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가 멀어서 혹은 가까이 있어도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마음에 작게나마 나의 자리 하나를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때가 있다. 그 사람들과 대화를 함으로써 그 사실을 다시금 느끼는 것이 내게는 '행복'으로 다가온다고 말한 적도 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있는 것만 있게 하고 없는 것은 없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세상에서 지워낼 수 없다. 내 마음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있는데 그 사람들을 무작정 만날 수 없는 것이 물리적인 사실이다. ‘만남’이란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 두 사람의 시간이 맞아야 하고, 만나고 싶은 마음이 동일해야 하고, 만남의 장소에 육체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가족, 지나간 인연들, 그리고 멀리 있는 친구들. 그중에 첫 번째로 내게 '그리움'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은 마음에 아주 큰 자리를 차지하지만 거리상 멀리 있어 매일 만날 수 없는 가족이다. 이 사람들은 분명 하루에 몇 번씩은 나를 생각할 것이다. 엄마 아빠는 특히 아무리 하루가 바쁘게 지나가도 자기 새끼들이 밥은 먹었는지, 오늘 학교는 잘 다녀왔는지, 직장에서 일은 잘하고 있는지 하루에 1440 분이 지나가는 동안 최소 1분은 시간을 내어 생각할 것이다. 딸 밖에 되지 않는 나도 엄마 아빠 생각이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스치기 때문에 그리 말할 수 있다. 하루에 5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하는 것이 '사람'인데 가족이 마음에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보통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나도 아무리 바빠도 가족 생각을 그렇게나 자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살아온 배경과 사연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반면에 이렇게 공간의 한계를 넘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온 마음을 다 해 좋아하고, 궁금해하고, 부모들이 말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의 정도는 아니겠지만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관심사를 가지며 공감대가 형성되고, 짧다고 하는 인생에 한 시기를 같이 했지만 이제는 그런 연결 끈이 없어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만날 수 없는 이유들은 다양하다. 연락하면 내가 부끄러운 사람이 될 것 같은 느낌, 다시 연락한다고 해도 안부만 물어볼 수 있을 뿐 관계를 유지할 만한 연결의 끈을 다시 맬 수는 없어 연락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이는 내 성격에서 우러나오는 결론, 이제는 연락처조차 없어 지난 내 인생길에 희로애락의 발자국만 남기고 다른 골목으로 꺾어 떠나간 인연들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참 좋다’라고 말하게끔 만드는 디지털화된 연락망이 있어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든지 문자 하나면 서로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 해외 생활을 하면서 그런 친구들이 많지는 않지만 몇 생겼다. 같은 공간, 같은 순간을 나눌 때 마음이 너무 잘 맞아 ‘우리 친구 하자’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평생을 함께 알아가고, 멀리 있어도 서로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방향이 무엇인지, 그 과정은 어떠한지를 서로 공유하고, 그렇게 서로의 인생 걸음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 ‘친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관계들. 이 사람들은 가족과는 달라서 하루에 꼭 1번씩은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없고, 언제든지 보고 싶으면 연락을 하면 되기에 가까이 있지 않아도 내 마음에 한자리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몸이 아파 앓아누워도, 힘든 일이 있어도,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아 위로가 필요해도 달려 가주지 못하고, 또 반대로 오늘 하루 단 맛을 느껴 일탈하고 싶을 때 같이 가줄 수도, 좋은 날을 함께 축하할 수도, 취미 생활을 같이 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존재 만으로 내 마음에 힘이 되고 동기부여가 되지만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없는 현실과 맞서기 때문에 그저 그리워할 대상으로만 남는다. 물론 만날 수 없음에서 오는 관계의 아름다움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사실 나의 하루하루도 빠듯하기 때문에 항상 이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현실에 치어 살다 보면 직장 내 나의 역할을 임하기 위해 져야 하는 책임감, 나의 공간을 깨끗이 하고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집안일들, 그리고 ‘뭘 먹을까’ ‘오늘내일 자기 계발을 위해 무얼 할까’ ‘무슨 영화나 드라마가 오늘의 내 기분을 보충해줄 수 있을까’와 같은 잡생각들이 이 사람들을 그리워할 수 있는 시간을 뺏어 가기에 하루 종일 그리움에 부풀어 있지는 않다. 주로 퇴근 후 혼자 있는 시간들에 이런 생각들을 갖곤 하는데 나 조차도 시간을 내어 가족들을 보러 가는 투자를 하지 않고, 다시 연락하게 되면 당해야 하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싶지 않고, 가까운 미래에 만날 수 없기에 안부라도 묻는 것을 부질없게 보는 나의 탓이 크다. 또한 이 사람들을 그리워만 하는 것이 마냥 나쁜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아무런 해결 방법을 만들지 않고, 그리워하기만 한다.
‘나 좀 기억해주라.
그냥 나 말고, 너랑 행복했던 나.
네가 여기 없으면 누가 그렇게 행복한 날 기억해 주겠어...’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이다.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눴던 시간들에 나는 너무나 행복했었고, 그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이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행복은 값비싸서 ‘매일 그리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갈망은 사치스럽다. 이 그리움들을 잘 버텨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을 말짱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도 나는 이들이 보고 싶다고 징징 되고 있지만은 않아 어른이 되었음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