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는데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Dear Mr. Lim."으로 시작하는 영문으로 된 문자다. 발신인은 5년 전에 우리 회사를 퇴직한 직원인 응옥(Ngoc)이다. 이 직원은 퇴직한 이후에도 매년 회사의 창립기념일마다 화환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회사를 사랑할 거면 퇴사하지를 말지, 그때는 계속 회사에 근무하라고 잡아도 나가더니 매년 잊지 않고 회사의 생일마다 꽃을 보내고 있다. 잠시 후 회사의 인사 담당 매니저에게도 메시지가 왔다. "Mr. Ngoc, the previous purchasing manager sent us flowers." 이전 구매 담당자인 미스터 응옥이 우리에게 꽃을 보냈습니다.
이 말은 베트남에서 상당히 어색한 말이다. 그래서 인사 매니저도 이를 의식하고 쓴 문장인 것이다. 어느 부분이 어색하냐면, '미스터(Mr.)'와 '응옥(Ngoc)'을 함께 썼다는 것이 어색한 지점이다. 단어의 뉘앙스를 알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굉장히 신기한 말이다. 왜냐면 '응옥(Ngoc)'은 여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남자가 쓸 수도 있는 이름이 아니라 명확히 여자가 쓰는 이름이다. 구슬 옥(玉)의 베트남식 발음이라서 베트남에서 이 이름은 구슬이라는 뜻이 있기도 하고, 진주라고 까지 확장되는 뜻을 가진 단어라서 그렇다. 참고로 베트남에서는 성이 아니라 이름의 제일 끝 글자 앞에 '미스'나 '미스터'를 붙인다. 그러니까 응옥(Ngoc)은 성이 아니고 이름이다. 한국식으로 하면 '홍길동'을 공식적으로 부를 때 '미스터 홍(Mr. Hong)'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미스터 동(Mr. Dong)'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이하지만 이곳 베트남의 특수한 문화이니 받아들이기로 한다.
8년 전 처음 베트남 법인에 발령받아 나왔을 때 응옥(Ngoc)을 부를 때 모두 '미스 응옥(Miss Ngoc)'이라 불렀다. 그녀는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나이는 어리지만 호치민의 명문대학교를 나오고 영어도 유창하게 하는 직원이어서 3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거의 단정한 흰색 블라우스나 셔츠를 입고 있던 모습으로 초창기의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한 번은 미스 응옥(Miss Ngoc)을 포함한 회사의 매니저들과 회식을 마친 뒤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의 알림을 진동으로 하기 때문에 좀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벨소리가 들리니 어쩔 수 없이 소파 위에 있는 전화기로 다가갔다. 발신인은 나였다. '무슨 일이지?' 내가 술에 취한 것인가? 분명히 내 스마트폰인데, 내가 전화를 걸었고 내가 받아야 하는 이 상황이 무엇인가 싶었다. 그렇게 내가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는 응옥(Ngoc)이 말을 걸었다. 회식자리에서 스마트폰이 서로 바뀐 것이었다. 둘 다 색깔이 검정으로 똑같은 삼성 스마트폰이었고, 둘 다 커버를 사용하지 않았다. "절대 내 스마트폰 열어보면 안 됩니다.", "너도 내 거 뒤지지 말고 내일 아침에 회사에 잘 가지고 와라." 스마트폰을 열어서 보진 않았지만, 첫 배경화면에는 사진 찍기 어플 필터를 활용한 긴 생머리의 그녀 사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로부터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늘 변함없던 긴 머리 스타일을 바꿔 단발머리를 한 그녀를 보았다. 일반적인 단발이 아니라 쇼트커트, 아니 거의 스포츠머리 형태였다. 하지만 왜 머리를 잘랐는지 묻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개인적인 일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난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을 가지는 편도 아니다.(와이프가 미용실에 다녀와도 잘 모르는 날이 많다.) 그러다가 또 보니 그녀가 늘 입던 흰색 블라우스 계열이 아닌 옷을 입기 시작한 것을 알아챘다. 약간 오버사이즈의 폴로셔츠 같은 것을 입기 시작했고, 또 색깔도 흰색만 입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살이 찌니 오버사이즈가 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그녀가 사무실 의자의 등받이가 뒤로 휘어지게 과도하게 젖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폴로셔츠 아랫부분으로 해서 한 손을 옷 속으로 넣더니 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 사무실에서 여자 매니저가 동네 철물점 사장님이 폭염 주의보가 있는 날 점심에 하고 있을 법한 포즈를 하고 있었다. "Miss Ngoc, what are you doing now?"
응옥(Ngoc)은 나에게 얘기할 것이 있다며 커피 한 잔 하자고 했다. "나 사실은 요즘에 남자로 살고 있어요." 조금 충격이었다. 본인도 이런 성향을 가지지 않으려 남자를 좋아하려고도 노력해 봤는데, 여자가 더 좋고, 최근에는 한 여자와 함께 지내고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렇게 해도 괜찮은지를 물었다. 내가 직장 상사이긴 하지만 이런 것으로 업무 평가를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성적 취향에까지 조언을 할만한 입장은 아니기에 나는 상관없다고 했다. 대학교 때 들었던 여성학 수업에서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사회학적 성)에 대해 구분하는 내용을 듣기는 했었는데, 내 주위에서 이것이 다른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응옥(Ngoc)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그 둘이 다른 첫 사례가 되었다.
그 후로도 그는(응옥(Ngoc)은 '그'로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하니 '그'라고 지칭함.) 구매 매니저로서 충실히 업무를 수행하고 5년 전의 어느 날 퇴사하게 되었다. 퇴사한 이후에도 따로 만나 몇 번 같이 식사를 했었고, 그와 함께 동거하고 있는 미모의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세상엔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법.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양한 삶, 다양한 문화,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또는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받들이는 중이다. 이렇게 의리 충만한 그는 회사의 창립기념일마다 그가 그녀였던 적이 생각나게 늘 화환을 보내고 있다.