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행복이 부른 심장마비
회사에 처음 출근하는 날 가장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엄마를 잃은 아픔이 있는 여직원 조이 (Joy)이었다. 함께 일할 직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고 싶은 마음에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에게 언제부터 이 회사에 들어와 일하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내가 감당할 준비가 된 비중의 답변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닐라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외곽 지역인 불라칸에서 살다가 대학을 졸업한 후 직장생활을 해보겠다며 남자 친구와 마닐라에 작은집을 얻어 첫 경제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대학에서는 인사과를 전공하여 졸업했지만, 어느 회사의 재무 관련 채용공고를 보고 하루빨리 직장생활을 하려는 마음에 바로 취업을 했다. 평소에 가깝게 지내지도, 친근하지도 않았던 엑셀(Excel)과 매일 투쟁하며 열심히 회사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함께 일하던 직원들과 가족 같은 환경이 조성된 회사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디딘 그녀는 회사에 그런 보살핌을 바라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기에 꿋꿋이 자기 일을 해나가며 매일을 활기차게 보냈다.
처음에는 그래도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말마다 본가를 오가며 회사생활을 했었다. 경제활동에 대한 갈망을 심어준 가족이라는 단단한 지반 (foundation)을 몇 발짝 딛고 이따금 에너지 재충전을 하여 마닐라로 돌아와 다시 일을 하곤 했다. 그러다 그녀는 교통체증이 가장 심한 금요일 저녁의 퇴근길과 월요일 아침의 출근길을 뚫는 일에 지쳐 본가를 방문하는 횟수가 일주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으로, 3개월에 한 번에서 가족 행사가 있는 날들로 조금씩 줄었다. 그런 일정에 적응한 그녀는 퇴근 후 마닐라에 있는 집에 가는 것으로 쉼을 얻기 시작했고, 불라칸에 있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아닌 다른 것에 만족을 얻으며 살아야 할 수밖에 없는 도시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속에 가족을 아예 지워버린 것은 아니었기에 엄마 생일날 가족모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바로 불라칸으로 향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흥이 많은 필리핀 사람들은 그런 가족모임에 후라이드 치킨, 스파게티, 바비큐와 같은 음식들을 준비해놓고 사람들을 불러 노래방 기계를 켜고 축하파티를 하는 문화가 있는데 그녀도 음식 준비를 돕기 위해 그 주의 금요일은 일찍 퇴근을 하고 불라칸에 갔다. 마닐라에서 약 10시간이나 차를 타고 이동해야 갈 수 있는 비콜이라는 지역으로 시집을 간 그녀의 언니는 딸들과 함께 영상통화를 통해서나마 엄마에게 생일 축하 인사를 드렸다. 언니도 그녀도 없는 불라칸 본가의 그 가족은 어느새 크기는 작아졌지만 엄마의 생일은 나름 그리라도 함께 있어 즐거운 잔칫날이 되었다.
토요일은 기름진 음식과 술을 곁들여 질러대는 노래를 부르며 여느 필리핀 가정집의 보통의 생일파티를 마치고, 늦잠으로 시작되어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평화로운 일요일을 보냈다. 월요일의 출근길을 뚫고 마닐라로 돌아가기 싫었던 조이는 일요일 오후에 마닐라로 향했다. 금요일까지의 일주일간에 회사 일을 마치고 엄마 생일상 요리를 돕기 위해 부랴부랴 불라칸에 가서 준비를 한 뒤 함께 생일을 보낸 후 마닐라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의 몸은 몹시 피곤했지만 가족과의 시간으로 마음에 힘을 얻었고, 돌아오는 주간을 맞이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버스를 타고 마닐라에 있는 집에 거의 도착할 그때 갑자기 아빠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녀를 마중 보내고 조금 쉬기 위해 TV를 켜놓고 소파에 누워 있던 엄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빨리 불라칸으로 돌아와 달라고, 아빠는 전화로 애원하고 있었다.
다시 본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엄마는 돌아가신 이후였기에 이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그녀의 다음 숙제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던 엄마가 지금은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할 필요도 없는 차가운 몸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제일 가까운 장례식장에 문의를 했고, 이송되기까지 엄마의 몸은 소파에 한동안 누워 있었다. 그 사이에 아빠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이겨내려 노력해 보았고, 그녀는 엄마가 누워 있는 거실을 오가며 언니 외 다른 가족들, 마닐라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 친구, 장례식장, 회사 상사에게 전화를 돌리며 하나하나씩 일을 정리해 나가야만 했다. 그녀가 살면서 느낀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줘도 모자랄 순간에 일단 해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 어두움에 자신을 내어줄 틈이 없었다.
그날 그녀를 마중 보내고 엄마와 아빠는 거실에서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빠가 잠시 화장실에 간 틈에 엄마에게 심장마비가 왔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생일날 가족과 보낸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였을까, 콜레스테롤의 문제였을까. 그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안다고 한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딸들과 따로 살게 되어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아내를 잃은 아빠는 아내에게 더 잘해줄 수 없었던 과거에 대한 한탄,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남편을 여러 번이나 불러 짖으며 발버둥 쳤을 아내를 듣지 못하여 바로 달려 나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가장 컸다. 장례 이후에도 며칠 동안 조이는 본가에 지내며 아빠의 곁을 지켰는데, 죄책감에 빠진 아빠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혹시나 아빠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 세상을 뜨지는 않을까 안절부절못해 방문을 열어놓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코로나로 락다운이 한참 심할 때 일어난 일이었기에 언니는 마닐라까지 오는 (필리핀 사람에게는 큰돈인) 1만 페소/200불 정도의 차편을 급하게 구해 장례식에 참석했었다. 언니의 딸들을 너무나 예뻐했던 엄마였는데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부재를 설명해줄 겨를이 없어 (필리핀 장례식에는 관을 열어놓아 죽은 자의 얼굴을 보여주고, 방문객들은 그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지막 인사를 하는 관습이 있다) 장례식장에 데리고 와 할머니에게 인사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그 후 심리상담을 받으며 일상에 복귀했다 (그 정도 가정형편에 비용을 들여 심리상담을 받는 필리핀 사람들은 흔치 않다). 회사에 돌아왔을 때는 그동안 쌓인 업무들을 처리해 나가느라 바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심리적으로 약해져 있는 그녀에게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구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어’라고 하는 것 같이 현실에 충실하며, 남에겐 무심하고 냉정하게 보이는 그녀의 상사와 동료들의 태도를 매일 보는 것이었다. 그들도 그녀의 사정을 이해해주고 생각하는 마음이 분명 있었을 테지만 힘든 그녀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회사생활이 힘들어 첫 퇴사를 결심하였고, 경제활동은 해야 하니 몇 주 후 우리 회사의 구인공고를 발견해 지원을 한 것이다. 몇 개월간 우리 회사에서 일하며 예전 회사에서의 환경이 다르고, 물론 엄마의 부재에 조금 더 적응된 그녀는 가족 같은 환경의 회사에 만족을 하며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보는 나에게 해준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잘 웃고 씩씩한 직원 중에 하나여서 인정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씩 이 이야기를 해주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면 그녀의 웃음 뒤에 그날의 아픔이 느껴져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으면 저렇게 버틸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이 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