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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식 Sep 28. 2023

오렌지야 난 널 사랑해

스텔라장 - Orange, You’re not a Joke to me!

뜬금없는 오렌지에 대한 사랑 고백을 변론하자니, 그 어떤 여름보다도 ‘여름이 많았던’ 올여름의 이벤트들이 지나간다.


갑작스러운 이사, 욕하며 출근 도장 찍은 서초사옥, 브루노마스와 오열, 영촤영촤 산호세 출장, 발목 잃은 주연과 서대문구로 복귀한 예원, 샤넬쇼 백스테이지 능가할 만큼 숨 막혔던 영상 통화, 연태 샴페인, 춘풍 막걸리, 일요일 오전 열 시의 화상 수업, 잼버리 나잇, 어린 친구들, 엄마의 등짝 스매싱과 백화점식 결혼, 돗자리맨의 단소 공연, 그리고 정말 생각지 못했던 블랙핑크 마지막 콘서트와 오열까지…  


단 하루 빼놓고 매일매일 스토리 올렸던 8월이 진짜 끔찍히 재밌고 혼란스러웠다


그중 오렌지와 관련 있는 사건이라면 8월로 예약해 둔 수술을 미룬 일이다. 원래도 병원 기피증이 있긴 했지만, 꽤나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사실 수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거의 10년을 데리고 산 반려 근종이 드디어 자궁보다 더 커졌는데,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위치로 자라고 있어서 나도 모르게 생활에 크고 작은 불편을 초래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수술을 한 달쯤 남기고,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구글에 순천향대학병원 콜센터를 검색하고 진료 날짜를 바꿔버렸다. 그냥 수술이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병원에 며칠 동안 입원해야 하는 게 마치 감옥살이처럼 느껴졌다.


병원 기피증이란 무엇인가? 웬만한 일로는 병원에 가지 않는 일을 의미한다. 왜? 우선 귀찮다. 그리고 훌륭한 대안이 있다. 알코올 소독이란 의료 행위도 있듯, 병원에 가는 번거로움을 감내하기보단 술이나 들이켜는 편이 좋은 것이다. 넘어지거나 긁히더라도 흉터가 좀 남아야 반면교사 삼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쯤 되면 모두가 혀를 끌끌 차는데, 그럼 별 이상한 고집으로 남을 빡치게 만들었다는 은근한 쾌감이 덤으로 생긴다.


변명을 위해 조금 진지하게 셀프 정신 진단을 해보자면, 내가 모르는 나의 상태를 누군가에게 선고받듯 진단받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옅게 남아 있는 것도 어느 정도의 몫을 하는 듯


그리고 미치광이 병원 기피증 환자는 수술을 하려던 일정 즈음 강릉으로 떠났다. 서울에서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그럴듯한’ 바다란 이유만으로도 시작은 너무 충분했다. 그 여행은, 김연수의 이번 신작 <너무나 많은 여름>을 빌려서 설명하면 딱 좋을 듯하다.


너무나 많은 소주, 너무나 많은 러닝화, 너무나 많은 바다, 너무나 많은 P, 너무나 많은 원조순두부짬뽕집, 너무나 많은 이야기, 너무나 많은 스쿼트, 너무나 많은 캐주얼, 너무나 많은 서울행 KTX표, 그리고 단 한 번의 갤럭시 박살.


2년 간 나의 정체성을 짓누르던 갤럭시가 떠나갔다. 너무나 많은 익지 않은 조개들 앞에서, 단 한 번의 갤럭시 박살. 그것이 내가 오렌지를 사랑하게 된 이유다.


사실 한 번에 박살 난 것은 아니고 가운데 접히는 부분의 액정이 나가면서 터치가 안되어 정상적인 폰으로 기능을 못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스토리에 사진 업로드 하겠다고, 사진을 미친 듯이 저장해서 터치 가능한 영역으로 내려버린 나의 광기를 보여주는 스크린숏 - 이것이야 말로 너무나 많은 사진



갤럭시와 정체성 사이에는 정말 말 그대로 은하만큼의 간극이 있고, 그 간극을 내밀하게 써 내려가기엔 나란 인간이 너무 초라해지므로 사실에 입각하여 오렌지에 대한 사랑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다시 돌아온 아이폰. 그동안 새로 생긴 기능들에 감탄하며 2x2 사이즈의 스마트 스택을 메인 화면에 깔아 두었다. 애플 생태계로 돌아온 감격으로 나에겐 새롭기만 한 이 기능에 무한 찬양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매번 스텔라장의 <Orange, You’re not a Joke to me!>가 화면에 올라왔다. ’오늘 아침은 정말 피곤한데. 이런 무드 아닌데….‘ 몇 번 저항해 보았지만, 알고리즘을 이기진 못했고, 그냥 계속 듣게 되었다는 이야기.


2016년 발매된 그녀의 EP [Colors]에서 그녀는 여러 가지 색에 대해 노래한다. ‘What’s your color?’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빨간색도, 노란색도, 파란색도, 보라색도, 초록색도, 핑크, 블랙, 화이트도 될 수 있다고 여러 가지 색깔을 대답으로 열거하며 전개된다. 생일 전 날 기숙사 방에서 소도구를 활용해 만든 곡이었다는 인터뷰에서조차도 그녀는 무심하게도 한 존재를 잊고 만다.


마침내 삐쳐버리고 만 오렌지를 그려낸 앨범 커버와 그를 달래기 위한 오렌지 헌정곡



이 곡의 탄생 배경을 알게 된 이후로는 스테이션에 뜨지 않아도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노래로 이 곡을 택했다. 슬픈 일도, 황당한 일도, 오렌지를 사랑하는 명량한 마음으로 견뎌가면서.


결국 올여름의 너무나 많은 일들도 결국 스텔라장이 말하는 오렌지의 sour and sweet 속성으로 압축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번 여름부터는, 그 모든 것을 압축하는 마법의 마지막 문장 ’여름이었다’ 대신 ’오렌지였다’라고 말해보기로 한다.


신맛과 단맛이 함께 있던, 오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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