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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시기 Aug 27. 2021

[피닉스] 결국 홀로 될 수 밖에 없는 비극

이미 지나간 과거, 언젠가 다가올 미래, 그리고 바로 지금의 현재

* 아래 리뷰는 영화 [피닉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명성 높은 영화 작가 중 한 명이다. 가장 최신작인 [운디네]의 공개를 기점으로, 국내의 한 수입사가 페촐트의 근작 세 편을 연달아 수입하여 개봉함으로써 한국의 관객들도 늦게나마 그의 근작들을 정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현대 도시 베를린을 배경으로 개인의 사랑과 운명적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는 물의 정령 운디네 ([운디네], 2020), 나치의 잔상이 다분히 묻어 나오는 가상의 도시 파리와 마르세유를 홀연히 배회하는 게오르그 ([트랜짓], 2018), 2차 대전 직후 끔찍한 홀로코스트에서 기적처럼 생존하였으나 그만 얼굴을 잃고 만 넬리 ([피닉스], 2014)까지, 페촐트의 영화는 숙명을 짊어진 채로 맞닥뜨린 갈림길 앞에서 나아갈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인물들을 과묵하게 관찰한다. 또한 이 세 편의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전쟁과 민족 말살, 분단 및 국가 쇄신과 같이 독일이라는 나라의 굵직한 역사적 분기점들을 이야기의 핵심 뼈대로 삼는다. 개봉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직접적으로 두드러지는데, 그 흐름의 최정점에서 [피닉스]는 나치와 홀로코스트의 유산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영화는 얼굴을 잃은 넬리 (니나 호스 분)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오며 시작된다. 이 때 넬리는 보는 이의 동정 내지 불편을 자아내는 철저한 피해자의 위치에 선다. 그녀 스스로도 손상된 얼굴을 드러내길 꺼려하고, 강압적인 자세로 그녀를 다그쳤던 군인마저 그 얼굴을 확인하고는 할 말을 잃는다. 더 이상 이전에 있었던 '넬리'라는 특정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나치의 잔혹한 제노사이드 정책에 희생되고 만 수많은 유대인 피해자 중 하나로 설정되는 것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들로 미루어 유추해보면 넬리가 베를린으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첫째로 얼굴 재건 수술을 받기 위함이다. 그녀는 다른 어느 누구의 얼굴도 아닌 본래 자신의 얼굴을 되찾기 원한다. 그러나 의사는 이에 헛된 희망임을 단호하게 주지하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됨에 따라 경험할 수 있는 긍정적인 점들을 나열하며 그녀를 달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짐짓 타당한 지적이다. 통제할 수 없는 일련의 끔찍한 사태를 겪어낸 사람은 이를 경험하기 전과 같을 수 없다. 만약 그녀가 얼굴을 잃지 않았더라도, 사진으로만 남은 이전의 아름다웠던 얼굴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더라도 비극에서 살아남은 이상 현재의 그녀는 과거의 그녀와 결코 같은 사람일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영화는 이 점을 보다 직접적으로 시각화하는 장치로서 얼굴을 택했을 뿐이다. 그렇게 새로운 얼굴을 갖게 된 넬리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지, 영화의 목적은 그 순간을 온전히 목도하는 데 있다.



넬리가 베를린으로 돌아오게 된 두 번째 이유는 사랑하는 남편 조니 (로널드 제르펠트 분)를 찾기 위함이다. 레네 (니나 쿤젠도르프 분)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넬리가 사력을 다해 살아남으려 노력했던 것 역시 전부 조니를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조니와의 사랑은 비극이 있기 전 행복하고 평범했던 일상을 표상한다. 다시 말해 넬리가 조니를 찾고자 베를린의 밤거리를 필사적으로 배회하는 목적은 과거의 넬리로 다시 복귀하고자 하는 열망의 몸부림인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그녀는 더 이상 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홀로코스트를 온몸으로 통과하며 목격하고 들은 희생자들의 진실, 그리고 그들과 공통된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음을 명백히 표출하는 새로운 얼굴이 있지 않은가. 나아가 넬리는 그녀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사망함으로써 상당한 유산을 상속 받게 되고, 이에 레네는 강력히 주장한다. 그녀의 돈은 그녀 개인의 것이 아님을, 민족을 부흥시키기 위해 쓰여야 할 책임이 부과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새롭게 건국될 유대인들의 나라로 이주하여 펼칠 민족 운동의 계획을 설파하는 레네는 끔찍한 일을 겪고 변화한 넬리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랑과 민족, 조니와 레네, 과거와 미래 사이에 놓인 넬리의 첫 번째 선택은 단연코 사랑이었다.


조니는 전후 미군 클럽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생사가 불분명한 아내의 유산은 풍족하고 여유로웠던 과거의 일상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졌으리라. 그러던 와중 생경한 얼굴과 어눌한 말투,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가진 한 여자가 눈에 들어오고, 그녀에게서 과거 아내의 모습을 언뜻 발견한 조니는 유산을 획득하기 위한 연극을 시작하기로 한다. 연극의 상대방이 되어줄 그 연약한 여자가 바로 자기 아내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과거와 미래로 구분되는 인물들의 지향점 내지 이상향, 그리고 이로부터 한없이 벌어진 간극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현재를 대비시키는 영화의 구조에 비추어 보자면, 넬리와 조니는 공통적으로 과거에 얽매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전쟁이 있기 전, 나치가 활개치기 전의 평화롭던 시간을 그리워하는 두 인물의 목적은 큰 틀 안에서 사실상 같다. 다만 남편과의 사랑을 필요로 했던 넬리와 죽은 아내의 돈이 필요했던 조니는 과거의 그 시간을 되찾기 위한 수단 자체가 어긋났을 뿐이다. 정반대로 레네는 민족의 미래를 꿈꾸는 사람인데, 조니와 레네는 넬리의 막대한 유산을 필요로 했다는 바로 그 수단 면에서 일부 겹쳐진다. 그러나 조니는 그 돈을 이용해 과거 개인의 풍요로웠던 일상을 되찾고자 했고, 레네는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대표되는 민족의 중흥을 꾀하여 궁극적으로 미래의 복수를 꿈꾸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목적을 가진다.



넬리는 조니의 연극에 동참하게 되면서 갈수록 과거의 정체성을 회복해간다. 머리, 옷, 걸음걸이, 필체 등 외형적인 요인 뿐만 아니라, 홀로코스트를 겪기 전 합창단의 솔로이스트이자 조니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과거 그 '넬리'의 모습으로 점차 변화한다 (이 과정에서 니나 호스의 탁월한 연기가 빛을 발한다). 그러나 조니는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애써 외면한 채 꿋꿋이 본래의 목적이었던 연극과 유산의 획득에 집중하고자 한다. 또한 비극을 완전히 잊은 듯 그 이전의 과거로 회귀해가는 넬리의 모습에 민족주의자로서의 의지를 상실한 레네는 넬리에게 조니의 진실을 남긴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에 넬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시금 돌이켜보아야 한다. 연극에 필요한 모든 준비의 마지막, 수용소에서 돌아왔음을 증명하는 한 쪽 팔의 수감번호 자국을 파내려는 조니를 밀쳐내고 문 뒤에서 다급히 권총을 집어드는 넬리의 몸짓. 옛 친구들이 모두 모인 자리, 그들 앞에서 조니의 피아노 반주 위에 "We're late"를 읖조리는 넬리의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팔뚝에 선명하게 새겨진 수감번호. 사랑의 회복으로 말미암은 과거로의 회귀가 헛된 목적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넬리는 되돌아가고자 무던히 노력했던 정체성을 포기하고, 과거와 미래의 이분법적 구성을 떠나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현재를 살아가기로 선택한다.


감정적으로 진한 여운을 남기는 엔딩의 동력은 연극의 상대방에게 이토록 우아한 방식으로 진실을 고하는 것에서 온다. 결국 조니는 아내를 밀고한 배신자였고, 친구들 역시 모든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한 방관자일 터, 허구의 연극을 작동케 하는 근원적인 가림막을 걷어내고 회피했던 진실과 정면에서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응당 합리적인 결과일테다. 다만 어디까지나 현대의 우리들은 그 시절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창작자의 그러한 태도가 충실히 반영되어 가장 조심스럽게, 동시에 또렷한 목소리로 불리우는 넬리의 노래. "함께했던 순간은 빠르게 흘러, 마치 표류하는 배처럼 우린 멀리 떨어지겠네, 너무 빠르게. 우린 늦었어, 그대여. 우린 늦었어."


불사조는 제 몸을 불태우고 남은 재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새는 이전의 새와 결코 같을 수 없다. 슬프지만 굳건한 명제 아래, 비극의 당사자와 주변인들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생각한다. 이제까지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인간이라면 반드시 홀로 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퍽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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