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사실, 당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자명해 보이는 원칙이나 원리 같은 것들이,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들과 만나서 나타날 땐 분간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경우는 원칙의 일반적인 명령이 구체적인 사태의 세부사항과 충돌하거나, 혹은 그 사태에 잘못된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판단상의 모호함을 배가시키거나 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도덕적으로 사는 게 옳다는 원칙은 누군가 칼을 들고 나를 죽이려고 할 때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살라는 원칙은 그 자체로 부당한가? 혹은, 정서적 좌절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계산된 이성의 조언을 건네는 것은 보통 문제를 악화시킨다. 그렇다면 이성적 숙고는 어떤 심리적 문제에도 적용시킬 수 없는 원리인가?
결국 이런 문제들은 원칙이나 원리의 적용에 있어 정도와 범주 선택의 난점을 낳는다. 우리는 어떤 원칙을 현실의 문제에 어느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가? 또 우리는 어떤 종류의 문제에, 어떤 범주의 방법론을 채택해야 하는가? 이러한 실천의 문제는 순전히 수학적으로 계산되거나 과학적으로 정량화될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을 구성한다. 인문학, 특히나 철학의 언어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간극을 포착하고 재조명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간주한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노력이 경시되거나 심지어 좌절되는 사회에선 이론이 현실로부터 유리되거나, 현실이 이론적 내용들을 비웃게 된다. 이른바 경험 만능주의, 실천의 독재가 만연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만을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담론의 진행에 있어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범주의 혼란, 도덕적 독단 등이 득세한다. 이에 공론장은 시장통이 된다.
하나의 단순한 구분에서 시작해 보자.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실과 당위의 구분이다. "A는 B이다"라는 사실과, "A는 B이어야 한다"는 당위는 다르다. 물론 어떤 경우에, 이 둘의 의미론적 내용이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다. 이른바 '필연적으로 참인 것'들이 그렇다. '삼각형은 세 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삼각형은 세 변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는 당위와 의미론적으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삼각형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세 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 변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삼각형이 아닌 것이다. 삼각형의 존재가 그와 관련된 존재론적 당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의 명령은 인간종의 인위적인 당위에서 생성되는 것이라기보단, 단순히 개념의 자기 규정적 표현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특히 사회적 현상이나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사실과 당위는 구분된다. 예컨대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근력이 떨어지는 것은 생물학적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이 남성보다 근력이 떨어져야 한다는 모종의 당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괴상한 주장의 근거가 될 수도 없다. 다른 예로 유전적 소인으로 인해, 여성과 남성의 성격적 특질이 통계적으로 구분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를테면 여성적 성격, 남성적 성격이 범주적 차원에서 구분될 수 있다는 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성은 남자다워야 한다거나, 여성은 여자다워야 한다는 당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듯 대개 사실과 당위는 구분된다.
그런데 사실과 당위를 구분하지 못한 채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타인의 말을 듣는 경우, 여러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꽤 빈번하게 발견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의 훈육에 있어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동원해선 안 된다'는 당위는 정당하다. 적어도 나는 이것이 전적으로 정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1세기 이전의 대한민국 공교육 현장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공립학교에서 선생님 한 명이, 많으면 80명이 넘는 반의 학생들을 관리해야 했다. 선생님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의 한계는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모든 선생님이 초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선생님에겐 학생들이 학교에서 최소한의 안전과 교육의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무에 직면해 있다. 그가 각각의 학생들과 개별적으로 대화하고, 설득하고, 그에 맞는 구체적인 교훈들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타협점으로, 폭력을 통한 공포적 분위기를 통해서라도 가능한 많은 학생이 온전히 제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했을 수 있다. 이에 가설적으로, '전근대적 교육 여건 속에서, 선생님이 학생의 통제를 위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대개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사실 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단지 논점의 설명을 위해 이러한 가설을 사실이라 가정하는 것이다.)
문제는 예를 들어 내가, 이런 모종의 사실을 말하는 순간, 어떤 도덕적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사회적 장면에서 '전근대적 교육 여건 속에서, 선생님이 학생의 통제를 위해 폭력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은 대개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는 문장을 발화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럼 보통 그걸 들은 사람들은 '그렇다면 교육에 폭력적 수단을 이용하는 게 정당하다는 거냐'고 반문한다. 사실을 말하는데 당위로 되받아치는 모양새다. '여성의 신체적 근력은 평균적으로 남성보다 떨어진다'는 사실을 말하는데, '그럼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것이냐'는 가치론적 문제를 들이미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이러한 소통상의 괴리가 반복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치 아래, 사실을 당위에 부합하도록 왜곡하여 인식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사실을 말하면 '분노'한다. 어떤 종류의 당위적 주장을 불변의 자연법칙인 것처럼 여긴다. 결국에 공론장은 듣기 좋은 외양으로 자신의 말을 꾸며내는 사교장이 되고, 정치는 호감을 사기 위해 공허한 원칙만을 강조하며 무능해진다.
물론 어떤 경우에, 사람들은 사실을 말하는 척하면서 모종의 당위를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한다. 사실을 당위의 간접적인 표현처럼 사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몸에서 악취를 풍기는 사람에게 '청결 유지는 신체적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노력으로 해소될 수 있는 악취로 타인에게 해를 끼쳐선 안 된다는 당위를 환기시킬 수 있다.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일반적으로 간 기능이 떨어진다'는 통계적 사실을 비웃음과 함께 말한다면, 모종의 인종차별적 가치관을 지지한다는 뜻이리라. 이 경우 사람들은 어떤 사실이 특정한 당위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사실이 그것과 관련된 당위를 직접적으로, 자동적으로 도출한다고 여기기까지 한다. 이러한 환상, 지적 태만은 사실과 당위를 구분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떡해야 하는가? 사실과 당위에 대한 섬세한 분별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대답은 어떤 순환적인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나는 앞서 원칙이나 원리의 내용적 자명함이, 현실의 구체적인 사태에 대한 적용에서 발생하는 난점에 무력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사실과 당위를 구분해야 한다는 인식적 당위는 너무나 당연하고, 심지어 뻔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 생각엔 정상적인 인지 능력을 갖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런 식으로 여길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인 현대 사회의 여러 장면에서, 바로 그런 원칙의 부재에서 발생하는 소통상의 문제들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인가?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사람들이 스스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실이나 명제들에 대해, 그들 자신이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외출 후 손을 씻는 게 건강상의 많은 이점을 낳는다는 사실은 문명인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왜냐하면 사실 많은 사람이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면역력의 저하나 유병률과의 관계, 혹은 손을 씻음으로써 예방할 수 있는 다양한 문제 상황들에 대한 명확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손을 씻는 게 건강에 왜, 어떻게 좋은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채, 어떤 지식을 단지 하나의 문장으로, 공허하게 되뇌는 수준에서 알고 있는 셈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사실은 단지 하나의 문장으로만 존재하고, 또 그것의 반복으로써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것이 단순하고 '뻔하게' 느껴진다. 이는 인지적 차원의 맹시를 낳는다. 결국 분별력은 둘 이상의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문장의 의미와 내적인 맥락에 대해서도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재하면 '나는 손 안 씻고 살아도 건강하게 잘 사는데?' 수준의 경험적 독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접근은 운동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의 괴리, 기타 귀찮지만 필요한 일들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간극을 대부분 설명할 수 있다. 원칙이나 원리를 적용하는 데 있어, 정도와 범주 선택의 문제도 이 지점에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