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맑은돌 Jul 28. 2024

경호원이 좋아한 자두맛 파인애플

알면서도 져주기로 함

앞서 걷던 '득(Duc)'이 나에게 급한 경고의 손짓을 보낸다. 살짝 어두운 이 호텔의 복도에서 그를 뒤따르며 걷던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신호에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와 나는 베트남 지방의 한 호텔에 들어와 이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호텔의 복도에 불이 켜있기는 하지만 방 번호를 확인하는 용도로 켜있는 정도인 것 같고, 저쪽 복도 끝의 창밖에는 어두운 진회색 구름만 달빛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고 있다. 걷고 있는 복도의 바닥엔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의 카펫이 깔려있고, 이 카펫 때문에 우리들이 걷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조용히 앞장서서 걷던 그는 내 방문 앞에서 멈추더니 오른팔 전체를 몸통 바깥으로 벌려 본인의 가슴 높이까지 올리고는 나를 쳐다봤는데, 나에겐 멈추라는 신호로 읽혔다.


"Should I stop here?(여기서 멈춰야 돼?)" 내가 묻자 나처럼 검은 정장 바지에 흰 긴팔 셔츠를 입고 있는 '득(Duc)'은 조용히 하라며 본인의 입술 앞으로 검지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더니 1층의 카운터에서 받은 카드 키로 내 방의 문을 열고 혼자 들어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난 일단 방문 밖에서 그의 행동을 관찰했다. 그는 내 방의 옷장을 열어보고, 옷장에 걸린 가운을 집어 들고는 손으로 툭툭 털어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득(Duc)은 멀쩡한 침대 위의 베개를 들어 올리거나 커피포트 뚜껑을 열어보기도 하며 혼자 경호원이 된 듯 행동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테이블에 올려진 무료로 공급하는 물병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Everything is clear, sir." 그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며 나에게 보고를 했다. "뭐 하는 거야?"라고 놀란 내가 묻자, "사장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라고 득(Duc)이 대답한다.


그는 우리 회사의 총무 매니저이다. 오늘은 호치민에서 4시간 정도 떨어진 베트남 남부 지방으로 대리점 사장들을 만나는 미팅을 하러 출장을 나왔고, 내일까지 이 지역에서 거래처 미팅이 잡혀있다. 회사에는 아직 통역 직원이 없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총무 매니저 득(Duc)과 함께 나온 것이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키는 165 정도에 몸무게는 60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말랐을 수도 있다. 남자가 너무 마른 것 아니냐고 하면, 그래도 늘 운동을 하고 있다면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어 보이는 팔뚝을 들어 올려 뽀빠이 자세를 취하곤 하는 직원이다. 이상하게 자신감이 충만하다.


그는 회사에서 총무와 인사를 담당하기 때문에 조금은 감성적으로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성격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회사의 몇 차례 어려운 일들을 해결하는 능력을 보면, 강단 있게 앞장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니저이다. 역시 경륜과 자신감이 업무를 이끌어가는 데는 큰 힘이 된다. 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득(Duc)의 경우 영업 현장에는 이번에 처음 나와보는 것이고, 나도 거의 그런 편이다. 그럼에도 오늘 낮에 대리점 사장들과 미팅을 잘 끝냈고, 미팅 후에 영업 사원, 대리점 사장, 그리고 그의 지인들과 저녁 식사 자리를 갖게 되었다. 처음 이런 업무를 경험해서 그런지 낮에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득(Duc)도 얼음 가득한 잔에 타이거 맥주를 여러 잔 마시더니 웃음이 돌기 시작한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베트남 직원인 그는 술을 마신 뒤에 영어가 하고 싶어진 것 같다. 갑자기 영어 인사말 강의를 나이 어린 영업 사원들에게 하기 시작했다. 영업 사원들도 본인들보다 나이 많은 총무 매니저의 술기운에 기분을 맞춰주고 있다.


식사자리가 마무리될 즈음에 식당에선 과일이 나왔다. 베트남에서 잘 본 적이 없는 자두가 나왔는데, 이 자두를 들어 올린 득(Duc)이 영업 사원들에게 이게 영어로 뭔지 물어보았고, 다들 모른다고 하자 자신 있게 말했다. "It's a pineapple(이게 파인애플이란 거다)." 영업 사원들은 '아! 이게 파인애플이구나!' 하는 깨달음의 표시를 표정과 몸짓을 보였다. 옆에서 듣던 나는 웃음이 났다. "이거 파인애플 아니야!" 내가 말하자 의기양양하던 표정의 득(Duc)은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나에게 설명했다. '이게 사과처럼 생겼는데 향이 좋아서 파인애플'이라고 했다. 베트남어로 파인애플은 '텀(Thom)'이라고 부르는데 '텀'의 또 다른 뜻은 좋은 향기를 낸다는 것이다. 나름 득(Duc)의 설명은 진지하게 들린다. 그래도 어쩌나? 이건 파인애플이 아닌걸.



하지만 득(Duc)에게 졌다. 이날은 그냥 이걸 파인애플이라 부르기로 했다. 다 알고 있어도 분하게 져야 할 때가 있다. 득(Duc)의 무지막지한 억지에 그냥 알겠다고 했다. 파인애플 사진을 보여줘도 술이 취한 그에겐 이길 수가 없었다. "이제 들어가자. 내일도 아침부터 거래처 만나야 하잖아." 그렇게 우린 식사 자리를 끝내고 득(Duc)이 미리 예약해 둔 호텔로 이동했다. 그리곤 처음의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득(Duc)은 날 지켜야 한다면서 내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방의 모든 것을 확인했다고 보고한 그에게 "오늘 너무 고생했고, 이제 득(Duc) 방으로 들어가서 자. 내일 봅시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아마도 처음 나온 영업부서와의 출장에서 많은 긴장을 하고, 베트남 현지의 거래처와 한국 사장인 나 사이에서 영어로 통역을 하느라 꽤나 신경을 쓴 모양이다. 본인은 잘 모르는 분야인 영업 파트 사람들이 잔뜩 나와있고, 거래처 사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고, 또 나에게도 본인을 어필하고 싶었던 마음도 잘 이해가 간다. 모르긴 해도 아마 나도 남들에게 이러고 있을 것이다. 남들도 모른 척 나의 모자람을 받아주고, 난 또 나름대로 나의 잘남을 어필하고 있겠지. 이렇게 서로 알면서 당해주고, 또 모른 척 밀고 나가는 것이 사회생활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도 어김없이 꽃을 보낸 그(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