반쯤 돌아 엄마한테까지 플러팅을 해버린 것. 그 때 단 한 순간의 망설임 없이 건너편에서 돌아온 대답이 아름다웠다. "그럼. 엄마는 우리 세희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지."


잘못한 것이라고는 김세희의 엄마로 태어난 죄밖에는 없는 임여사님. 


그저 절반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한살 어려진 감각이 한참은 이상했던 2023년, 올 해 내가 가장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물고기, 그 중에서도 만타일 것 같다. 오로지 만타를 보기 위해 찾아간 코모도 북부 바닷가 한 가운데에서, 몇 번의 실망 끝에 마침내 만타를 만나고 출수했을 때 샵 오너의 딸이자 그날의 마스터였던 벨기에 언니는 일러주었다. "세희, 너는 지금 만타 블레싱의 순간을 만난 거야. 이 순간은 앞으로 네 삶에서 절대 잊혀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 말은 짧은 마법과도 같아서, 지겨운 일상에 돌아와 환멸스러움을 떨칠 수 없을 때마다 우아한 날개를 한껏 젖히며 유유히 물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던 만타 영상을 보며 순간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후술할테지만 좀처럼 당첨운 같은 건 없는 나에게 2등을 안겨 준 만타 사진과, 라부안 바조에서 망원동을 떠올리게 했던 훌륭했던 젤라또집의 만타 쿠키 장식


그러면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은 누구였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 물론 나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주는 엄마도, 미래 설계로 바빠져 나를 소홀히했던 괘씸한 세라도, 말그대로 공사다망한 주연과 예원도, 매일 얼굴을 보는 화성의 귀여운 친구들도 사랑하긴 하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예전 블로그에 아주 오랫동안 적혀있던 '매일매일 새로운 사랑을 합니다'라는 소개글과는 다르게, 새롭게 사랑할만한 사람은 곁에 나타나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 사실이 너무 나를 외롭게 했다.


꽤 긴 시간동안 부정했던 외로움과 다시 마주해본다. 사랑하기는 싫지만 그렇다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그런 마음들을 부정해보다가 발견한 외로움은 20대의 그것처럼 불안하게도 숨막히게 하기도 했다. 


사랑에 대한 열렬한 찬미와 쓸쓸한 관조 사이를 오가다가 어쩌면 마음을 주는 법 자체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마음 아프도록 자각하며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가을 밤이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결국엔 책으로 숨게 된다.


지난 2016년 1월 21일에 황동규 시인을 만나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그 내용을 정리해 매체에 보냈다. 글을 쓸 때는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이 뒤늦게 떠올라 여기에 적는다. 그날 대담이 끝나갈 무렵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선생님은 외로우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물론 외롭습니다." 그러나, 하고 시인은 덧붙였다. "외로움이 두렵지는 않아요. 내가 외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은 '외로워 죽겠다'가 아니라 그냥 '외롭다'라는 사실을 뜻할 뿐입니다. 내 외로움은 가볍습니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에서


가벼운 외로움이라는 단어를 얻는다. 신형철은 이어 '나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삶은 지독히 외로운 사업이 되고 만다고 지적한다. 외로운 사업이라는 단어를 추가로 얻고, 지금을 다시 돌아본다. 


외로운 사업 정도는 아니다. 외로운 구멍 가게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고 생각하다 웃는다. 신형철은 다시 황동규의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를 인용하며, 외로움이 환해져 홀로움이 되는 순간에 대해 얘기한다. 환해진 외로움은 아직 모르겠다. 신형철 역시 짐작만 할뿐 잘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아는 게 아니라 겪는 것이라고 하니, 아직 내게 그 순간이 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까지 얻고 책을 덮는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랑은, 외로움이 환해져 홀로움이 되는 순간을 알기 전까지 오지 않아도 된다. 외로운 구멍가게를 잘 지키기 위해,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이를테면 만타 영상을 열심히 주변 사람들에게 홍보하며 만타 블레싱을 나누기 (덕분에 팀에서 열린 작은 추석 사진 공모 이벤트에서 2등해서 백화점 상품권을 얻었다), 술 앞에선 헤프게 열지만 공동체를 위한 일엔 인색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매년 조금씩 기부 금액 늘려가기, 사랑해온 친구들과의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고 인스타그램에 태그해가며 추억 강요하기, 이렇게 가끔씩 목젖 치듯 찾아오는 외로움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몸 건강 지수 올리기.


그러다가도 선명하게 찾아온 새로운 마음에 사랑이란 이름 붙이기 싫어서 쿨한 척 하지 말기.



10월의 중반쯤을 지날 때, 그러니까 한참을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 듣던 노래. 


거리를 걷다가 철렁 엎드려도, 마음들은 전부 소중한 것이니, 다시 몰아치는 바람이 찾아와도 사랑을 하라는 말이 용기가 되어주었다. 섬네일에서 말하듯, 어쩌면 우리 모두 평생 숙제처럼 사랑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여정 속을 걷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외로움이 사업이 되었다가, 구멍가게도 되었다가, 홀로움이 되어 환해지기도 했다가 하는 순간들을 묵묵히 걷다보면, 죽기 전엔 답을 쥐고 갈 수 있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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