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기후변화
아니나 다를까 올해 들어서도 지구온난화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기본적으로 인류가 배출하고 있는 온실가스에 의해 지구 전체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고 있는 현상을 일컫는다. 문자 그대로 지구가 달궈지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티핑 포인트'를 언급하며 이 이상의 온도 상승으로 임계점을 넘어가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해왔다. 요즘 날씨를 보면 이미 갈 데까지 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과거에 비해 점점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며, 자기 나름대로의 노력을 꾀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람직한 모습이다. 우리는 종종 개성이나 주관적 입장으로써 존중의 대상으로 언급하는 목록의 것들을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구온난화가 인간이 초래한 문제인지, 지구온난화 자체가 다른 지질연대에 비해 특이한 것인지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지구온난화 허구설', 혹은 과장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내 체감상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여전히 등지에서 팔짱을 끼며 냉소적인 얼굴로 입꼬리를 비틀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 듯하다.
나는 여기서 지구온난화 문제를 축소시키거나 부정하는 데 혈안이 된 이들을 설득하고자 글을 쓰려는 건 아니다. 그건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지구온난화 현상은 진화론만큼이나 사실이다. 거기에 존중받아야 할 이견 같은 건 없다. 자신의 이익을 정당화하려는 석탄·석유 기업, 본인이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상의 편의를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반 시민들, 혹은 남들이 모두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외치면서 특별해지는 듯한 착각을 만끽하고자 하는 지적 무능자. 이 세 부류만 있을 뿐이다. 적어도 IPCC 보고서에 의하면 그렇다.
내가 문제를 삼고자 하는 대상은 오히려 기후변화 문제에 공감하면서도, 특유의 무력감에 의해 구체적인 실천을 포기하는 사람들이다. 어차피 개개인이 분리수거 잘하고, 에어컨도 적정 온도로 틀고, 일회용 제품 사용을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논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공장이 가동되고 있고, 우리보다 인구 규모가 훨씬 큰 몇몇 나라에서는 여전히 환경 문제에 동참하고 있지 않는 것 같으니 말이다. 심정적으론 공감이 된다. 당장 내 발걸음이 닿는 지역 내의 동선을 다루는 것도 벅찬데, 그 너머의 나라, 나라 너머의 대륙, 그리고 지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무력감을 근거로 실천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본인의 태도가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모든 기업, 공장 단지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기후변화는 지구 전체의 문제다. 어느 기업, 어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중은 종종 정서적인 편향에 사로잡혀 특정 국가만 없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맥락을 봐야 한다. 기후변화 문제는 21세기에 들어 갑자기 나타난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환경 문제에서의 실천을 부르짖는 소위 '선진국'들이야말로 실은 이전 세대까지의 주범이었다. 오늘날 발전을 도모하는 개발도상국들, 중국이나 인도와 같이 거대한 인구 규모로 지구촌의 생산을 도맡는 국가들의 문제는 그 이후의 문제다.
어쨌든 누구 하나의 탓을 할 상황이 아니다. 말하자면 공동의 실천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 누가 그 실천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모든 공장이, 모든 기업이 '어차피 내가 실천해봤자 유수의 기업, 공장들이 똑같이 자원 낭비를 펑펑 해대면 의미 없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당신은 기업이나 공장의 이런 태도가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 비판의 잣대는 결과적으로 어떤 이유에서든 실천을 포기한 개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나 혼자 플라스틱 제품 하나 안 쓴다고, 에어컨 냉방 온도를 26도로 고정해놓는다고 뭐가 달라지겠냐며 이전과 같은 안락하고 낭비 일색인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기후변화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국가, 기업, 공장들이 나 하나 아낀다고 문제가 해결되겠냐며 산업 매연을 쏟아내는 것이나 논리적으론 똑같다. 개개인의 안일한 태도와 가치관이 문제를 해결할 길을 봉쇄하고 있다.
이에 여전히 개인적 실천의 효과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누군가가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두 태도가 논리적으론 똑같진 모르나, 현실에 끼치는 영향의 규모가 다르지 않느냐. 개인이 자신의 사치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용인되는 것과 거대 조직이 그들의 낭비를 정당화하는 방식이 용인되는 건 다른 범주의 문제가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엔 핵심을 놓치고 있다. 핵심은 규모의 사실(Fact)이 아니라 그 현상에 깔린 사람들의 내적 기제다. 기업이나 공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종의 인공 집합체인가? 스스로 판단하는 괴이한 지능체의 군집인가? 그들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건 사람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사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시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그렇기에 모종의 정당화 기제도 동일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제가 개개인에게 용인될 수 있다면 관리자들은 언제까지고 그러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이해해야 한다. '나부터 실천'이라는 표어는 입 발린 이상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거시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기후변화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문자 그대로 '나부터 실천'의 기치를 지구 전체로 확산시키는 수밖에 없다. 빠칭코라도 하는 심정으로 언제 도래할지 모를 기술 혁신을 기다리며, 여름마다 도덕적 우월감에 취해 냉소적인 척하는 방법 외에는 말이다.
나는 인터넷 글을 잘 읽지 않지만, 가끔 둘러보곤 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글을 봤다. 미래에 후손들이 심각한 기후 문제로 고통받을 때, 앞선 세대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글이었다. 우리가 환경 문제를 다룰 역량이 부족했나? 개개인의 에너지 사용은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처사였나? 기업이나 공장들은 사적 이윤 논리 외에 그러한 환경 파괴를 주도해야만 했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나? 지구온난화는 불가역적인 결과였나?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우리 모두가 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이렇다.
따라서 지금과 같은 추세로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고, 실제로 상기한 물음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부끄러움의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희의 더위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미래 세대의 안락함보다 당장의 내 편의가 우선이었다고 고백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그저 상상으로나마 가늠할 수밖에 없다. 그런 표정을 본 후손들, 그따위 대답을 들어야만 하는 후손들의 심정이 어떨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