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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eong Feb 10. 2022

왜 쓰세요?

나는 왜 쓰게 되었을까, 왜 쓰는 걸까

싸이월드 일기를 왜 썼을까? 과거를 더듬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암호의 나열. 보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온전히 그 뜻을 알지는 못하도록, 특정한 독자가 자신임을 깨닫길 바라는 글을 썼다. 적어도 삼일마다 한번씩. 그러다보니 쌓인 글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은 사이트 자체가 사라졌다. 기억나는 문장과 문구도 함께 상실되었다. 하지만 이 짓은 생애 첫 번째 시도였다. 내뱉음, 이것이 내가 성인이 되기 전 했던 유일한, 그리고 유익한 방출 행위였다.


한참을 글과 떨어져 지냈다. 학창시절을 지내며 수많은 활자를 보았다. 엄밀히 말해, 보기만 했다. 이유를 묻지 않는 응시. 당연히 글도 쓰지 않았다. 쓰지 않으니, 쓰지 못하게 되는 데 이르렀다.관심사 밖이니, 글과 헤어져 산다는 것이 외롭고 슬픈 일인 줄 몰랐다.


글과 멀어진 상태로 오랜 세월이 지났다. 회사를 다녔고, 퇴사선언을 했을 즈음 일기쓰기를 시작했다. 감정을 글로 남겼다. 최대한 솔직해지려 했다. 그러나 알지 못했다. 거짓을 고하지 않는 일에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자신의 논리에 문장을 짜 맞추기 위해 수많은 거짓을 기록했고, 수많은 찔림에도 피를 질질 흘리며 매일 글을 썼다. 그렇게 일기쓰기를 습관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억지끼워맞춤-의 힘이었다. 깨질 위험을 각오하고서라도 원하는 모양을 내는, 도로 빠지지 않는 조립 양식 말이다. 당시의 일기는 학창시절에 했던 쓰기 행위와 형태는 달랐지만 무늬는 비슷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시절의 쓰기는 먹기 싫은 것을 많이 욱여넣으면 토를 하듯, 내뱉는 행위일 뿐이었다.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나의 기록들은 차곡하게 쌓여갔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집안 곳곳을 뒤졌지만 나날의 기록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나는 기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로 시작해야 했다. 그래, 글은 포기하자. 못내 아쉬워 과거 사진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찾는데 실패했다. 나의 과거는 전부 백지가 되었다.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억을 고지곧대로 믿지 않는 마음가짐과 더불어, 누적된 기록의 상실은 잡념으로 남아 꽤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기록의 중요, 과거를 되짚는 데서 오는 기쁨과 슬픔을 알지 못해 벌어진 사건이었다.




나는 왜 쓸까? 그냥-. 보통 글을 왜쓰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이유를 모두 나열하기에 번거롭기도 하고, 듣는이의 지루함을 동시에 염려하기 때문이다. 글을 남기는 과정에서 많은 물음이 생겨날진데, 개중 근원을 묻는 질문이 정말 하나도 없을까? 내 입장에선 '왜 쓰는지?' '왜 기록하니?'와 같은 질문이 딸려 들어오는 셈이다. 궁금함을 어렵게 생각하는 내 부족한 역량을 탓하리오. 그럼에도 일단 묻는 말엔 대답을 하는게 도리니 적당한 대답을 고민해 본다.


'왜 쓰세요?' 물어본 자가 진심임을 아는 이에게는 결코 그냥-이라는 말을 뱉을 수 없다. 진심으로 의문을 가졌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고충을 나누거나 공감받고 싶은 자에게서 나오는 질문이기에, 외면하기 쉽지 않다. ‘그냥’이란 대답이 먹히는 사람은 글을 쓰느라 머리가 빠진 적이 없는 자에게만 할 수 있다. 대충 묻는 말엔 대충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주저리 이유를 나열하기에, 듣는 자는 여유가 없고,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며, 길어지는 대답을 들어줄 체력이 없음을 안다.


쓰는 이유. 여럿 있다. 매번 동기나 이유가 달라지긴 하지만 말이다, 굳이 나열하자면 첫째. 독자의 반응을 기대하며 쓴다. 이제껏 내보이기 위한 글을 써본 적이 없었기에 궁금했다. 나는 괜찮은 글을 남기고 있는 걸까. 혹자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둘째. 나는 나의 기억을 믿지 못한다. 특히 후회나 회한을 불러올 때면 (실체가 모호한) 기억이란 놈이 긍정의 시선을 막는다. 기억을 불신하고 기록을 믿게 되었다. 손으로 해놓은 기록, 문장은 당시 감정을 선명하게 돌아볼수 있게 한다. 셋째. 나는   경험했다. 분명 나를 향한 글을 쓰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내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무아는 생각보다  괜찮은 상태다. 넷째. 나의 역사가 한눈에 목록으로 들어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차곡차곡 정리된, 세월에 어느정도 침식되어 오히려 포근해진 서재에 있는  하다.


지금은- 왜 쓸까? 쓰기 위한 장치를 많이 걸어두어 억지로 쓰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자발적으로 글을 남기는 편이다. 매일 일기를 쓰는 습관은 여전하고, 요샌 나를 보여준다는 목적에 글을 쓴다.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내고 싶은 욕구도 더러 있다. 창조 수단을 구지 글로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 글 이외의 것, 이를 테면 그림이나 음악은 기술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글쓰기도 물론 의식적 배움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음악이나 그림보다야 기술적 요소가 덜 필요한 건 사실이다. 보다 익숙하기 때문에 새로 배울 수고를 덜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손가락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것이 글이고, 요즘 시대엔 말로도 남길 수 있는 것이 글이다.


글쓰기는 수많은 창작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림과 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그림과 글을 잇는 접착제가 글이다.” 라고. 각자의 창작물은 완벽함을 향한다. 하지만 완벽한 창작물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목표가 ‘완성’ 이라면 글쓰기라는 하나의 수단만으로는 부족한 경우가 분명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한가지 수단만을 사용한다는 건 그 여백을 독자에게 부탁한다는 의미로 통한다. 여백이 저자와 독자에 의해 비로소 채워질 때, 느끼게 될 희열을 기대하며 창작하는 것일지도.


가장 강력한 이유가 있다. 나는 나에게 솔직해지고 싶어서 글을 쓴다. 북북 갈아내고 반질반질 연마하면 온전한 나의 모습이 보일 거라 기대하며, 쓴다.  


글이 반드시 도움이 된다-라 말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거나 써야 한다고도 하지 못하겠다. 읽거나, 쓰지 않아도, 창작행위를 하지 않아도, 잘- 살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그럼에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살아야하는 이유를 발견하고자 마음먹으면 반드시 발견하게 되는 것이 글이다. 나태에 허우적대거나, 방향을 잃거나, 때론 죽고 싶어도 살게 하는 건 글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마지막으로 <강원국의 글쓰기> 소제목을 소개한다.


“아내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글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결국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내 글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는 단 한사람 덕이다. 많이도 필요없다. 무관심 속에서도 글을 남기고, 때때로 마주치는 비난의 숲을 빠져나오게 하는 밧줄도 칭찬임을, 나는 얼마전에 깨달았다. 화자는 상실되었지만, 그 격려는 평생 잊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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