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edy Jan 28. 2021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건강하세요'란 인사 돌아보기

*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 동녘)


사람들에게 '건강하세요', '건강 관리 잘하세요'라는 인사를 습관처럼 내뱉곤 했다. 무난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하라는데 기분 나쁠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특히 요즘 같은 감염병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 말이, 추호도 그럴 뜻은 없었더라도, 누군가를 배제하고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건강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이라는 전제, 건강하지 않음(혹은 못함)은 때론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상정한 시각이 그 말에는 깔려 있었다.

살면서 수많은 차별의 말을 뱉어 왔겠고, 그랬음을 인정하며 다른 말들을 고민하고 싶었는데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읽고 결과적으로 그러하지 못했음을 또다시 인정하게 됐다.



저자는 질병을 바라보는 차별의 언어들을 보여준다.  


첫 번째 유형은 정체성에 대한 부정적 수용이다. '긍정적이네, 아픈 사람 같이 않아'라는 식의 말이 여기에 속한다. 이런 표현을 칭찬으로 수용하려면 아픈 사람은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는 전제를 수용해야 한다. 이때 아픈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적으로 수용해야 '칭찬'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의리 있네. 여자 같지 않아"라는 말을 칭찬으로 수용하기 위해서 여자는 의리 없는 존재라는 전제를 수용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p.66


이 부분을 읽으며 유색인종들이 겪어온 수많은 마이크로 어그레션들을 곱씹었다. '흑인치곤' '아시안치곤'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 같은 수많은 말들은 칭찬의 외피를 쓴 사실상의 공격이었다고 <인종토크>의 작가 이제오마 올루오는 말한 바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질병에 대한 희화화다. '난독증 있냐?' '암 걸리겠네!' 같은 말들이 이에 속한다. 자신의 고통이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농담'이나 한없이 가벼운 비유가 되었을 때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모두가 웃음으로 받아치는데 당사자가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을 표하면 비웃음을 사거나 고립되지 쉽다.
(중략)
자주 쓰이는 '지랄병 도졌네!'라는 식의 말도 마찬가지다. '지랄병'은 외전증(과거에 '간질')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뇌전증의 증세인 발작을 희화화하는 사회에서 그 환자들의 인권은 요원하다.
p.67~68


작가 김지혜의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지적되었던 부지불식간에 내뱉는 차별의 말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결정장애, 안 본 눈 삽니다... 차별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그런 말들. '어제의 내'가 했던 말들을 '오늘의 나'는 하지 않아야 할 말들.



세 번째 유형은 건강에 기준을 둔 차별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야’라는 식의 표현이 여기에 속한다.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협박성 예방 표현을 말한다. 그런데 건강이 삶의 모든 전제 조건이며, 건강하지 않으면 다른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는 위험하다. 건강하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기도 하며, 계속 꿈을 꾼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만약 아픈 사람도 아픈 대로 공동체 안에서 돌봄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역할을 해내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이러한 예방 표현은 그저 건강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질병에 차별과 낙인이 붙어 다니는 사회에서는 위험해 보인다. 건강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잃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건강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p.68~69


여기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질병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시각으로 향한다.


네 번째 유형은 질병의 개인화다. ‘저렇게 살았으니 아프지’라는 식의 말이 여기에 속한다. 질병의 원인을 개인의 성격이나 생활습관에서 찾고 자기 관리의 실패로 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앞에서도 지적했듯 질병의 귀책을 철저히 개인에게 돌린다. 
(중략)
건강은 사회적 권력이나 차별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빈곤층일수록, 다양한 차별을 겪는 소수자일수록 더욱 아프기 쉽다. 사람들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화에 너무나 익숙하다. 때로는 아픈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긋고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나 안전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
(중략)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갈 때 건강 불평등을 만드는 사회구조는 휘발되기 쉽다. 정부가 산재, 야근, 성폭력, 가정폭력, 소수자 차별 같은 사회적 건강 위해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새삼 또 생각하게 된다.
p.69~70


과연 질병은 개인의 문제인가. 관리가 부족하고, 생활 습관이 좋지 않고, 전생에 죄를 지어 아프게 되는 것인가. 질병의 개인적 요소는 당연히 반영되겠지만 개인을 둘러싼 사회 구조적 문제에 눈 감은 질병 논의는 공동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인의 몸을 돌보는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의료의 공공성을 무시한 채 의료 민영화를 진행해온 국가들이 코로나 19라는 지구적 위기 상황에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는지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기도 하다.


아플 권리와 차별의 언어 이외에도 조한진희 작가가 제기한 문제의식 가운데 눈에 띈 부분은 '의료 가치관'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의학에 맡긴, 이른바 메디컬라이제이션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 왔다.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고, 의사의 전문지식에 오롯이 의존할 수밖에 상황. 쇼핑하듯 이 진료과 저 진료과 전전하는 '아픈 몸'. 설령 결론이 어떠한 의료 서비스를 받는 것으로 귀결될지언정, 그 과정에서 의료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전문 지식의 공유 , 의사와의 원활한 소통, 내 몸을 이해하는 방법 등은 훨씬 더 자주 그리고 깊이 논의되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현대의학은 정밀한 검사와 뛰어난 외과 수술 능력은 있지만, 몸을 총체적인 유기체로 보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 같았다. 그래서 큰 병이 오면 ‘몸의 조화가 깨져 질병이 오는 것으로 인식’하는 한의학적 관점도 필요해 보였다. 적절한 생활습관을 만들고 면역력을 높이며 최소한의 수술을 받는 방법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의료도 시스템 안에 놓여 있고,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환자들이 ‘의사가 전문가인데 가장 잘 알겠지'라며 무조건 의존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의사는 환자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의사마다 그 최선의 ‘선택’에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수술 이후에 후유증이나 합병증을 안고 살아갈 이는 환자 본인이며, 몸이 여러 개가 아니니 후회하거나 원망한들 돌이킬 수 있는 방법도 없다.
p.243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기억해야 할 이들을 꼽았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홈리스와 장애인의 벗으로 불렸던 영상활동가 박종필 감독", 화재로 세상을 떠난 "중증 장애 여성 김주영", "돈 때문에 치료를 미루다 맹장염으로 세상을 떠난 기초생활수급권자이던 청년 김준혁"이 그들이다.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고자 하는 저자의 마음에서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질병과 아픈 몸에 대한 혐오를 뚫고, 상처조차 자원으로 삼으며, 우리 언어에 함께 힘을 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p.385)는 저자의 뜻을 지지한다. 

작가의 이전글 <왕진 가방 속의 페미니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