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반성, 실천
비 오는 날 종종 산책할 때가 있다. 그렇게 빗소리와 함께 생각에 잠겨 길을 걷다 보면, 문득 발치에 지렁이가 눈에 들어온다. 비가 오고 있어서 그런지, 지렁이들도 바깥으로 나와 도로변에서까지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밟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그 이후의 내 산책엔 '지렁이에 대한 주의'라는 요소가 추가된다. 그것은 신비한 일이다. 그런 순간 이전까지만 해도, 나의 산책길은 그저 축축하지만 쾌적하고, 뻥 뚫린 길 정도에 불과했다. 나의 발걸음은 무엇 하나 거리낄 것 없이 경쾌했고, 신호등의 제재를 받지 않는 한 멈춰 설 일이 없었다. 산책하는 나는, 어떤 의미에선,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한 뒤로 나의 산책길은 '어딘가에 있는 지렁이를 밟을 수도 있는 길'이 되었다. 그 사실에 나는 주의를 기울였고, 발걸음을 전보다 조심히 옮겼다. 나는 어떤 경험을 했고,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학습하여, 그 학습한 결과를 그 경험과 유사한 모든 상황에 적용했다. 그러자 산책길이 변화했다. 말하자면 세계가 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일들의 결과를 교정하고 싶어 한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이라던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비트 코인을 쟁여놓고 싶다던가, 소중한 사람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즉, 사람은 어떤 특수하고 개별적인 사건을 반성함으로써, 그것에 함축되어 있는 일반적인 사실이나 가치, 당위를 학습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한 경험은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고유한 무언가지만, 그와 유사한 시간대나 장소, 사람들 사이의 비슷한 사건들에서 참고할 수 있는 깨달음을 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과거로 돌아가 그 상황에서의 선택을 교정하는 것과 상당 부분 같다. 추상적으로 보자면, 인간의 생애는 유사한 사건들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회, 반성은 실천적 의미를 가진다. 과거로 돌아가서, 했으면 하고 바라는 모든 실천의 단서는 그 과거와 유사한 현재, 미래의 상황들에서 교정의 기회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반성이란 '과거를 현재화하여 다시 쓰는 것', 그럼으로써 교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학습과 실천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고, 인격적 성숙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반성적 깨달음의 총체가 삶의 방향성이자 기반이 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의 양상은 사뭇 다른 인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실제로 과거로 돌아가 똑같은 문제 상황에 처했을 때]와 [내가 바꾸고 싶은 과거의 상황과 유사한 현재의 어느 시점], 이 두 상황을 생각해 보라. 거의 모든 사람은 전자에서 더 나은 선택으로 변화를 주고 싶어 할 것이고, 또 자신이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라 확신에 찰 것이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 사람들은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을 곧잘 실천하는 것 같진 않다. 예컨대 '어렸을 때 더 열심히 공부할걸'이라는 후회에 젖어 있는 어떤 사람은, 공부가 필요한 삶의 또 다른 시점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선 좀 더 감정 표현을 자제해야겠다'고 결심한 어떤 사람은 바로 그러한 자제력이 필요한 현실에서 여전히 버럭 화를 낸다.
이상한 점은 앞서 말했듯, 전자와 후자의 상황이 의미론적으론 동일하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변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후자의 경우에도 똑같이 실천해야 한다. 후자의 실천을 실패하는 사람은 전자의 경우로 돌아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치는 우리에게 직관적인 거부감을 일으킨다. 이를테면 내가 지금에야 숏폼 컨텐츠를 소비하는 걸 자제하는 건 어렵지만, 실제로 시간이 되돌아가 나에게 다시금 변화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야말로 숏폼 컨텐츠를 끊는 건 가능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 시점에서든, 현재의 시점에서든 숏폼 컨텐츠를 자제하거나 끊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음에도 말이다. 즉, 과거에 내가 후회하는 어느 시점의 사건으로 내가 정말로 돌아가는 것이랑, 그와 유사한 선택 상황이 주어진 현재는 그것에 임하는 나의 태도에 있어 현저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같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말하자면, 우리는 왜 과거의 반성적 깨달음을 현재의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어려움을 겪는가?
그것은 우리가 이러한 구조적 그림 속에서 놓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선 마치 1)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일어난 개별 사건이 있고, 2) 그 사건에서의 내 선택 내지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있고, 3) 그 결과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있고, 4) 그 숙고의 결과에 해당하는 모종의 교정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교정을 과거와 유사한 현재나 미래의 상황에서 반영하는 것이 실천적 반성이다. 이렇게만 보면 학습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과정엔 어떤 장애나 문제도 없어 보이기에, 상술했듯 실천의 어려움에 관한 의구심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차적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깨달음과 실천이 단순한 일대일 대응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둘 사이의 그림 안에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다시 쓰기를 방해하는 어떤 힘, 즉 관성이다. 관성은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서 했던 선택을 동일하게 반복하려는 경향이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러한 관성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숙달에는 방향이 없고, 반복되는 모든 것은 대개 숙달된다는 자연적 사실에 입각한 힘일 뿐이다. 따라서 바람직한 반복은 좋은 습관을 낳고, 또 긍정적인 성취로 이어진다. 반면 무언가를 소진할 뿐인 반복은 나쁜 습관을 낳고, 부정적인 사태를 야기한다.
이러한 그림이 맞다면, 우리의 삶에 있어 행위나 선택은 반성, 실천, 관성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된다.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변화한 행동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확신은, 이 삼각관계에서 '관성'이 전적으로 부재한 채 반성의 결과와 실천의 기회만이 있는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를 현재화하여 다시 쓰는 일에는 관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다. 관성은 다시 쓰기를 방해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숱한 반성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유사한 현재나 미래에 똑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그러한 반성의 경험만 반복될 뿐,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선 그와 관련된 어떤 실천도 일어나지 않은 채, 관성에 따라 세월이 소진된다. 이에 따라 스스로의 정신, 마음은 마치 자기가 성숙한 인격성을 성취했고,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그의 인격성 자체는 미성숙한 상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즉, 그의 세계는 과거에 비해 거의 변화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여담이지만, 우리의 삶이 실제로 이런 구조 속에서 행위나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우리가 자신의 실천에 대해선 실패에 관대하고, 타인의 문제 상황에 대해선 청산유수로 지적질할 수 있는 이유가 설명된다. 관성은 일종의 무의식적 영역으로, 당사자의 느낌이나 '근육기억' 등에 의존해 나타난다. 즉, 그것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의식의 영역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가 타인을 볼 땐 어떻겠는가? 우리는 타인의 무의식, 근육에 내장된 기억, 숙달 같은 것들을 체감할 수 없다. 그러면서 반성과 실천의 부분만을 피상적으로 들여다보니, 타인의 문제는 죄다 쉬워 보이는 거고, 너무나 명쾌하게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하나의 세계다. 나의 세계에 퇴적된 깊은 시간의 밀도는, 물리적으로, 남들에게 역시 동일하게 적층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또 타인의 사정에 쉽사리 왈가왈부 해선 안 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