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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 Apr 10. 2021

자... 흑... 뭣이 중허다

자산어보(2021)

리뷰에 앞서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



정약전? 정약전이.. 누구지?


부끄럽게도 영화 시작 5분 전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질문이다.


<자산어보> 관람하고자 마음먹은 관객들 , 영화 보기 전에 정약전이라는 인물을 빠삭하게 공부하겠다고 다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굳이 공부하면서까지 봐야 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약전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본 상식이 풍부한들, 정약전이 정약용의 형이라는 정보 이상을 일반인이 알기란 쉽지 않다.

필자는 고백하건대 정약전이 정약용의 형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로 영화관에 입성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회된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으로서  귀띔을 해주자면, <자산어보>는 책 『자산어보』와 정약전에 대해 알아본 뒤, 관람해야 보이는게 많은 영화다. 물론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이준익 감독은 역사 속 소재 찾기에 능하고 역사 배경지식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잘 만든다. 자산어보 역시 그러한 영화이긴 하지만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고서 관람할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의 감상 폭이 현저히 차이 난다는 것을 꼭 당부하고 싶다. 혹여나 그 자체가 너무 귀찮다면 본 리뷰의 앞부분을 살짝 읽고 영화를 관람하기를 바란다.


본 리뷰가 감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스포가 있는 리뷰입니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흑산어보 그리고 자산어보


영화 <자산어보>가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계보를 잇는 작품이라 알려지자, 많은 영화인들의 관심은 <자산어보>의 흑백 필터가 주는 아름다움으로 쏠렸다. 필자 역시 영화 <동주>를 너무도 재미있게 봤던 지라 '이준익 감독이 이번엔 어떤 흑백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기대감을 앞세워 영화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영화 끝에 남아있던 여운은 흑백 필터에 대한 정념뿐이 아니었다.


『자산어보』는 정약전이 , 흑산도 유배 당시, 한 청년에게서 배운 흑산도 어류생태 정보를 집대성한 책이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산어보』의 생물 분류법은 과학적이지 않다. 그러나 당대에 체계적인 동식물 분류법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산어보』의 역사적 가치는 정약전의 노고만으로도 충분히 빛난다. 학계도 아직까지 『자산어보』를 한국 최초의 해양 생물학 서적이라 칭하며, 이것의 의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한데 ‘정약전은 왜 표제를 흑산어보라 짓지 않았을까’. 사실 그 이유가 『자산어보』의 서문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어있긴 하다. 흑(黑)이라는 한자가 어두침침한 느낌을 과하게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자 - 玆 - 검다 흐리다

흑 - 黑 - 검다 나쁜 마음 어둡다

보다시피 두 한자 사이의 뉘앙스 차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의문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다. 글자가 표현하는 색감의 느낌이 어류도감과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본래 흑산도라는 이름은 주변 바닷물이 검푸른 색을 띠고 섬에 상록수가 많아,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검게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그렇지만 흑산도라는 이름에 흑(黑)이라는 극단적 색감의 글자가 사용된 이유에는 본 유래 외에도 다른 맥락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했다.

흑산도는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장소였다. 농사짓기엔 땅이 너무도 척박하여 흑산도 주민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식량이 항상 부족하여 보릿고개 때마다 배를 곯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영화 속 신하들이, 정 씨 형제들을 눈엣가시로 여겨 그중 가장 위험하다고 판단됐던 정약전을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는 이야기는 흑산도의 악명을 방증한다. 이처럼 흑산도의 흑(黑)은 단순히 섬 외관의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사용된 글자가 아니다. 섬에서의 삶을 부정적으로 비유하려는 목적이 다분한 글자다.


그러하기에 『자산어보』라는 어류도감의 이름은 귀향지에 대한 정약전의 애정이 드러나는 작명이라 할 수 있다.  흑산도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았을 것인 데다 신유박해로 말미암아 가게 된 지역이기에 분개를 품을만함에도, 정약전이 흑산도에 애정을 표했다는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이제 표제에 대한 의문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정약전이 흑산도에 애정을 품게 된 경위로 말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역사 자료들은 이 부분을 명쾌하게 답해주지 못한다. 이때 영화의 힘이 발휘된다. 영화 <자산어보>는 역사적 증거들이 메꾸지 못한 그 간극을 채워준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흑산도를 사랑하게 된 정약전

영화 속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다. 그러나 이미 성리학의 본령은 퇴색됐고 기득권을 견고히 하기 위한 정략적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정약전은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 성리학에 회의를 느껴 백성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서양학문에 눈을 뜬다.  

그런데 정약전이 관심 갖던 당대 서양학문의 근간은 천주교였다. 천주교는 당시 조선 성리학에서 강조한 효의 실천, 제사,를 금하였고 몇몇 서학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이 조선에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고 있던 정약전은 이를 따를 수 없다며 서양학문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약전이라는 인물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영화 속 정약전은 실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서학자다. 언뜻 보면 중구난방에 소신이 없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그가 학문을 하는 이유는 백성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윤택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정약전은 학문의 존재 이유가 백성들에 있기 때문에, 특정 학문의 뿌리와 이치를 따르는 일이 백성들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이 성리학이든 서학이든 따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각 학문의 나쁜 점들은 배제하고 좋은 점들만 배워 이를 백성들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나름대로의 굵직한 소신을 내비친 것이다. 정약용의 형답게 가히 실리적이다. 사학을 추구했다는 의혹에 숱한 고문을 받는 상황에서 신념을 곧이곧대로 견지했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융통성 있는 대처로 정약용의 목숨을 살린 정약전의 행동은 외려 그가 아우보다 실사구시적 가치를 더 중시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유박해의 풍파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흑산도에 도착한 정약전은 한동안 내적 방황을 겪는다. 유배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행해왔던 연구 노력과 별개로 그가 목도한 흑산도 주민들의 삶이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총명한 청년 창대를 만난다. 창대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던 중, 정약전은 창대에게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말을 하나 듣게 된다.


‘홍어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


정약전에게는 뒤통수가 얼얼했을 한마디였다. 백성들을 위해 학문을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는 백성들의 실생활에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여러 학문 서적에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었다. 창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백성들의 삶을 면밀히 천착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길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뒤로 정약전은 흑산도 주민들의 삶과 직결된 내용을 연구하여 이를 책으로 엮는데, 이것이 바로 , 어류도감, 『자산어보』다.


영화에서 알 수 있듯, 흑산도는 정약전에게 특별한 장소였다. 흑산도는 일차적으로 정약전의 학문적 물음에 정답을 제시해준 섬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산도라는 섬이 아니라 흑산도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 했겠다. 아울러, 정약전은 유배기간 동안 흑산도 사람들로부터 백성들의 애환과 소소한 삶을 배울 수 있었다. 흑산도 사람들 덕에 일상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정약전에게 흑산도는 애정이 깃든 장소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속에서 『자산어보』에 자(玆)를 사용하라고 제안한 사람은 창대였다. 그러나 정약전이 창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의 바탕에는 분명 이러한 흑산도에 대한 애정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정약전은 흑이라는 거무칙칙한 의미의 글자로 흑산도를 표현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정약전에게는 흑산도야말로 백성들의 삶이 배어있는 진정한 학문의 공간이었을 테고 자신의 인생을 바꾼 공간이었을 테니 말이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흑백 필터의 이유


<자산어보>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흑백 필터를 유지하다 결말부에 흑산도를 롱샷으로 비추는 장면에 다다라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의 전체 프레임에 컬러를 입힌다. 이준익 감독의 이전 흑백 영화 작인 <동주>와 명백히 분리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을 컬러로 전환하는 연출은 영화의 통일성을 무너트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익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컬러를 삽입했고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동이 마지막 컬러 숏의 존재 당위를 설득시켜준 셈이다. 묘한 감동의 이유를 알아내고자 해당 컬러 숏의 앞뒤 맥락을 다시 한번 곱씹어봤다.


창대는 정약전으로부터 다양한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결국 정약전과 뜻을 달리하여 과거시험을 보러 육지로 올라간다.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창대가 가족의 안락한 삶을 우선순위에 두기 시작해서였겠다. 육지로 올라간 창대는 양반 출신 아버지의 신분과 자신의 총명한 머리 덕에 쉽게 관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창대는 결심한다. 자신이 열심히 공부한 성리학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그러나 창대는 잔인한 현실 앞에서 좌절한다. 목민심서가 명하는 바와 정 반대로 행하는 관리들이 허다했고 허울뿐인 성리학은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창대는 탐관오리들의 부패를 막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지만 창대에게 돌아온 것은 오직 '세상 물정 모르는 헛똑똑'이라는 칭호뿐이었다.

어느 날, 갓난아기에 세금을 부과한 탐관오리에 분노해 한 백성이 자신의 성기를 잘라 자살한다. 이를 목격한 창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 탐관오리의 목을 조른다. 다행히 탐관오리는 목숨을 부지했지만 창대는 양반으로서 해서는 안될 행동을 했고 아버지로부터 질책을 받는다.

창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흑산도로 돌아오게 된다. 영화의 프레임이 컬러로 바뀌는 순간은 창대가 흑산도로 돌아올 때 등장한, 흑산도를 "누군가가 멀리서 바라보는듯한" 느낌의 숏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컬러 숏을 볼 때, "누군가가 멀리서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굉장히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의 "누군가"가 누구였을까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컬러 필터의 흑산도 롱숏이 창대의 시점 숏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그렇다면 영화 내내 이어졌던 흑백 프레임은 줄곧 창대의 시선을 대변했던 게 아닐까?

분노 일변도의 삶을 살면서 성리학과 주자학이라는 틀 속에 갇혀 진실을 보지 못했던 창대의 시선은 흑백 프레임처럼 제한적이었다. 창대는 정약전으로부터 틀을 깨도록 하는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결국 자신의 흑백 프레임을 깨지 못했고, 정약전의 가르침에 반하는 성리학의 삶, 즉, 육지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아마 창대는 육지에서의 시간들 속에서 정약전이 강조한 자명한 진리들을 깨달았을 것이다.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학문이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임을,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백성들의 삶을 손수 녹여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흑백 필터를 형형색색의 컬러필터로 변환시키는 방식을 통해 창대의 깨달음을 표현했다. 관객들이 마지막 컬러 숏에서 느꼈던 감동은 창대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을 때 느꼈던 그 감동과 맞닿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정약전은 창대에게서 “홍어가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가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는 말을 듣고 나서부터, 혹은 흑산도에 처음 당도할 때부터, 줄곧 형형색색의 흑산도를 볼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자(玆)가 깊고 짙어 들여다볼 것이 많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 역시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창대에게 끊임없이 가르침을 주려고 했던 것도 자신이 보는 형형색색의 시각을 창대가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자산어보라는 이름은 이제 흑산어보라는 이름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이항대립 관계처럼 말이다. 자산어보는 학문의 진정한 의미, 관직자의 자세,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 숨겨진 색을 바라볼 수 있는,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정약전의 시선이 담겨있는 표제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흑산어보는 멀리서 백성들의 삶을 지켜보기만 하는 무책임하고 거만한 시선을 시사한다.


어쩌면 영화 <자산어보>는 사실 정약전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자산어보와 흑산어보의 대비적 관계를 바탕으로 창대가 컬러의 시선을 얻게 된 그 과정을 다룬 영화일지도 모른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재차 당부하는 말


영화 <자산어보>는 아름다운 영상미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창대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 자체로 압권이다.

이 외에도, 정약전과 정약용이 함께 시를 읊는 장면, 파랑새가 등장하는 장면 등등 미학적인 관점에서 음미할 순간들이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글 서두에서 사전 역사공부를 당부한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자산어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내재된 영화기 때문이다. 본 글에 서술된 요소들 외에도 사람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을 수 있고 수많은 생각들이 파생될 수 있다. 그 근간에 있는 것이 정약전이라는 인물과 『자산어보』라는 서적이다. 이에 대해 조금 공부하고서 영화를 보게 된다면 보다 깊고 넓은 사고가 가능해진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한 번쯤 개인 방역을 철저히 하여 자산어보를 관람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보게 된다면 꼭 자산어보와 정약전이라는 인물에 대해 한번 알아보고 영화를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각자의 영화 <자산어보>를 만들고 각자의 <자산어보>를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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